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광부 급료 지불 완료.』
그렇게 적힌 쪽지가 전해졌을 때, 손님 대부분이 선주들로 이루어진 신사 클럽은 잠시간 조용해졌다.
“후작에게 그 돈이 대체 어디서 났을까?”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클럽 안을 관통했다. 안 그래도 불온한 분위기였던 클럽 안이 더더욱 불편한 침묵으로 물들었다.
선주들의 다수는 자산가 계급의 일원이다. 다소 기질적, 문화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도시 내에서 활동하는 상단이나 은행업자와 인연이 깊었다.
그러니 루덴도르프 후작이 어디에서도 돈을 빌리지 않았고, 새로운 투자자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희망적인 목소리를 냈다.
“혹시 클라우제너 공작이 투자한 것은 아닐까요? 며칠 전에 후작이 공작의 사무실로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그 인물이 공작과 동업하게 됐는데 입 다물고 있을 사람인가? 벌써 온 세상에 소문내고 축하 파티라도 했을걸.”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선주 하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직 섣불리 결론짓지 맙시다. 아우구스타 님에게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잘도 그 작자가.”
“입조심하시오.”
“젠장.”
그다음에는 또다시 욕설이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덴도르프 후작이 광부들에게 내준 돈은 틀림없이 선주 연합의 상호 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은행업자들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들도 돈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이 실은 남의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차용증을 쓰고 담보를 잡혀도 그러는데, 루덴도르프 후작 같은 자가 자기 금고에 들어 있는 돈을 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젊은 선주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후작에게 그 돈을 맡기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자네가 갔으면, 후작의 말을 거역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루덴도르프 항구가 지금 건설되는 중인데?”
항구 자체는 국책 사업이고, 운영에 중앙 관리가 파견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항구가 세워진 땅은 루덴도르프령이다. 후작이 찍어서 불이익을 주면, 선주 개개인이 어떻게 버티겠는가?
지금처럼 작은 항구라면 차라리 괜찮다. 그들도 연합하여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항구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중이다. 그리고 증축 공사가 완료되면, 이곳을 거점으로 삼는 배의 수는 족히 지금의 네댓 배가 될 것이다.
루덴도르프 후작이 지금의 선주 연합원들을 모조리 내쳐도 아무 지장이 없다는 소리였다.
“미운털이 박히면 무슨 손해를 보게 될지 몰라. 후작이 무슨 치사한 짓거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가서 말해 보게.”
언성을 높였던 젊은 선주도 그럴 자신은 없는 모양이다.
“당분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맡겼던 겁니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의 상호 보험 확대가 체계를 잡기 전까지만요.”
“어쩌겠는가. 루덴도르프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영주가 맡아 가지고 있는 관례가 적지 않게 있어.”
“하. 그런 곳은 대부분 영주 본인도 선주 아닙니까? 솔직히 항구를 끼고 있는 영지에서 배 한 척 없는 루덴도르프 후작가가 웃긴 거죠.”
“빅토리아 대공께 읍소라도 하러 가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따위가 어떻게 감히?”
그 말에 클럽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랬다. 제아무리 귀족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돈 많은 놈이 대접받는 세상이라지만, 황족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기 영지의 영주나 거래처 상단의 주인을 만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나는 일이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빕시다. 결국 그건 보험금이니까, 사고가 나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기다리면 언젠가 루덴도르프 후작이 제대로 채워 넣기라도 할 거란 말씀입니까?”
“가게른 광산이 진짜라고 들었습니다. 그사이에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결국 채워 넣긴 채워 넣겠죠.”
“그때 가면, 또 달리 돈 필요한 자리에 갖다 쓰지 않겠나.”
“일이 크게 불거져서 아우구스타 님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어지간한 변명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을 후작도 알 거요.”
희망적인 목소리들이 이리저리 오갔다.
“일단 우리의 염려를 전달해 두기라도 해야 합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후작은 그게 진짜로 써도 되는 돈인 줄 알고 채울 생각조차 안 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장남인 헤르만 님이 최근 빅토리아 대공 전하를 측근에서 모시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과도 상당한 친분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헤르만 님이 잘생기긴 하셨어.”
별것 아닌 농에 분위기가 약간 풀어졌다.
“그쪽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솔직히 헤르만 님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 말씀을 전할 순 있을 겁니다.”
모두가 동의했다.
선주 연합원들에게 쪽지가 전해질 무렵, 헤르만도 비슷한 연락을 받았다.
수신인의 이름만 적힌 봉투에 들어 있던 편지지에는 삐뚤거리는 글씨로 ‘주급 지불됨. 다음 주 주급도 준비’라는 두 문장만 쓰여 있었다.
헤르만은 그 쪽지를 찢어 화로에 던지며 생각했다.
‘푸흐스 경이 신중하긴 하지.’
푸흐스는 루덴도르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기사 가문 중 하나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기사’의 역할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루덴도르프에 남은 가신 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그만큼 존재감도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그가 헤르만에게 비밀리에 연락한다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루덴도르프 가문의 중신으로서, 호르스트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가게른 광산에 함께 가 있었다.
그런 그가 돌아섰다는 것은, 곧 가신 대부분이 돌아설 마음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아무리 고모님이 호르스트를 지지해 준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계속해서 악재만 이어지는데 마음이 바뀌지 않을 리가 없지.’
하물며 헤르만은 장남이었다.
아렌인의 피가 섞인 헤르만보다 순혈 로멜 귀족인 호르스트가 낫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고방식은 최근에 되살아난 것이지, 헤르만이 태어날 무렵에는 사라지는 추세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가문의 흥성이다. 가신들의 부귀영화 역시 거기에 달려 있다.
‘이대로 두어도 공작 부인의 뜻대로 일이 굴러가긴 하겠지. 결국 어디에선가는 사고가 날 테니까.’
루덴도르프 후작의 머릿속에는, 선주 연합에서 상호 보험이라는 제도가 생겨날 정도로 사고가 잦고 피해가 크다는 사실이 들어 있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살짝 가속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공작 부인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얼빠진 남자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헤르만이 화로의 재를 휘젓고, 새 편지지 뭉치를 꺼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심부름꾼인 어린 하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자작나무 별관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큰 도련님께서도 시간이 있으시면 차를 마시러 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 고모님은?”
“자작나무 별관에서 담소 중이십니다. 마님과 작은 마님께서도 그쪽에 계십니다.”
“알았다.”
헤르만은 흔쾌히 일어섰다.
자작나무 별관에는 지금 루덴도르프 후작령에 있는 숙녀들 중 가장 고귀한 사람만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 초대된 금발의 꼬마 신사는 오기 전에 열심히 연습했던 예법을 잊고 입을 벌린 채 젊은 루덴도르프 부인의 배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작은 마님, 곧, 호르스트의 아내 코넬리아는 임신 8개월이었다.
“엘리엇, 남을 그렇게 빤히 보면 안 돼.”
“그치만, 그치만!”
엘리엇이 발을 동동 굴렀다.
코넬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공작 부인. 엘리엇 님이 임산부를 처음 보시는 모양이지요?”
“그렇긴 한데…….”
“진짜로 아가야가 거기 있어요?!”
클레어는 난처해했지만, 둑으로 막아 놓은 것이 터지기라도 한 듯 엘리엇이 큰 소리로 물었다. 눈에서 별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네, 그렇답니다.”
“우와, 우! 와!”
엘리엇이 거의 펄쩍 뛰어올랐다.
먼저 자리에 앉아 아우구스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빅토리아 대공이 소리 내서 웃었다.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마저도 엘리엇을 바라보며 입술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코넬리아가 다정하게 웃었다.
“아기 좋아하세요?”
“아기 너무 귀여워요.”
엘리엇이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엘리엇 님은 동생이 생기면 아주 의젓한 형이 되어 주시겠어요.”
“동생?”
엘리엇이 눈을 빛내며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와장창!
그때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