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2/263)

133화

32. 가게른 광산

행선지를 바꾸고 여러 가지 일을 수배한 아우구스타가 루덴도르프 후작저로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아침 일찍 리누스를 수행할 작정이었으나, 그는 동행을 거절했다.

[가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자네를 따라오지 않았어. 귀찮게 굴지 마.]

그 말이 옳기도 했고, 자신이 이틀 만에 수도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오히려 리누스의 움직임을 떠들썩하게 드러내리라는 것도 우려되었다.

리누스가 행방불명되었었다는 사실은 가능한 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데리러 왔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타는 며칠 더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마치 별일 없이 친정에 다니러 온 사람처럼 말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조용할 줄 알았는데, 정문 앞에 마차와 말이 여러 대 나와 있었다. 하인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아우구스타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하인들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우구스타는 치맛자락을 끌어당기며, 에스코트를 기다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 있던 헤르만이 그녀를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고모님?”

“소란하구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헤르만의 모양 좋은 입술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긴, 알아도 모르는 척할 것이다. 아우구스타의 앞에서 가문의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티를 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간단히 외출 차림을 갖춘 루덴도르프 후작이 안쪽에서 나오다가 그녀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누님.”

“무슨 일이니, 이 시간에?”

루덴도르프 후작의 눈이 허공에서 몇 번 흔들리다가 아우구스타를 피했다.

아우구스타는 작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루덴도르프 후작은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항구 일은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작은 사업장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

무엇인지 몰라도 그렇게 사소한 일이라면 이 시간에 후작 자신이 서둘러 나갈 리 없다.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겠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순순히 말을 들을 나이도 아니다. 추궁해서 실토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주의 권위를 짓뭉개기는 꺼려졌다.

자신이 영원히 뒤를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우구스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루덴도르프 후작이 먼저 변명하듯 말했다.

“어쨌든 누님까지 신경 쓰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저는 좀 그쪽에 나가 봐야겠으니 누님께서는 편안히 쉬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달아나기라도 하듯이 얼른 저택 밖으로 나갔다.

아우구스타는 찜찜한 기분인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헤르만이 현관까지 후작을 배웅하고 아우구스타 쪽으로 돌아왔다. 우아하고 엷은 미소를 입술에 건 채였다.

“급한 일이 생겼다는데, 너는 가지 않는 모양이구나.”

“제가 나설 일이 아니니까요.”

“호르스트는?”

“가게른 남작령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작은 사고라는 것이 가게른 남작령의 광산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우구스타는 혀를 찼다.

“그렇구나. 오늘 돌아올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아쉬운 일이 되었지요. 고모님께서도 오셨고, 오늘 호르스트도 귀가할 예정이라 후작 부인께서 만찬을 준비하셨는데.”

헤르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헤르만은 가문의 사업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후작의 심부름을 하는 정도이고 책임 있는 일을 맡지 않았으니, 실패해도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경쟁자가 실패하여 입지가 약화되는 것이 본인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헤르만의 태도에서는 특별한 기쁨도, 당혹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우구스타가 호르스트를 밀어준 것이 그가 후계자 자리를 상실한 가장 큰 이유인데도, 그녀에게 적의는커녕 떨떠름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세련된 태도와 즐거운 웃음은 세상사의 복잡함에서 완전히 떠난 듯이 보이기도 했다. 결혼 시장에 나선 영애들 중에서도 잘 다듬어진 숙녀들이나 겨우 보일 줄 아는 태도였다.

‘아깝구나.’

아우구스타는 호르스트의 안절부절못하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생모가 안주인으로서 살아 있고, 황후의 시녀장인 자신이 고모로서 밀어주었다. 루덴도르프 사교계는 에른스트의 영향을 받아 다분히 아렌인을 배척했다.

루덴도르프 후작과 전처, 곧 헤르만의 생모는 사이가 썩 좋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호르스트는 후계자로서 자리를 잡고 가신들을 휘어잡기는커녕 지금까지도 징징거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그에 비해 헤르만은 얼마나 우아하고 침착하며 귀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빅토리아 대공의 호의를 사는 데 성공한 것도 그랬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부와 친분을 쌓은 것도 마찬가지다.

헤르만은 제 위치를 제대로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귀족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사내이고 장남이라면, 이 정도로 자신을 숨기기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후계자를 바꿀 수는 없다.

비록 장남이 아까울지라도, 황후를 섬기는 아우구스타의 가문에서 아렌 귀족 소생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루덴도르프의 상속 문제는 그 자체가 로멜인에게 보여 주는 프로파간다였으며, 충성심의 증명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타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르만이 에스코트하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가시지요, 고모님. 비록 아버지도, 호르스트도 없지만, 만찬 자리에는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도 함께하실 예정이니, 시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처음 들었구나. 자칫하면 이런 중요한 저녁을 놓칠 뻔하지 않았니.”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별장에서 만찬을 드셨어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셨을 테니까요.”

헤르만이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눈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우구스타는 이채를 띠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것도 그렇지.”

공작은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의외로 클라우제너와의 연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확실히 공작에게 견제당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헤르만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가게른 남작령의 광산은 예사롭지 않은 사태에 빠져 있었다.

호르스트는 다섯 시간 전부터 망연한 채 광산 앞 막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갱도를 파 들어가 광맥에 대한 확신을 얻은 참이었다. 갱도 레일을 설비하기 위해 장비도 들였다.

그 시점에서 지반이 붕괴하여 무너진 것이다. 거의 입구까지 와르르 쏟아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설비가 모조리 땅에 묻힌 것은 물론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호르스트는 언성을 높였다. 따로 초빙해 온 기술자는 눈만 피하고, 광부 대표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저희는 시키는 대로 팠을 뿐입니다. 항상 하던 대로요.”

“콜베르크보다 지반이 약하니 조심해서 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들이 경력 있는 광부라고 해서 특별히 이 일을 맡긴 건데!”

“달에 고작 2천 골드를 주시면서, 싼 맛에 부리는 광부에게 무슨 광산 기술자 노릇이라도 하길 바라신 겁니까?”

광부 대표가 뻔뻔스럽게 대들었다.

“안 그래도 저도 이미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작은 굴을 먼저 파서 확인한 다음, 조금씩 삽으로 넓히는 게 좋겠다고요. 시일이 급하다며 폭약을 이용하여 빨리 뚫기를 원하신 건 경이 아니십니까?”

호르스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삽과 곡괭이로 파야 한다는 말을 누가 진짜로 믿겠는가. 수당을 더 받아 내려는 수작으로 생각했다.

애초부터 인당 2천 골드라는 저가를 부른 것부터 이런 식으로 수익을 채우려는 수작이라고 확신했고, 지금도 이 작자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친 사람이 없는 게 다행 아닙니까?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 보상금을 적지 않게 책정했는데, 그거라도 아끼셨으니.”

아렌의 광부 계주라는 작자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 말했다.

그자의 이름은 자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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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는 평소보다 느지막이 눈을 떴다.

커튼은 내려져 있었지만 이미 창밖이 밝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 시기이니, 아마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두어 시간은 더 잔 듯싶었다.

“음.”

그는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았으므로 딱히 선호하는 계절이 없었다. 여러모로 겨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클레어가 추운지 품에 꼭 달라붙어 있다가 그가 움직이려 하자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에리히는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그대로 있다가, 손을 애써 뻗어 회중시계를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빛이 드는 덕분에 시계 판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훌쩍 넘었다.

“클레어.”

“……더 잘래.”

잠꼬대인지 한숨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로 클레어가 중얼거렸다.

에리히는 몸을 옆으로 돌려 고개를 들고 잠든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통째로 잘라 놓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그는 헝클어진 클레어의 머리칼을 손빗으로 쓸어 넘겼다.

하지만 5년 전과 달리 그 손길에 조심성은 별로 없었다. 잠에서 깨면 일어나라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로 잠든 듯 반응이 없었다.

‘피곤할 만했지.’

꼭 어제의 일만이 아니라 요즘 내내 그렇다. 콜베르크 광산 사건 이래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괜찮다고 말해도 좀처럼 통하지 않았다. 그가 과한 행동을 할까 봐 염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하는 일도 스스로 정해 놓은 선을 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때때로 마음을 갉아먹히는 듯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방침이 결정되었으면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기고 잊어버리라고 했는데도, 클레어는 그러지 못했다.

뻔뻔한 속물처럼 굴면서도 종종 현실과 마찰을 일으키며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에리히는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여자야, 진짜로.’

이러니까,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아닌데도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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