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호르스트는 간곡히 말했다.
“저 개자식에게 돈을 내주는 것은 저도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장비를 파내는 것이 제일 우선입니다.”
“하.”
“땅에 오래 묻혀 있을수록 기계류는 쓸 수 없는 물건이 될 겁니다. 설비를 전부 새로 장만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새로 광부를 모집하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인건비도 두 배 이상 듭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직 저렴한 값에 저들을 쓸 수 있는 동안에 최대한 빨리 장비라도 파내야 합니다. 게다가…….”
호르스트는 주운 편지지를 후작에게 흔들어 보였다.
“크로지크 백작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핏발 선 눈으로 호르스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탄식이 섞인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자금 사정은 호르스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빡빡했다. 후작은 투자금 일부를 이미 써 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생각하자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와, 그는 아들에게 물었다.
“투자를 더 받으면 어떠냐?”
“그러면 지분을 더 내놔야 합니다.”
호르스트가 좋지 못한 안색으로 말했다.
“크로지크 노백작님이 그렇게 간단히 저희에게 유리한 계약을 해 주시진 않을 겁니다.”
자칫하면 이쪽에서는 손해를 보면서 남 대신 광산 운영을 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 그 정도 되면, 아예 광산을 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지.”
루덴도르프 후작은 갑자기 침착성을 되찾고 대답했다. 크로지크에서 받은 투자금 문제를 따지기 시작하면 자기 잘못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알았다. 자금 문제는 내가 알아보마. 당분간은 비밀로 해라.”
“예.”
호르스트는 순순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루덴도르프 후작에게 딱히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게른 남작가에는 아예 돈이 없었고, 인근의 소귀족들도 대동소이했다.
무능한 자에게는 돈이 없었고, 돈과 수완을 모두 갖춘 자는 크로지크 백작가만큼이나 지분을 요구했다.
현실적으로 이 시점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영지 안에 있는 상단이나 자산가에게 돈을 융통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평민 따위를 상대로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걸 선택지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실 후작은 이미 그 품위 모르는 지독한 수전노 놈들에게 수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클라우제너 공작뿐이었다.
공작은 아직 루덴도르프에 머물러 있었다.
블룸 가문에서 처참하게 망쳐 놨던 티파티 이후로 후작은 클라우제너 공작 부부를 방문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장남 헤르만이 몇 번 공작 부인을 방문했다고 들었다. 빅토리아 대공도 아직 후작저에 머물러 있었다.
이 정도면 관계가 깨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클라우제너 공작은 루덴도르프 역 앞에 건물까지 샀다.
그것은 체류 기간이 길어질 거라는 의미였고, 루덴도르프 후작령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작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내와 함께 있기 위해서 일감을 모두 가지고 왔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기중심적인 후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간절한 마음을 품은 적도 없지만, 설령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상대를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불렀으면 불렀지, 자신이 상대 쪽으로 가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머물러 있다는 건, 이곳에 눈독을 들인 사업이 있다는 뜻이지.’
뭔진 몰라도, 후작령 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블룸 남작가 때문에 관계가 잠깐 나빠지긴 했지만, 이제는 대화할 때가 되었지.’
공작이 투자자로 참여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이 일이 수습될 것이다.
애초부터 가게른 남작에게 과도한 보상을 약속한 것이 자금이 빡빡해진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무리를 했던 것은, 공작을 투자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성과를 만들어 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클라우제너 공작에게라면 양보하는 것도 그리 굴욕적인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사무실을 방문한 루덴도르프 후작을 보고, 클라우제너 공작은 제일 먼저 이런 말을 했다.
“후작은 정말 날 놀라게 하는군. 배짱만큼 중요한 자질은 흔치 않지.”
“하하.”
“내 아내를 그따위로 모욕하도록 방치하고서 감히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다니. 정말 놀라워.”
공작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칭찬인 줄 알고 호탕하게 웃으려던 루덴도르프 후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한참 후에야 쥐어짜 내듯이 말할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을 모욕한 건 저희 가문 사람이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블룸 남작가는 이미 충분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 처벌을 내린 것이 마치 자신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사실 루덴도르프 후작의 마음속에서는 별다를 것도 없었다.
블룸 남작가에게 꾸짖는 말을 보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의 눈빛을 의식한 후작은 찔끔하며 뒤늦게 변명했다.
“장남이 방문하여 사죄를 드렸을 겁니다. 공작 부인께서도 너그럽게 용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헤르만 경이 방문했던 것은 알고 있네. 한데, 그는 루덴도르프 가문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공작의 질문에 루덴도르프 후작은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아들은 가문의 대표가 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송구, 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모욕할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공작이 사죄를 요구한다면, 해야 했다.
공작 부인에 대한 모욕을 가문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분노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블룸은 공작 앞에서도 추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 자를 사교계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영지만이 아니라 사교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 또한 대귀족답지 못한 일이다.
신뢰가 필요한 이때, 그 일을 들먹이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내 때문에 일이 어려워진 데다가 수치를 입었다고 생각하자 분통이 터졌으나, 후작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루덴도르프의 영주로서, 또 티파티의 주최자로서, 추문을 퍼뜨리는 자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사과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야.”
후작은 내심으로 자존심이 상하여 견딜 수가 없었으나, 결국 고개를 깊이 숙이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허락하신다면 저와 아내가 공작 부인을 따로 찾아뵙고 용서를 청하겠습니다.”
주변을 얼려 버릴 듯 차가웠던 공작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
후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내를 가문의 부속품으로 여겼지, 가문과 동일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공작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용건을 말하게.”
“예?”
“갑작스럽게 나를 직접 찾아온 것은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가 아닌가?”
“아, 예. 그렇습니다. 꼭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습니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가 열심히 가게른 광산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클라우제너 공작은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말을 잘랐다.
“유감스럽지만, 가게른의 역청탄광은 우리 쪽에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네. 굳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내버려 두었던 거야. 이제 와서 투자할 생각은 없네.”
“이 광산은 진짜입니다. 이미 발견된 역청탄은 모두 상등품이고, 광맥에 대한 조사도 완료되었습니다. 가게른 남작과의 권리관계도 정리되었으니, 이제 그냥 파내기만 하면 됩니다!”
“수익성이 없다는 건 아니네만, 다른 영지에 있는 데다가 굳이 지분을 확보하고 싶을 만큼 대단한 사업도 아니라서.”
공작은 권태로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개발 자금이 모자라서 그러는 거라면, 다른 것을 처분해 보면 어떤가?”
“저희 가문에, 바라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항구의 지분이라면, 후작이 원하는 만큼 인수하도록 하지.”
루덴도르프 후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 항구는 후작의 것이 아니고 국책 사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루덴도르프 후작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지분을 갖고 있기는 했다. 항구가 건설되는 땅은 모두 루덴도르프 가문의 것이다.
그러나 후작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처분하려면 황후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의회의 동의를 얻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후작은 어지러운 기분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건, 어렵습니다.”
“그렇군. 아쉽게 되었네.”
공작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후작령에서 ‘그나마’ 탐내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 사실을 후작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목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