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에리히는 자세를 바꾸어 클레어를 덮어 안듯이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다시 잠들 생각은 전혀 없었으나, 이렇게 긴 시간 한가하게 보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엘리엇도 마사가 아침을 먹이고 보살피고 있을 것이다. 이미 늦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차라리 더 편했다.
한참 그대로 달콤한 시간을 맛보고 있는데, 망설이는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똑.
결국 일어나야 한다.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신혼여행이냐는 클레어의 한탄에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춥지 않도록 이불로 클레어의 몸을 꼼꼼히 감싸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섰다.
문을 열자 집사가 가운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입혀 주는 대로 가운을 걸치며 제일 먼저 물었다.
“엘리엇은?”
“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조금 토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러나 매일 데리고 잘 수는 없었다.
그는 그다음에야 보좌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집사와 함께 대기 중이던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가게른 광산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갱도가 붕괴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에리히 쪽의 정보망이 클레어보다 한발 늦었다.
클레어의 소식은 헤르만으로부터 전해 듣는 것이지만, 에리히는 그와 별개의 루트로 광부를 통해서 정보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보좌관이 보고를 계속했다.
“인적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물적 피해는 아직 계산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레일과 갱차, 조명 설비는 확실하게 묻혔다고 합니다.”
“좀 의외로군. 놈이 제대로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가게른 광산에서 광부 대표를 맡고 있는 자콥은, 콜베르크 광산에서 아렌 출신 광부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던 애런 자콥 그자다.
클레어는 자콥에게 저렴한 금액에 가게른 광산과 임시 계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물론 그가 데려간 광부들은 이전의 계원이 아니다.
장부상의 이름을 각자 하나씩 나눠 가졌을 뿐, 대부분 콜베르크 광산의 광부들이었고, 상당수는 클라우제너에서 따로 파견한 보안요원과 경호요원들이었다.
그중에는 과실을 사죄한 발터 마이어까지 섞여 있었다.
[장비가 들어간 시점에서 갱도가 무너지도록 해. 사상자 없이 할 수 있다면 가장 좋고. 어차피 루덴도르프에서는 공기를 짧게 잡고 서두를 테지.]
그러니 빈틈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다친 사람 아무도 없이 갱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보석금과 변호사비, 피해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보상금과 위자료까지 대신 내주겠어. 확실히 알아 둬. 일의 성공 확률에 따라 지불하는 거야. 인명 피해가 난다면 그대로 구치소에 처박을 거야.]
자콥은 성공하면 아예 면죄해달라며 생떼를 썼지만, 그것까지 허용할 리는 없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잘 해냈다.
어쨌든 그는 경력이 오래된 광부였고, 발터 마이어가 능숙한 광부들을 이끌고 그를 보조했다.
갱도를 파 들어가는 도중 지반이 약한 곳을 고르고, 지지대의 간격을 조절한 것에 대해서는 에리히가 받은 보고서에 다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클레어가 요구한 조건을 정확히 만족시킨 것이다.
“생각보다 쓸 만하군. 뻔뻔한 놈이니, 이미 저질러진 일이 제 탓 아니라고 뻗대는 건 잘하겠지.”
에리히가 말했다.
“3일이면 충분할 거야. 그다음 콜베르크 광산의 폭발 사고를 일으킨 범인으로 추포하도록 하지.”
“미리 정보를 줘서 도주시킬까요?”
“그쪽이 자연스럽겠군. 일단 놓아줘.”
진짜로 달아난다면 다시 잡아들이면 그만이다.
“수고했네. 다른 소식은?”
“관련해서 아직은 별 이야기 없습니다.”
“그렇군. 자네는?”
에리히가 이번에는 막시밀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이 가볍게 묵례한 후 말했다.
“리누스 전하께서는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역 앞 호텔에서 숙박하셨고, 오늘 아침 일찍 루덴도르프를 떠나신 것 같습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첫차의 객차 두 칸을 전세 냈습니다.”
“그렇군.”
어젯밤에 그가 아우구스타의 마차에 올라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막을 일이 아니라서 그대로 두었다. 리누스를 억류하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우구스타와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지.’
리누스가 제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지 못하면 황후에게 힘을 더해 줄 뿐이다. 그러나 죽일 게 아니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에리히는 귀찮은 놈이 꺼졌다고 생각했지만, 찜찜한 불안감과 약간의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리누스는 그보다 아홉 살이 어리다.
황족으로서 성인 남자라면, 그와 대등한 위치였다. 일반적으로 보호해야 할 범위 밖의 존재였으며, 당연히 책임 밖의 일이다.
리누스가 제게 얽힌 수많은 목숨과 이해관계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외받아야 하는 존재지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마땅했다.
하지만 제러드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후께서 날 미워하신다고 해서, 내가 리누스를 미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정치적으로 동행할 수 없다는 게 꼭 공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잖아? 어쨌든 동생인걸.]
[통치는 이미 내각에 이양되고 있어. 골육상쟁을 해서까지 얻을 게 있다고 나는 생각 안 해.]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적이 있다. 제러드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마음 한구석에 밀어 두고 잊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종종 그를 떠올리게 된다. 아마 엘리엇 탓이리라.
아이가 생기고 나니 마음에 무른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엘리엇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때는 또 정치적 상황이 많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싸움 한복판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물었다.
“보안팀을 어떻게 할까요?”
리누스 사건을 탐색하기 위해 풀었던 사람들을 갑자기 거둬들이면, 그것도 이상하게 여길 우려가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오해를 사서 클레어 님이 하시는 일에 나쁜 영향이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 둬. 실제로도 아무 연관 없는데, 미리 변명을 준비할 필요는 없지.”
“예.”
막시밀리안이 정중하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에리히는 그제야 욕실 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면도를 하고 새 셔츠를 걸치자 집사가 달려와 그의 소매에 커프스링크를 달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전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시끄러웠는지, 오래지 않아 침실 쪽에서 문이 열리며 클레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히.”
그녀는 종종 문밖에 에리히의 집사나 보좌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 같았다.
에리히는 그녀가 허술한 차림새로 나오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그쪽으로 가서 문을 가로막았다.
예상대로, 달랑 가운 하나만 걸친 클레어가 아직 잠에 취한 채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 있어요?”
“클레어, 여기에는 응접실이 따로 없어.”
에리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하면서 그녀의 몸을 밀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설마 델포드에서도 손님이 왔을 때 침실의 차림새 그대로 맞이한 것은 아니겠지?
그는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델포드 영주관의 크기는 몰랐으나 십중팔구 접견실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클레어의 성격을 생각하면 손님맞이에 굳이 응접실을 고수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한번 가 봐야겠군.’
이제 와서 본다고 해서 딱히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거실과 응접실 자체가 집에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고.
그가 손만 뒤로 돌려 침실 문을 닫자 클레어가 의아하게 물었다.
“비서를 신경 쓰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었다. 에리히는 집사를 비롯해 사용인을 거의 가구처럼 여겼으니까.
그 말에 처음으로 에리히는 자신이 신경 쓰고 있는 게 그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레어가 슬립 위에 가운만 걸치고 있을 때는 더욱더 말이다.
막 깨어난 모습은 지나치게 사적이었다.
“이런 모습을 함부로 남에게 보이는 게 아니야.”
“이런 모습이 어떤 모습인데요?”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
에리히는 대답하면서 그녀의 귀밑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듯이 클레어가 어깨를 움츠렸다. 에리히는 그녀의 가운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미끄러뜨리고,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내 생각엔 지금 당신이 날 더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키스야.”
클레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불만을 말하기 전에 에리히는 그녀의 입술에도 가볍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