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1/263)

132화

아우구스타는 연한 미소를 지은 채 뾰로통한 시녀의 태도를 지켜보기만 했다.

클레어에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본래도 특별히 중요한 일을 맡기거나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제 감정에 솔직하고, 사교계에서 발이 넓으면서 귀도 얇은 편이라, 젊은 숙녀들의 여론을 알기 쉬워서 데리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클라우제너 공작 같은 사람이 진심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을 텐데도.”

이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황후는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책임감이거나 아렌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수단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가 제러드 황태자의 아들이리라고 추론한 후에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동맹이라고 확신했다.

[신뢰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 호감도 있을 테고. 하지만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에리히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번에 아우구스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달랐다.

에리히 클라우제너는 사랑에 빠졌다. 적어도 열정에 사로잡힌 것은 분명해 보였다.

젊은 남자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황후도, 아우구스타도 호감이나 끌림, 설렘 같은 것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을 이유로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뒤로 미뤘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어 보면, 그런 감정들은 모두 인생을 걸기에는 지나치게 일시적인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위엄과 침착성을 겸비하고 있기에 자신들이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공작이기 때문이겠지.’

그는 하나를 손에 쥐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하긴, 그가 열정의 상대를 손에 넣기 위해 무엇을 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상대를 잡아 제 옆자리까지 끌어올리면 그만인 것을.

아우구스타는 그것에 질투하기에도, 이미 나이가 들었다.

앞에 있는 시녀는 끌어올려진 사람에게 질투심을 숨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클라우제너 공작가에 좀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기질?”

“선대 공작 각하께서도 재혼 후에 대부인 한 분만 바라보셨다고 들었어요.”

이미 쫓겨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시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말했다.

“정부도 따로 두지 않았고요. 물론 대부인은 후작 영애였으니, 지금의 공작 부인보다 훨씬 나은 가문 출신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격차가 적지 않은 결혼이었잖아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구나.”

아우구스타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다. 그것도 황녀 소생의 우수한 장남과 안정된 후계 구도, 더 널리 보아 황위 계승권까지 얽힌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결정된 일이었으나, 이 시녀는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시녀는 마치 공작의 감정이 클레어 델포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작된 것처럼 생각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납득했다.

아우구스타는 그런 것보다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에리히가 만일에 아내에게 푹 빠져 있는 거라면 황후의 정치적 결단은 처음부터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을 아렌인이라는 범주로 몰아 클라우제너에서 분리한 다음 아렌 공왕과 함께 공격한다는 방침 말이다.

이것이면 오늘의 수확으로는 충분하다. 리누스에 대해서는 제대로 떠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을 알았다.

공작에 대한 판단이 바뀌었으니, 이제 루덴도르프와 그 인근에 대규모로 풀린 클라우제너 요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달리 해석해야 한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마차가 멈췄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만나 뵙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마부가 마차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말했다. 밖에서 다소간 소란이 있다가, 문이 벌컥 열렸다.

“꺅!”

시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우구스타조차도 숨을 들이켜며 마차 안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리누스가 태연자약하게 마차 안으로 발을 뻗었다. 시녀가 황급히 물러나려다가 비좁은 마차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아우구스타의 옆자리로 옮겨 왔다.

“내가 시녀장을 배웅하도록 하지. 물러가도록.”

리누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황자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하인들이 물러나며 마차 문을 닫았다.

곧 마차가 도르륵 구르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타는 가슴을 눌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리누스가 살아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무사, 하셨군요. 전하.”

최후의 희망을 찾아 여기까지 오긴 했으나, 실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살 시도를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처음 몇 번은 진짜로 죽을 작정은 아니었던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진짜처럼 보였다.

신께 감사드릴 만한 일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누스가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날 알아보기는 하는군. 어머니의 계획에 이름으로만 올라가 있어서, ‘나’ 자체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생각하시고 소식을 주지 않으신 겁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정말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 할 필요 없어.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내가 모르던가?”

리누스가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누스 전하.”

“그리고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전하…….”

“어차피 결론은 뻔하게 날 게 아닌가. 내가 실수로 바다에 미끄러져 빠진 것을 클레어가 구해 주었어. 그동안 폐렴으로 움직이지 못해서 소식을 보내지 못했지.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아우구스타는 클레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공작 부인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황자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리누스를 쳐다보았다. 리누스는 불쾌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문제 있나?”

“그게 황자 전하의 뜻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우연입니까?”

“내 뜻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가? 사건의 진상을 결정하는 건 에리히고, 자네나 어머니나 그것을 받아들일 텐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황후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진실은 진실대로 알아 둬야 할 필요가 있지요.”

“유감스럽게도 그게 사실의 전부야. 나 같은 자는 죽음조차도 원치 않는 모양이지.”

아우구스타는 리누스의 얼굴에 걸린 삐뚜름한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무엇도, 황자 전하께서 무사하시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

리누스가 잠시 침묵하더니, 눈을 내리깔고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자네가 정말 놀라워.”

“…….”

“자네야말로 가장 생각이 많을 만한 입장이 아닌가? 나의 ‘자격’에 대해서.”

아우구스타는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곁눈질로 곁에 앉은 시녀를 살폈다.

그들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녀는 고개만 갸웃하고 있다가, 아우구스타의 시선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생각에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감히 전하의 자격을 논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며 차기 황제다. 자격을 논하는 것은 반역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타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른 답도, 리누스가 요구하는 답도 아니다.

리누스는 황후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다감한 소년은 감수성 예민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형으로 말하지만, 실은 타인의 감정에 병적으로 민감했다.

그러니 아우구스타가 거짓으로 말해도 쉽사리 꿰뚫어 볼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마르고트 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것이면 제국의 지존이 되시기에 넘칩니다.”

리누스가 헛웃음을 웃었다.

“그렇군.”

또다시 마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우구스타는 그가 오해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설명한다고 해도 리누스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제 어머니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을 터이니.

리누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열차를 수배해.”

“돌아가시겠습니까?”

“죽어서 도망칠 게 아니라면 결국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만 하겠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아우구스타는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내일 아침 가장 빠른 열차를 타시게 될 겁니다. 오늘 밤 숙박은 역 앞 호텔에서 하시지요.”

“루덴도르프로 날 데려가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지?”

“모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아마 번거로우실 겁니다. 별관에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계시니까요.”

루덴도르프 따위는 별것 아니었으나, 빅토리아 대공은 무시할 수 없었다.

리누스는 빅토리아 대공이 자신을 반가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가장 껄끄럽게 남아 있는 가시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텔이 낫겠군.”

“클라우제너 공작 내외에게는 따로 인사하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리누스는 이번에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와 아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다정한 얼굴로 하는 작별 인사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는 그 여자가 키스를 거절한 죽음처럼 웃으며 잘 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에리히는 그런 일에 관심 없겠지. 나중에 소식이나 보내 둬.”

“예, 전하.”

아우구스타가 공손히 말했다.

리누스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아우구스타가 마부석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행선지를 변경하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변해 있을 터이다.

리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