소설리스트

129화 (128/263)

129화

31. 아우구스타

클레어는 먼저 거실에서 일어섰다. 리누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만날 마음 있어?”

“…….”

“그러면 괜찮아. 아직은, 더 쉬어도 돼.”

클레어는 생각할 시간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결국 리누스는 돌아가야 한다.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어느 정도는 리누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거겠지.’

루덴도르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배제한다. 아우구스타가 자기 집안의 일을 신경 쓸 만한 때도 아니고, 설령 뭔가가 벌어졌더라도 갑자기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용건은 리누스에 대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흘러 나가지 않았어도, 상황 그 자체가 정봇값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우구스타의 사고 과정을 클레어도 거의 똑같이 밟았다.

에리히가 말한 것처럼, 그는 리누스를 완벽하게 실종시킬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완벽하게 실종시킬 수 있는 것은 파도와 클라우제너뿐이다.

그러므로 파도에 휩쓸려 갔을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아우구스타는 당연히 이곳을 의심하고 있으리라.

‘살아 있다고 믿고 최선을 다해 추적한다면, 당연히 이쪽을 조사하겠지.’

리누스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걱정 말고 빵이나 좀 더 먹어. 우리 집 손님인 이상은 내 보호 아래 있으니까 염려 말고.”

리누스가 잠깐 침묵했다. 에리히라면 모를까, 이 여자가 자신을 제 보호 아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으므로, 그는 붉은 눈을 휘며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 부디 잘 부탁하지.”

역시 어린놈이 거만하다.

클레어는 그에게 눈을 흘기고, 밖으로 나오며 막시밀리안에게 엘리엇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응접실로 나가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이다. 평소보다 천천히 얼굴을 씻고, 몸차림을 마치고 나가도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클레어는 평소에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기 싸움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할 만한 일이 없기도 했다.

그녀를 방문하는 사람은 대개 사업상의 거래처였고, 그게 아니라면 지연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교류해 온 인근 영지의 영주 가문이었다. 부모님의 친지란 뜻이다.

애초에 델포드 인근에는 굳이 기세 싸움을 할 만한 사교계의 세력 자체가 없었다. 고만고만한 도토리들은 뭉쳐서 서로 정보도 나누고 친분도 과시해야 그나마 제자리를 지킬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우구스타를 만나 봐야 정보만 주게 될 뿐이다. 이쪽에서 특별히 캐내고 싶은 일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적이다.

카탸 슈나이더와 토마스 보르얀스의 조직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가 먹은 ‘진정제’의 출처도 황후일 테지.’

무미, 무취인 데다가 적은 양으로 상대를 독살하거나 망가뜨리되, 청산가리나 비소 화합물처럼 잘 알려진 독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아편 오용으로 사망한 것처럼 보인다. 암살에는 절호의 수단이 아닌가.

‘어쩌면, 귀족들 사이에서 따로 아편을 유행시킨 것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있어. 누구도 그 죽음이 암살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끔.’

이미 에리히의 정보부가 지난 10년 동안 아편이나 정체불명의 심장 마비로 사망한 귀족의 목록을 만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내각의 주요 인물 3명이 심장 마비로 급서했군. 하나는 아렌 출신이었고, 둘은 진보주의자야. 나이가 있으니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아편 중독자였어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후에 그렇다는 사실이 밝혀졌어도 별달리 놀라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그런 케이스가 늘어나고, 실제로 그들이 황후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밝혀진다면 정황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 의심하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요. 황제 폐하는…….]

[쉬.]

에리히는 낮은 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면서 클레어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의혹은 의혹으로 남겨 둬. 아직은 뭐라고도 말할 단계가 아니군.]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고통이 너무 심하셨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하신 결과일 가능성이 커. 아무도 충고하지 않았던 데도 이유가 있지.]

[그래도!]

[통치는 이미 내각의 몫이야. 황제 폐하께서 반드시 계셔야 할 필요는 없어. 편찮으신 분의 이름으로 황명이 나가거나 섭정을 세우는 것보다, 하원을 통해 힘을 투사하는 게 낫다는 것에도 이미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니까.]

[묵시적 합의라고요?]

클레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해야만 했다.

[결국 ‘당신들’만 진짜 정세를 알고 합의까지 마쳤다는 거네요?]

[정보를 숨긴 적은 없어. 황제 폐하께서 심병으로 칩거 중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나.]

[폐하의 건강 상태나 내각의 통치가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위빙 상단의 주인이고, 저 촌구석 아렌 남작이라도 귀족인데, 그런 나조차도 모르게끔 통치 체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게 문제라는 거라고요.]

[에른스트 출신의 섭정을 세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투표라도 하라는 건가?]

에리히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것보다는 내각에 힘을 실어 주는 게 낫겠다는 것이 ‘내’ 결정이었어. 그런 것까지 일일이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나? 너도 위빙 상단의 문제를 결정할 때, 직공 하나하나의 의견까지 고려하지는 않을 텐데.]

[위빙 상단은 상단이에요. 당신은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는 거고요!]

[어차피 똑같은 결론이 날 거라면, 나머지 절차는 낭비지. 늘 말하지만, 네 의견은 탁상공론이야.]

[적어도 황제 폐하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섭정을 세울지 말지에 대한 합의가 의회에서 이루어졌어야 했어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합의에 문제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개입했을 거야. 너는 절차적 정의만 지키면, 당시에 에른스트가 섭정직까지 맡아 권좌를 장악했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건 결과론이에요.]

[예측할 수 있는 결과를 방치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똑같지.]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운 현실이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맞는 거 아는데! 내 말이 급진적이라는 것도 아는데! 그냥 그걸 ‘내’ 결정이라고 하니까 열 받는다고.’

클레어는 울분에 찬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에리히가 자신의 말을 아예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어후. 원래 정치 이야기는 가족 간에도 하는 게 아니지.”

남편이 당사자에, 아이가 위험한 이상 외면할 수도 없고 말이다.

“하아…….”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아주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이왕 하는 거, 시간도 끌 겸, 얄미운 남편 애태우기도 할 겸, 이브닝드레스를 꺼내서 말이다.

아우구스타는 기다림을 괴로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걸로 자존심 싸움을 할 거라면 애초부터 시녀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시간을 쟀다.

자신은 황후의 시녀장이다. 너무 기다리게 하면 황후와 대립한다는 의사를 대놓고 표시하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과연 어디까지 할지 궁금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타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은 과연 아렌 공왕과 연계하고 있을까?

만일에 그녀가, 진짜로 단순히 아이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클라우제너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니,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긴 하지. 위험 요소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석양이 질 때까지 기다렸다.

“공작 부인께서 너무하십니다.”

아우구스타의 시녀가 조그만 소리로 불평했다. 아우구스타는 찻잔을 들고 평화롭게 말했다.

“난 괜찮구나. 저 창으로 노을 지는 바다가 한눈에 보이지 않니?”

“아름답긴 하지만요.”

아우구스타는 늘 바빴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응접실 문이 열린 것은 일몰도 끝나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하녀들이 응접실의 램프를 모두 켠 뒤에야 나타난 공작 부인은 이브닝 파티에라도 나갈 사람처럼 한껏 치장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우구스타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제가 많이 늦었지요?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클레어가 미소 지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돌아가 버리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우구스타는 평온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클레어의 왼손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검지에는 클라우제너 공작의 인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등에 키스하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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