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찻잔을 떨어뜨린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 몹시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제야 겨우 티타임에서의 일을 만회하고 공작 부인과 친분을 쌓을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이런 식으로 인상을 망치다니.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제가 실수로…….”
“잔이 뜨거웠을 텐데. 데지는 않으셨어요?”
클레어는 친절하게 그녀를 살피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에리히 고자설을 미시는 분이었나.’
그렇게 생각했으면, 아무리 아이 때문에 하는 말이라지만, 엘리엇의 동생이 생기면 운운하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사실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의 태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의 주인은 빅토리아 대공이고, 그녀는 예의상 초대했을 뿐이다.
하녀가 황급히 달려와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의 치맛자락을 닦고, 깨진 찻잔을 정리했다.
행여나 엘리엇이 다칠까 우려한 빅토리아 대공이 아이의 어깨를 붙들었다가, 아예 자기 무릎 위로 안아 올렸다.
“아, 저는 옷이 얼룩져서. 잠시만 실례할게요.”
당황한 후작 부인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갔다.
“이모할머니, 나 저거.”
테이블이 보이는 높이가 되자 엘리엇이 다과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대공은 쿠키를 집어 주는 대신에 그것도 치워 가도록 명했다.
찻잔이 깨졌을 때 사금파리가 들어갔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힝…….”
“주방에 더 있을 거다. 이 별관 요리사가 쿠키를 아주 잘 굽기에, 오늘 너 주려고 많이 구우라고 했거든.”
“진짜요?”
엘리엇이 빅토리아 대공을 돌아보며 방실방실 웃었다. 클레어가 염려스럽게 말했다.
“쿠키 먹느라 밥 안 먹으면 안 돼.”
“이모할머니가 주는 건 먹어도 돼.”
“언제 그런 규칙이 생겼지?”
“히히.”
편들어 달라는 얼굴로 엘리엇이 아예 빅토리아 대공의 목에 매달렸다. 대공은 미소를 참지 못했지만, 클레어의 손을 들어 주었다.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밥을 잘 먹고 쑥쑥 커야 나중에 형이랑 오빠 노릇도 잘할 수 있지.”
“우웅.”
쿠키인가, 형 노릇인가. 선택하지 못하고 엘리엇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괜히 코넬리아를 돌아보고 다시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코넬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만져 보실래요?”
“진짜요?!”
“아,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희 아이가 너무 무례를 저지르네요.”
“아니에요.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쁜걸요.”
코넬리아가 상냥하게 웃었다. 클레어는 괜히 조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헤르만이 루덴도르프 후작가를 상속하게 된다면, 그녀는 밀려날 것이다.
‘순진한 사람이네.’
이 기회를 틈타 공작가의 장남에게 우리 아이의 형이 되어 달라고 말할 정도의 수완은 없는 모양이다.
엘리엇은 벌써 빅토리아 대공의 무릎에서 뛰어내려 다가가 있었다.
그리고 다가갈 때의 기세와 달리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코넬리아가 엘리엇의 조그만 손을 당겨 자신의 배에 살짝 대 주었다.
“우와, 우와!”
엘리엇이 행여나 코넬리아의 배를 세게 밀지 않도록 제 딴엔 조심하면서, 발로만 바닥을 굴렀다. 물론 그런다고 진짜로 손을 가만히 둘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코넬리아가 웃었고, 빅토리아 대공이 피식거리며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동생 안 낳아 주면 큰일 나겠구나.”
“그러게요.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요.”
클레어는 평화롭게 말하며 아우구스타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는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좋은 일이지요. 클라우제너에는 직계 자손이 적으니. 후계자 문제를 서두르셔야 할 텐데, 위의 아이가 동생을 질투하면 여러모로 힘들죠.”
아우구스타의 시선이 클레어의 얼굴에 닿았다. 클레어는 그녀도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말투가 묘하네.’
엘리엇을 에리히의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후계자 문제를 서둘러야 한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타가 엘리엇의 출생을 의심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동 사망률이 높은 탓에, 아이가 하나 있어도 만약을 대비해 하나 더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출생을 모호하게 하는 게 황후에게까지 통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누가 낳았는지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의 친부를 숨기는 일이다.
‘아니, 하지만 리누스를 실제로 만나 보고 나니, 에리히가 친부라고 해도 엘리엇을 제거하려고 했을 것 같더라.’
리누스는 스스로 권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월계관을 갖다주면 그걸 움켜쥘 수는 있을까?
그러니 자신이 황후라 해도,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불안 요소는 전부 뿌리 뽑을 것이다.
뭐, 아렌 공왕과 교분을 갖기로 했을 때부터 이미 위험성은 각오했다.
클레어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급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부부 둘 다 젊고 건강하고, 할 일도 많으니까요.”
“흠, 그것도 그렇지.”
빅토리아 대공이 조금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욕심으로,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싶지 뭐냐. 황실에서 아기 목소리를 들어 본 게 너무 오랜만의 일이야. 베티나는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리누스 황자 전하께서도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곧 성혼하시겠지요.”
클레어는 빅토리아 대공에게 대답하면서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아우구스타가 눈을 내리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촌이라도 여럿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에리히도 외동이고. 내가 프란츠 공에게, 이복동생이라도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도 있는데, 고개만 저어서 말이야.”
빅토리아 대공이 혀를 찼다.
“상속이든 가계도든, 그게 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가 외롭게 크는 건 너무 서러운 일이 아니겠니.”
“아이는 신이 주시는 거니까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자, 아우구스타가 무해하고 다정한 웃음을 빙그레 머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클라우제너 공작님에게 형제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공작 부인께서도 자매를 잃으셨으니.”
“…….”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이종사촌들이야말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사이더군요.”
“아우구스타.”
아우구스타가 떠보고자 한 것은 ‘엘리사가 낳은 아이’에 대한 말이었겠으나, 그것을 모르는 빅토리아 대공이 그녀를 제지했다.
신중한 아우구스타가 왜 남의 상처를 들쑤시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평온하게 미소 지은 채 대답했다.
“안타까운 일이에요.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엘리엇을 아주 많이,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을 텐데.”
“클레어…….”
빅토리아 대공이 연민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나뿐인 자매를 잃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 중 하나를 잃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으리라.
이번에는 아우구스타가 침묵할 차례였다.
그때 마지막 손님이 왔다.
“헤르만!”
코넬리아가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자작나무 별관을 통하지 않고 오솔길을 통해 바로 후원으로 들어온 미청년의 손에는 노란 메리골드 다섯 다발이 들려 있었다.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르만이 제일 먼저 빅토리아 대공에게 작은 꽃다발을 건넸다.
그다음은 아우구스타와 코넬리아의 순서였다. 코넬리아가 꽃다발을 받으며 뺨을 붉혔다.
마지막으로 클레어에게 꽃다발을 건네면서 헤르만이 웃었다.
“부인을 뒷전으로 미루었다고 절 너무 책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얼마나 강한 주먹을 갖고 계시는지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요.”
클레어는 소리 내서 웃었다.
잠시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빅토리아 대공이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여자들끼리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귀찮게 내가 괜히 부른 것은 아니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할 일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젊은 남자가 그래서는 안 되지.”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도 흔치 않지요. 그리고 저처럼, 그걸 운 좋은 일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람도요.”
헤르만의 대답에 빅토리아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이게 아주 큰일 낼 남자야. 내가 이 나이가 아니었으면, 아주 시끄러워졌을걸.”
“수도에서 댄스홀을 찾아다니며 춤만 췄을 것처럼 보이긴 하지요. 실제로는 어땠나요, 헤르만 경?”
“전 남자 친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 크리켓 동료를 말하는 겁니다.”
수상한 오해를 산 적이 있기라도 한지, 헤르만이 먼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그리고 손에 남은 꽃다발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후작 부인께서 안 계시는군요.”
“옷에 얼룩이 져서 잠시 갈아입으러 가셨어요.”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러면 이건 엘리엇 경에게.”
헤르만이 우아한 동작으로 엘리엇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엘리엇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메리골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확 밝아졌다.
“나도 이걸로 연습할래!”
이번에도 그 신사 놀이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자그락자그락!
자갈돌이 깔린 정원 길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뛰어오는 것 같았다.
빅토리아 대공과 아우구스타 모두 긴장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달려온 것은 두 사람 중 한 명의 보좌관이 아니라 루덴도르프 후작저의 사람이었다.
“큰 도련님, 큰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가?”
“항구에서 배가 부두를 들이받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침몰이 진행 중인데, 후작님께서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