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0/263)

131화

이건 에리히가 실수한 것이었다.

하지만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동요를 숨기는 것에 평소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응접실에는 따뜻한 빛깔의 램프가 평소보다 많이, 훨씬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그 빛을 받은 클레어의 뺨과 이마는 장밋빛이었다.

금빛과 검은빛이 섞인 드레스가 몸의 선을 따라 아래로 흘러 떨어지며 빛을 파도치게 했다.

에리히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살짝 혀로 입천장을 쓸었다.

상대는 연로한 귀부인이고 황후의 시녀장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실례를 보상하려면 몇 배로 갚아야 한다.

그래도 에리히는 아내를 먼저 끌어안을 한 줌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무엇이든 저지를 작정이었다. 지금 손님이 문제가 아니었다.

클레어가 그 순간 또다시 웃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의 웃음은 우아하고 의례적인 미소도,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 영업용 미소도 아니었다. 호박색 눈동자에 금 조각 같은 장난기가 반짝반짝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발휘할 수 있는 지배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에리히는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마치 동요한 적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자존심을 세우고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방문을 환영하네. 제대로 된 만찬은 아니지만 저녁을 들고 가게.”

입장상 이 자리에서 손님을 초대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었으므로 클레어는 뭐라고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여기서 이렇게 나오겠다고?’

아니, 저 남자는 자기가 어떤 얼굴로 저를 쳐다봤는지 알고나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아니까 더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에리히가 클레어를 흘끗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그를 한번 쏘아봐 준 다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동의했다.

“그럼요. 안 그래도 레이디 아우구스타께 저녁 식사 함께하자고 청할 작정이었어요.”

처음에 했던 말을 뒤집은 셈이지만, 에리히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하겠는가.

실제로도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몸가짐은 평소보다 더욱 엄숙했고, 표정은 완벽하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냉랭한 공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우구스타의 시녀가 어쩔 줄을 모르고 눈을 굴렸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낄 자리가 아닌 것을 넘어서서 그냥 이용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우구스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떠볼 생각이었지만 이런 일에 끼고 싶은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닙니다, 공작 각하. 제가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두 분이 제 고향을 방문하셨다는 기쁨에 멋대로 찾아뵙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평온을 지킨 채 말했다.

“하지만 모처럼 두 분만의 시간을 마련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방해할 수는 없지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녀장이 이 먼 길까지 와서 방문했는데, 이대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사람 하나가 늘어난다고 해서 우리 집 요리사가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걸세.”

“나이 든 사람이라고 그렇게 눈치가 없지는 않습니다, 공작 각하.”

아우구스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녁을 들고 오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라서, 동생 부부가 저녁을 준비해 놓고 절 기다리고 있을 거랍니다. 오랜만의 가족 만찬이지요.”

“그렇군.”

에리히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서 동생 부부와 저녁을 함께한다는데 더 권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진짜로 잡을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작 부인.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는데도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언제든지 방문해 주세요.”

클레어는 마주 미소를 지은 채로 그렇게 말했다.

아우구스타가 다시 무릎을 구부려 그녀에게 공손히 절하고 물러갔다.

시녀는 당황을 아직 다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아우구스타를 따라 절을 하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문은 잠시 동안 열려 있었다. 에리히는 집사를 불러 아우구스타의 마차가 떠나는 길을 확인하라고 일렀다.

집사가 나가면서 응접실 문을 닫았다.

“리누스는?”

“아직 만나고 싶지 않다나 봐요.”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리누스는 결국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리누스가 이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어리광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스무 살이나 되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냥 좀 봐줘요. 아직 어리잖아요. 죽을 작정까지 했던 애인데요.”

“스무 살은 어린애가 아닐뿐더러, 리누스는 자기 일만 생각해도 되는 신분이 아니야.”

죽고 싶어 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도망칠 거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리누스는 그 둘 모두 선택하지 않고, 그렇다고 제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도피만 하고 있다.

클레어가 말했다.

“마부와 하인들에게는 각자 보안요원을 하나씩 붙여 뒀어요. 조금 더 쉬게 내버려 두자고요. 레이디 아우구스타는 이제부터 이쪽 일에 관심 가질 여유도 없어질걸요?”

클레어는 아까 받은 헤르만의 쪽지를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끼고 있는 팔찌가 가느다란 손목에서 나비처럼 흔들렸다. 에리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클레어의 손을 쥐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쪽지를 빼앗아 벽난로에 던졌다.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지 않은 것이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넌 일밖에 관심이 없는 것 같군.”

“어이없어, 진짜. 이럴 거면서 저녁 식사에 다른 사람 초대하려고 했어요?”

“네가 이렇게 입고 있으니.”

에리히가 열 오른 숨을 내쉬면서 평소보다 깊이 파인 네크라인 위로 드러난 곡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나는 만찬이라도 준비되어 있는 줄 알았지.”

“당신이랑 데이트 좀 해 보려고 입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어제 우리가 싸웠던 것 같은데.”

“답이 없는 의견 차이가 하루 이틀이었어요? 새삼스럽게.”

“그러면, 이건 2차전 준비인가?”

에리히가 그녀의 귀걸이를 살며시 건드리며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려다보는 파란 눈동자가 차가운 물색이라기보다는 타오르는 불 색처럼 끓고 있었다. 이번에는 클레어가 입천장이 마르는 것을 느낄 차례였다.

사실 그녀라고 언제나 태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 근사한 남자의 꽉 죈 듯한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에는 상당한 인내심과 연기력이 요구되었다.

“우리 사이는 냉전으로 내버려 두죠. 당신 말대로 만찬을 준비시킬게요.”

“뭐?”

“리누스와 막시밀리안 경만 불러와도 초대 손님으로는 충분하잖아요. 안 그래요?”

에리히가 두 손으로 그녀의 뺨과 이마를 쓸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정말로 날 휘두르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양이군.”

“실패인지 성공인지 알려 줘요.”

클레어가 말을 마치기 전에 에리히의 엄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었다. 손끝에 연분홍색이 묻어났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키스하는 대신에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목덜미와 쇄골에 보드라운 핑크색으로 제 손자국을 묻히는 것에 만족했다.

“만찬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일단 옷을 한번 벗은 뒤에.”

“싫어요. 이 정도 애써서 꾸몄는데, 한 시간도 안 돼서 전부 엉망으로 만들라고요?”

“어차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건데.”

“어차피 배고파질 건데, 끼니마다 밥은 왜 드세요, 공작님?”

공작님이라는 호칭에 에리히의 얼굴이 또다시 찡그러졌다.

“그러면 만찬 대신 바다로 나가는 건 어떨까요? 겨울 바다를 보면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날이 추워. 이대로 나가면 1분도 못 되어서 얼어 죽는다고 할걸.”

에리히가 그녀의 드러난 팔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그냥 1층 테라스로 하지. 유리문을 닫아 놓으면 되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죠.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 시간 동안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 기어이 클레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리누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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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께서 길이 어두우니 등불을 많이 보내라 하셨습니다.”

젊은 부집사가 손수 가스 랜턴을 손에 들고 마차 앞에 나와 있었다. 뒤따르는 하인들도 길이 온통 밝아지도록 가스등을 들고 있었다.

“각하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 주게.”

아우구스타는 그렇게 말하고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뒤따라 올라탄 시녀가 문을 닫았다. 클라우제너의 하인들이 마차 앞뒤에서 환한 등불을 들고 인도했다.

“저희에게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걸까요?”

“무엇이 됐든, 숨길 것이 있겠지. 아이 문제만 해도 그렇고.”

오늘의 방문은 여러모로 예상외의 부분이 많았다.

“아무래도 공작이 진심처럼 보이지 않더냐?”

“워낙 유명한 연애결혼이었으니까요. 신문에서 하도 떠들어 대기에 오히려 반쯤 깎아 들었는데, 진짜처럼 보이더라고요.”

시녀가 질투심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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