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6/263)

137화

33. 배를 타고 온 친구

루덴도르프 후작이 다녀간 이야기를 듣고 클레어가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용돈으로 항구도 사려고요?”

“…….”

에리히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아니, ‘딱히 필요한가?’ 싶어서요. 여기 항구는 클라우제너 쪽의 교통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쪽에는 항구가 없고, 남방에서 올라오는 물류도 그냥 기차로 옮기는 게 빠를 거고.”

“땅에 금화가 떨어져 있으면 안 주울 수가 없다고 했던 게 어디의 누군지.”

“그건 나고요. 돈 때문에 일 늘리지 말라고 한 게 어디의 누구였나 싶어서.”

“이건 돈 문제가 아니야. 여기는 에른스트에서 아주 가까워. 충분히 전략 목표가 될 수 있는 기간 시설이지.”

“아.”

클레어는 짧게 신음했다. 굳이 전쟁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그게 무의미한 일일 리 없었다.

“그런 쪽으로는 미처 생각 못 해 봤네요.”

“뭐, 기회가 있는 것 같아서 말해 봤을 뿐이야. 후작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에리히가 찻잔을 들고 평연하게 말했다. 사실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눈을 들었는데, 클레어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져 있었다.

“왜?”

“그래서 당신이 그거 지분 인수한다고 자금 내주면, 내 계획은 망하는 건데?”

“네 사업은 네 것이고, 내 사업은 내 것이지. 고작해야 그 정도도 극복할 능력 없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길 바라, 클레어.”

“당신이 댈 수 있는 돈이 웬만큼 통상적인 수준이어야 극복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호박색 눈동자가 생기 넘치게 반짝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 진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즐거워할 게 틀림없었다.

입으로는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말이다. 그걸 생각하면, 좀 더 마음먹고 응대해 봐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아, 지금 뭔가 날 열받게 할 생각 했죠, 당신?”

“아무 말 안 했고, 아무 일도 안 했어.”

에리히가 피식 웃었다.

“네가 화가 나서 팔팔 뛰게 만드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아니지.”

“언젠간 하겠다는 이야기네요?”

“경쟁자가 된다면, 안 할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한편인 것 같군.”

“당신의 지갑이 참 든든하네요.”

에리히는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차를 마셨다.

“그래서, 후작이 이제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우구스타 시녀장에게 매달리면, 여러모로 이쪽이 골치 아파질 거야. 애당초 네 계획에 시녀장이 여기까지 오는 건 없었지 않나.”

“그렇긴 할 텐데, 아마 후작은 자존심 때문에 못 그럴걸요.”

클레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헤르만 경에게서 다른 소식은 없나?”

“지금은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있으니까, 동요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섣불리 드러낼 수 없겠죠.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있는 게 차남이 아니라 가주 본인이기도 하고.”

“그래도 다들 지켜보고 있겠지.”

“좀 더 기다려 보자고요.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떠나든, 광산에 더 큰 문제가 생기든, 뭔가 변화가 생기겠지요.”

혹은, 손대서는 안 될 돈주머니를 열거나.

에리히가 ‘그렇군’이라고 대답하면서도 과히 내키지 않는 얼굴이어서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뭐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요? 여기가 지루해요?”

“아니. 방해꾼이 지긋지긋해.”

에리히가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클레어의 손을 끌어당겼다.

입가보다 뺨에 먼저 그의 입술이 닿았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 어이없기도 해서 클레어는 조금 웃어 버렸다.

“수도로 돌아가면 여기보다 더할 텐데.”

“내가 뭐라고 했나?”

“아무 말씀도 안 하셨죠.”

클레어의 어조에는 놀림이 섞여 있었다.

뺨에 한 입맞춤을 기꺼이 키스로 돌려줄 작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는데, 어느 틈에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온 엘리엇이 에리히의 무릎을 쾅쾅 쳤다.

“나도! 나도!”

“엘리엇.”

에리히가 약간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테이블 밑에서 꺼내 허벅지에 앉혔다.

그러자 엘리엇이 볼을 내밀었다.

“나 참. 아기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더니.”

“아빠도 하니까 괜찮아!”

엘리엇이 명랑하게 소리쳤다.

클레어는 엘리엇의 두 뺨에 뽀뽀했다. 그러자 엘리엇이 그녀의 볼을 잡고 쪽, 코끝에 입 맞추었다.

에리히가 엘리엇을 자기 쪽으로 돌려 안으며 물었다.

“나는?”

“아빠도!”

엘리엇은 그의 뺨과 코에도 뽀뽀하고는, 무릎에서 훌쩍 뛰어 내려가 이번에는 놀아 주고 있던 요안나의 뺨에 뽀뽀하러 갔다.

클레어는 그 뒷모습을 보고 웃었다.

“리누스가 인사도 없이 가 버려서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뭐라고 설명했어?”

“이모가 와서 데려갔다고요.”

에리히가 피식 웃었다.

“비슷한 거긴 하군.”

“그렇죠?”

클레어는 빙긋 웃었다.

막시밀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요안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엇에게 시범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엘리엇이 어설프게 그것을 따라 했으나, 요안나가 바닥에 앉아 높이를 맞춰 주어도 일단 한쪽 무릎을 단정하게 꿇는 자세부터가 어려웠다.

클레어가 그것을 보며 웃었다.

“요즘 아주 신사 놀이에 흠뻑 빠졌어요. 요안나가 워낙 잘 받아 주기도 하고.”

“가정 교사를 붙일 때가 된 것 같군.”

“그러고 보니 당신의 가정 교사는 누구였어요? 아, 왜 웃고 그래요? 당신이 비록 여기에 들어 있는 건 단두대 생각이 나게 해도.”

그녀는 에리히의 이마를 꾹 찔렀다.

“몸이 우아한 건 인정하고 있다고요.”

“몸가짐이 훌륭하다고 하지 않나, 보통은?”

“그렇게 말하면 미묘한데요. 몸가짐이 훌륭하다기에는 솔직히…….”

클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리히는 별달리 화내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네가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지.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돼.”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요!”

피하려면 그럴 수 있었지만, 에리히는 기꺼이 자신의 손등이 빨개질 때까지 그녀가 때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릴 때 예법 교사는 알트마이어 가문의 노부인이셨는데, 요즘에도 아이를 맡아 가르치시는지는 모르겠군. 내가 그분의 보살핌을 받은 게 벌써 20년 전인데, 그때도 이미 연세가 상당하셨어.”

“그러면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돌아가시진 않았죠?”

“매년 안부 편지를 한 번씩 드리긴 하는데, 대필 없이 답신하실 수 있을 정도로는 정정하시지.”

“여기까지 온 김에 언제 한번 찾아뵈어요. 하지만 우리 입장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아이를 맡아 달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겠네요.”

클레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트마이어 가문은 여기에서 가깝지 않아.”

“클라우제너의 가신 가문이 아니에요?”

“따지자면 어머니 쪽 사람이야. 엄밀히 따지자면, 알트마이어는 황실의 충신이지.”

에리히가 말했다.

로멜 가문이 황실이 되면서 제국의 모든 귀족에게서 충성 맹세를 받았다.

그러나 제국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 온 봉신 관계는 또 다른 법이다.

알트마이어는 그런 가문 중 하나였다.

클라우제너와 에른스트처럼 쟁쟁한 가문들이 황실 밑으로 들어오면서 이름은 빛을 잃었으나, 관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클레어는 약간 놀란 듯이 대답했다.

“처음 들었어요.”

“역사 시간에 졸았나?”

“할 말 없어서 눈물 나네요. 싫어하는 과목이었다고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가 마음에 걸려서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알트마이어라니…… 어쩐지 이름이 귀에 익었다.

사실, 클라우제너의 가신일 거라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에리히의 손끝이 클레어의 손등을 건드리고, 손가락과 손톱을 매만지듯이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정 교사는 이제부터 천천히 알아보면 될 테고, 그보다 나는 보모가 걱정되는데.”

“제니 말이에요?”

“그래. 마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했으니 달리 말하지 않겠지만, 제니는 그냥 델포드에서 고용한 게 아닌가?”

“그렇긴 해요.”

“인품과 애정과 성실성을 모두 믿을 수 있다고 해도, 충성심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니까.”

“으음.”

“제니가 별도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엘리엇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속 두는 것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 좋지 않을 거야. 다른 하녀들도 마찬가지야.”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니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엘리엇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둘 수는 없었다.

솔직히 리누스의 상태를 보고 나니 더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가정 교사를 알아보는 김에 함께 생각해 볼게요. 레이디 아우구스타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기도 하고.”

말하다 말고 문득 클레어는 알트마이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에리히, 알트마이어라면 혹시 5년 전에…….”

“맞아. 기억력이 좋군. 장남이 5년 전에 죽었지.”

그것은 황태자가 시해된 날 실종되었다가, 사흘 뒤에 사망이 확인된 황태자의 호위 기사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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