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클레어의 입술이 살짝 오므라졌다.
그 입술을 살짝 물어 벌리고 에리히는 조금 더 깊게 키스했다.
가볍게 휘청하는 등과 허리를 받쳐 주면서 그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시끄러워서 깼나? 보고를 밖에서 받을 걸 그랬군.”
“뭐 중요한 보고라도 있었어요?”
클레어가 아직도 잠이 안 깨는 듯 도로 에리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누스가 루덴도르프를 떠났다는군.”
“아…….”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황궁으로 갔겠죠?”
“아우구스타와 만난 뒤이니, 그렇겠지.”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허리를 감은 에리히의 팔 위에 제 손을 내려놓았다.
“왜? 마음에 걸리나?”
“약간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갔네요.”
“생각하는 데 오래 걸린 거겠지.”
“그러게요. 질풍노도의 시기라기엔 나이가 좀 많지만.”
에리히는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뉘앙스로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어차피 수도에 가면 볼 텐데.”
“그렇긴 하지만요. 귀찮다고 생각했던 게 좀 미안하네요.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떠나자마자 이야기하러 갈 걸 그랬어요.”
“넌 할 만큼 했어.”
클레어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당신도 불편한 마음 있는 주제에.”
“나한테는 혈연이니까.”
“하긴, 그런 것치고는 냉정했죠?”
클레어가 웃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좀 있었고요. 엘리엇에게 정이 들면, 혹시, 만약의 경우에…….”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군. 그런 일은 생기지도 않을 테지만, 설령 우리가 다소 손해를 본다고 해도 그렇게 극단적인 일은 안 생겨.”
에리히가 클레어의 턱을 잡아 가볍게 젖히고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뭐, 그래요. 지금으로선 앞서 나간 걱정이죠. 어쨌든 리누스는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미래의 황제와 싸울 생각을 하면 끔찍하니까.”
“리누스가 황후에게서 심적으로 독립하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지.”
“가망 있을 것 같아요?”
에리히는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글쎄. 사람의 기질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걸 생각하면 안된 일이긴 하죠. 세습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요.”
“자식을 선택할 수는 없겠지만, 잘 기르긴 해야지.”
“틀렸어요. 이 경우에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게 문제잖아요.”
에리히는 전 같으면, 가문과 선조의 명예를 이었으니 마땅히 그에 따르는 의무 또한 다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이 떠안은 위험성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가볍게 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부친을 떠올렸으나, 지금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굳이 이제 와 입에 담기에는 구차한 옛일이기도 했다.
클레어가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타이를 잡아당겼다.
“내 목을 조를 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맞닿았다.
에리히는 저항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끌려갔다. 똑같은 키스인데도,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에 따라 매번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밖에서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도 잊고 그는 클레어의 매끈한 가운을 구겼다.
그러는 사이에 웨이스트코트 밖으로 풍성한 실크 타이가 비어져 나오고, 집사가 정성 들여 잡아 놓은 모양새가 망가졌다.
매듭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타이를 풀어낸 다음에야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에리히는 키스를 멈췄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네가 망가뜨리고, 내가 고치는 건가?”
“유감이지만, 나는 이거 맬 줄 알거든요?”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고 벌어진 목깃 사이에 입술을 댔다.
“읏.”
어젯밤에 났던 생채기 위를 다시 한번 깨물려 에리히는 짤막하게 신음했다. 아릿한 통증이 깊은 데까지 번졌다.
클레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목깃을 다시 여미고 그 위에 타이를 둘렀다.
목을 스치는 손길에 애가 달아서 에리히는 중얼거리듯이 그녀를 불렀다.
“클레어.”
그러나 세 번째 키스는 없었다.
클레어는 한 걸음 물러서서 마치 평가하는 듯한 시선으로 에리히를 살폈다. 허리 위까지만.
에리히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어가 다시 손을 뻗었다. 웨이스트코트의 단추를 풀고, 타이 매듭을 다듬어 곱게 편 다음 다시 단추를 잠그는 손에는 초조함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출근하는 남편 타이 좀 매 주는 게 어때서?”
에리히가 노려보든 말든 그녀는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고, 아예 그의 팔 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털썩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다녀와요. 나는 더 잘 거니까.”
“하.”
에리히는 손바닥으로 이마부터 머리칼까지 한꺼번에 쓸어 넘겼다. 농락당하는 기분이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이제 가 보라고 손을 까닥거렸다. 에리히는 그녀에게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마침 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에 보자고.”
그는 선전 포고를 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 무렵, 가게른 광산.
루덴도르프 후작이 광산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업의 중요성과 별개로, 굳이 힘든 산길을 올라와 더러운 것을 얼굴과 몸에 묻힐 필요가 없었으니까.
실무는 아들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가 할 일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 광부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땅을 얼마나 파고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처음으로 그 생각을 후회했다.
“멍청한 것!”
후작이 편지를 반으로 찢어 호르스트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호르스트가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는 허리를 굽혀 편지를 주웠다. 그 편지는 크로지크 노백작이 보낸 것으로, 광산에서 일어난 사고에 관한 경위를 묻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관리했기에 하루 만에 크로지크 백작가에서 알게 해!”
“백작가에서 보낸 실무자가 한 사람 여기 머무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동업자 쪽의 실무자가 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루덴도르프 후작도 흔쾌히 동의한 사항이었다.
그런데도 후작은 그게 호르스트의 책임이라도 되는 양 노기를 뿌렸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몇 번이나 숨을 헐떡거렸다.
쿵쿵.
그때 누가 사무실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호르스트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또 무슨 일이냐?”
“실례 좀 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것은 광부 계주인 자콥이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자콥은 목을 빳빳하게 쳐들고 후작을 쳐다보았다.
“오늘 주급이 나오는 날인데, 소식이 없어서 여쭤보러 왔습니다.”
“뭐? 주급?”
루덴도르프 후작이 기가 찬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갱도를 무너뜨려 놓고, 돈을 달라고? 미쳤나?”
“일을 시키셨으면, 돈을 주셔야지. 광산에서 발파 사고가 있었다고 광부 돈을 떼먹는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뻔뻔스러운 놈. 매타작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모르고!”
“어이구. 아드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모양이네. 저는 거기서는 폭약을 쓰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렸습니다그려. 나만 말린 것도 아닐 텐데.”
자콥은 느물거리며 말했다.
폭약을 쓰면 터지도록 일부러 지반 약한 곳을 골라 파고, 연쇄적으로 무너지도록 지지대 간격을 조절한 것은 자콥 일당이었다.
그러나 이 귀족 나리들이 뭘 알겠는가? 증거도 없는데.
“아니면, 우리를 무일푼으로 쫓아내 보십쇼. 그 어느 광부도 여기로 일하러 오지 않을 테니.”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삽질 좀 해 본 광부라면 누가 돈 떼먹는 곳에서 일을 한답니까? 우리도 콜베르크 광산이 휴업 중이니 여기까지 왔지.”
루덴도르프 후작은 그를 노려보았다.
“우리끼리도 다아 소식이 돈다 이겁니다.”
하지만 자콥은 그가 노기를 띠고 노려보건 말건, 뻔뻔하고 태연한 얼굴로 입을 놀렸다. 후작의 분노 따위가 무어 대단하냐는 듯이.
그리고 실제로도 루덴도르프 후작은 그를 물리적, 경제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후작은 주먹으로 쾅,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콥이 말했다.
“지금도 밖에서는 열심히 파고 있는데, 급료를 못 주시겠다면 우리는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아버지.”
호르스트가 후작을 말리기 위해 간절히 그를 불렀다. 그리고 자콥에게 손을 내저었다.
“우선 물러가 있게. 돈을 떼먹으려는 게 아니니까. 지금은 중요한 대화 중이었어. 결정되면 알려 주겠네.”
“뭐, 이삼 일은 저희도 기다려 드리긴 할 겁니다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자콥은 크게 양보한다는 듯이 대답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호르스트는 분노로 벌떡거리는 루덴도르프 후작에게 말했다.
“지금은 급료를 줘야 합니다, 아버지.”
“넌 지금 저따위 놈이 감히 모욕적인 언사를 지껄이는 걸 보면서도 그래! 애초부터 저런 놈을 싸다고 골라 데려와!”
호르스트는 인건비를 아끼려던 건 아버지 아니었냐는 말을 삼키고 해야 할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급료를 주는 게 조금이라도 추가 자금을 덜 쓰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