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29/263)

130화

아우구스타는 표정에 감정을 일절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르고트 에른스트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에, 그 최측근인 아우구스타에게 이처럼 거만하게 손을 내민 사람은 없었다.

에른스트 공작 부인과 맨프레드 대공비도 그녀와 마주 고개를 숙였고, 빅토리아 대공도 그녀를 존중했다.

황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누구나 그녀가 특별한 경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황후의 대리인 역할을 맡곤 하는 아우구스타 또한 그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이런 요구를 받아 본 게 언제였더라. 이십 대 어린 나이일 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신분을 따져 본다면, 황후의 시녀장보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위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인장 반지를 끼고 그 사실을 주지시키는데, 무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후…….’

아우구스타는 내심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조사에 따르면 소탈한 성미로 보였는데. 하긴, 소탈하다는 것과 자신이 가진 힘을 모른다는 것이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클레어의 반지 위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뗐다.

“오늘 파티나 만찬이 있으셨던 모양이로군요. 미처 알지 못하고 방문했습니다.”

아우구스타는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런 게 없다는 것은 서로가 알고 있었다.

“어머, 아니에요. 그냥 남편과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해서요.”

클레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온 응접실이 환해지도록 램프를 켜 둔 탓에,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찰랑거리며 사방에 빛을 반사했다.

“신혼여행 중이라지만, 아무래도 아이가 있다 보니 둘만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요. 레이디 아우구스타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그러셨군요. 두 분 금슬이 좋으시니 클라우제너를 위해서도 아주 좋은 일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기뻐하고 계십니다.”

“정말요?”

클레어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저는 황후 폐하께서 축하의 말을 보내 주시지 않기에 결혼을 반대하시는 줄 알았답니다. 제국의 가장 고귀한 숙녀께서 일개 아렌 남작에 불과한 저를 곁에 앉히기 부끄럽다고 여기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시녀가 선물과 축언을 전달했을 터인데, 황실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다니 안타깝습니다.”

아우구스타가 짐짓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꼭 제대로 꾸짖겠습니다. 만일에 실수라도 있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아우구스타 님……!”

아우구스타가 고개를 숙이자, 손등에 키스할 때부터 울분을 참고 있었던 시녀가 욱한 듯 큰 소리를 냈다.

클레어는 상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참, 시녀도 소개해 주세요. 분명히 아주 귀한 가문의 따님이시겠지요?”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시녀가 움찔했다. 시녀의 몸가짐은 주인의 품위와 연관되는 법이다.

주인이 공작 부인에게 무릎을 구부리고 경의를 표했는데, 감히 거기에 반발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받는 대우가 주인의 것을 빌려 온 거라는 사실을 잊고 스스로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이 모양이 된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와 사교계 평판 같은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클레어를 바라보고 말했다.

“시녀가 공작 부인께 감히 무례를 저질렀군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레이디 아우구스타를 사모하는 마음이 갸륵하지 않나요?”

아우구스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저 편지 심부름이나 하는 아이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레이디 아우구스타의 편지라면 아무나 손댈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제 편지가 뭐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제게 오는 편지라고는 기껏해야 시골 귀족에 불과한 동생이나 친척들이 하소연이나 일상 이야기를 보내는 것이 전부인데요.”

“시골 귀족이라니요. 루덴도르프 후작가는 북방에서도 가장 강성한 역사를 가진 오래된 가문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황후 폐하의 신임을 얻어 나라의 큰 사업을 맡고 계시는데요.”

“클라우제너의 입장에서는 자잘한 소식일 텐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크로지크 백작가를 통해서도 소식을 전해 듣고 계실 테니.”

이번에는 클레어가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차례였다. 요한은 이미 의심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이아몬드 사업의 규모가 급격히 커진 시점에서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루이자가 있었다면 저쪽에서도 사람을 바꿀 수 없어 요한을 남겨 두었을 테지만 말이다.

‘어차피 나도 어머님 때문에 포섭했던 거였고. 요한 경이 빠질 때도 됐지.’

크로지크 노백작에게 언질 하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정보 조직에서 빠져나오는 일이지만, 요한의 역할이 그렇게 큰 기밀을 다루던 것은 아니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백작가 안에서 요한의 입지도 이제 충분히 안정되었을 테고, 가문이 확장기이니 핑계 대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클레어는 그런 생각을 모두 일단 덮어 둔 채 능청스레 말했다.

“글쎄요. 또 좋은 사업거리가 있다고 투자 제안을 가져오긴 했는데, 제 본업은 직물과 패션이라,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어서 남편에게 넘겼답니다. 클라우제너의 재산 관리인이 알아서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셨군요.”

아우구스타는 그 화제를 더 끌어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라우제너 공작을 방패로 삼으면, 그 무엇도 추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부인께서 이렇게 치장하고 기다리시는데, 신혼여행 중에 공작 각하께서 자리에 안 계시는군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너무하죠?”

클레어가 흉을 보듯 소곤거렸다.

“콜베르크 광산에서 사고가 터진 것 때문에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아, 새 사무실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죠?”

아우구스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이 루덴도르프 역 앞에 건물을 샀고, 거기를 중심으로 클라우제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일에 리누스가 관계없을 수 있을까? 클레어는 자신이 그 부분을 파악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기 위해 던진 말인가?

혹은, 자신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인가.

애초에 클라우제너 공작령에서 갑자기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감사에 공작 부인이 관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거기에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기에 아우구스타는 모르는 체 대답했다.

“공작 각하께서 너무하셨군요. 일이 바쁘시면 잘츠기터나 클라우제너 본성에 머무르셔도 되었을 텐데, 굳이 루덴도르프 같은 시골로 오셔서 부인을 외롭게 만들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훌륭한 곳인걸요.”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냐는 뜻으로 했던 말이지만, 지금 창밖을 내다보면 클레어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이 내리쬐는 바다에서 은빛 물결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우구스타는 무심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향을 사랑했다.

클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실은 제가 빅토리아 대공 전하의 용건을 따라온 것이었답니다. 덕분에 남편의 보좌관들이 고생하게 되었지요.”

그 말에 감상적인 기분에서 벗어난 아우구스타는 흠칫 고개를 들고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빅토리아 대공이 루덴도르프 후작저를 방문하여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헤르만의 청으로 묵고 있는 줄만 알았지, 용건이 따로 있다는 것은 몰랐다.

‘클로트비히, 이 녀석이……!’

가게른 남작이나 크로지크 백작가와 무엇을 해도 괜찮다. 망해서 말아먹어도, 기껏해야 돈 문제다.

하지만 빅토리아 대공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벌이고 있다면 문제가 달랐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우선 리누스부터 찾아야 한다.

밖이 시끄러워진 것은 그때였다.

실제로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에리히가 돌아온 모양이에요.”

공작이 걸음 하면, 실제로 보이는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인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인다.

아우구스타는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비서 하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와 클레어에게 작은 쪽지를 건네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클레어는 태연하게 아우구스타의 눈앞에서 쪽지를 폈다. 그것은 에리히가 도착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헤르만이 보낸 것이었다.

『가게른 광산, 갱도 붕괴.』

드디어 시작되었다.

클레어는 미소 지은 채 태연하게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고……?”

밤바람을 몰고 들어온 에리히가 집사에게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집사는 마저 대답하는 대신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에리히가 평소보다 각별히 나직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오랜만이로군.”

형식적인 인사말에, 태도에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잠깐 아우구스타 쪽으로 향했던 시선이 자석에 달라붙는 철 가루처럼 도로 클레어 쪽으로 이끌려 갔다.

“에리히.”

클레어가 터지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등을 뺨에 댔다. 그리고 시선으로 살짝 아우구스타와 시녀 쪽을 가리켰다.

에리히의 눈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아우구스타 쪽으로 옮겨 갔다. 짤막한 한숨과 좌절감이 그의 날숨에 섞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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