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때 하필 클레어는 외출 중이었다.
대신 요안나가 응접실로 나왔다.
“연락을 보냈으니 클레어 님께서도 곧 오실 거예요.”
“약속도 없이 왔으니까 기다릴 작정은 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이 편안한 말투로 말했다. 요안나는 차를 따르다 말고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상대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말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공작 부인을 상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윌리엄의 외모와 행동거지의 간극만으로도 흥미로운데, 클레어와 이만큼 친분이 있다는 것도 그랬다.
“클레어 님과 같은 지도 교수 밑에서 수학하셨다고요.”
“예, 밀러 교수님이라는 분인데, 인기 없는 경제학자셨죠.”
“클레어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보통 여학생들은 교양 수업만 듣고 따로 지도 교수님을 두지 않는데.”
“잡혀 왔다고 들었습니다.”
“잡혀 와요?”
“클레어는 그때 이미 작위를 계승한 다음이었으니까요. 과제는 팽개치고 영지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밀러 교수님이 그걸 보고 잡아다 차와 과자를 먹여 주저앉혔다고 하시더군요.”
요안나가 풋, 웃어 버렸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분이셨나 봐요.”
“클레어는 겉으로는 별일 안 하고 있어도, 속내가 남들이랑 달라서 특이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공작님이랑 처음 마주쳤을 때도 볼만했습니다.”
“오.”
요안나는 무의식중에 감탄사를 뱉었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너무 흥미로워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하긴요. 이해합니다.”
윌리엄이 킬킬 웃었다.
“밀러 교수님의 조교가 신입생들에게 ‘클라우제너 소공작님’을 소개했는데, 공작님이 ‘엄밀히 따져서 소공작이라는 작위는 없다’라고 하신 거죠.”
“엄격한 분이니까요.”
“그랬더니 클레어가 그 자리에서 ‘에리히 경’이라고 불렀지 뭡니까. 공작님 얼굴이 진짜 볼만했죠.”
아마 본인이 생각하고 있던 적당한 호칭은 잘츠기터 백작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윌리엄이 덧붙였다.
그때는 그도 식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건 일종의 전조였다.
클레어는 평소에는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흥분하면 살짝 돈 것 같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걸 고려하면, 아마 그때도 기분이 제법 뒤숭숭했던 상황이었으리라.
“어떤 분위기였는지 알 것 같아요.”
“요즘에도 그럽니까?”
“그때보단 훨씬 다정한 사이시겠지만, 가끔 번갈아 울분을 짓씹고들 계시죠.”
요안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윌 프레스콧!”
클레어가 환한 목소리로 옛 친구를 불렀다. 급히 왔는지, 겉옷도 벗지 않은 채였다. 옷자락에 묻은 겨울바람 냄새도 그대로였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5년 동안 소식 한 줄 없다가…….”
그리고 응접실 안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입을 뻐끔 벌렸다.
“누구시죠?”
얼굴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윌리엄 프레스콧이 맞는데, 얼굴만 맞았다. 이목구비를 떼다가 다른 남자에게 붙여 놓은 것 같았다.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윌리엄의 어깨 폭과 덩치를 눈으로 쟀다.
“내가 좀 변하긴 했지?”
“아니, 집을 나갔다더니 원양 어선에라도 탔어?”
클레어가 되물었다. 윌리엄이 낄낄거렸다.
“어.”
“뭐?”
“원양 포경선만 열두 척 갖고 있는 어선단 주인이라고, 내가.”
“아니. 그 게을러터진 잠탱이가?”
클레어는 진심으로 놀랐다. 윌리엄은 프레스콧 자작가의 오남이다.
프레스콧 자작가 자체도 그리 부유한 곳은 아니었고, 윌리엄에게까지 돌아올 몫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그가 지금 가진 것은 모두 자기 손으로 이룬 것일 터였다.
능력은 차고 넘치겠으나, 차라리 어디 은행업이나 투자로 돈을 불렸다면 모를까, 포경선이라니.
“진짜 쉽지 않았지. 선원으로 밑바닥부터 굴렀는데, 그러고 나니 이렇게 되더라고. 아무래도 힘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배를 직접 타는 거야?”
“항상 그러는 건 아니지만, 요즘에는 새로 시작한 일이 좀 있어서. 이번에도 8개월 만에 기항한 거야. 네 결혼 소식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받아 보고 조금 놀랐다.
“윌리엄 쇼어……. 이름을 바꿨어?”
“프레스콧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오히려 방해될 때가 많아서. 비밀은 꼭 지켜 줘. 공작님한테까지 지키라는 건 아니지만.”
“알았어.”
윌리엄의 가정 사정을 알고 있기에, 클레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아들 많은 집의 상속 문제는 언제나 복잡한 법이다.
뒤늦게 생각난 듯이 클레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윌리엄이 그 손을 힘차게 잡고 흔들었다.
집사가 클레어의 모자와 겉옷을 받아 주었다. 그사이에 요안나가 클레어 몫의 차를 준비했다.
“바쁜데 온 거 아니야? 난 좀 기다려도 괜찮은데.”
“그냥 포목상을 몇 사람 만났어. 생사도 모르던 친구가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
“네가 나더러 변했다고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돈 아쉬울 때마다 네 생각 나더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8년 전에 얼굴에 철판 깔고 청혼을 했어야 했는데.”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기 때문에 클레어는 웃어넘겼다.
“안 그래도 왜 청혼 안 했나 했다. 작위 가진 여자랑 결혼해서 평생 놀고먹는 부군이 되고 싶다더니.”
“와! 너, 지금 내 목숨을 위협한 거야.”
클레어는 쓴웃음을 짓다가, 윌리엄의 시선이 미묘하게 불안한 느낌으로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것을 깨달았다.
“왜? 농담 좀 했다고 에리히가 진짜로 주먹이라도 휘두를까 봐 걱정하는 거야, 설마?”
“음, 사실 놀랐거든. 진짜로.”
윌리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정도 안 하고 버텼으면, 끝까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뭐, 사정이 여러 가지로 있었어.”
클레어는 모호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말하면서 찻잔을 들었다.
“아이가 있었다는 것에도 놀랐고. 결국 공작님이 자존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네 정부 노릇을 5년간 한 거 아니냐?”
클레어는 민망해졌다.
“보통 반대로 말하지 않아?”
“나는 널 아니까. 한 사람은 결혼하고 싶어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라면, 누가 누구에게 결혼 서약을 허락하지 않았을지는 분명하지.”
“하하.”
“그러니까 딱히 소문을 믿는 건 아니야.”
윌리엄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꺼낸 것은, 그가 소문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클레어는 난처해졌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거짓말로 제가 낳았다고 말해서 속일 수 있을까?
엘리엇이 에리히의 아들이라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윌리엄은 그녀의 친구였다.
적어도 요안나 앞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뭘 생각하든 간에 부당한 일은 없었어. 설령 부당해 보이는 일이 있었더라도, 결혼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에 모두 합의된 일이야.”
그녀가 겨우 대답을 짜냈을 때였다.
윌리엄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엘리사가 죽었다는 건……, 사실이야?”
“응.”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윌리엄은 엘리사를 아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클레어의 집에 방문했고, 마음도 꽤 잘 맞았다.
“5년 전에?”
“대충 비슷해.”
클레어는 불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자신과 엘리사를 둘 다 알고, 또 똑똑한 윌리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짐작해 낼 것이다.
“내가 더 일찍 연락했으면 좋았을 텐데.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다니.”
윌리엄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엄마 왔어?!”
복도에서 달려오는 아이 발소리가 들렸다.
클레어는 아이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엘리엇은 그러지 않았다.
쿵.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울음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 보모가 문을 살짝 열었다.
“안녕하세요. 클라우제너의 엘리엇입니다.”
엘리엇이 침착한 발걸음으로 들어와 신사답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무릎은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배꼽인사를 할 때처럼 몸과 함께 구부려졌다.
클레어는 미소를 머금었다. 복잡한 생각 어쩌고저쩌고도 엘리엇이 얼굴을 보이는 순간, 늘 그렇듯 모든 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윌리엄이 갈색 눈을 부드럽게 휘고 일어서서 엘리엇에게 마주 인사했다.
“윌리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리엇 경.”
“헤헤.”
엘리엇이 고개를 들었다가 윌리엄을 보고 눈을 빛냈다.
“어? 후크 선장님?!”
윌리엄이 기묘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그게 엘리엇이 에리히를 닮은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윌리엄은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트마이어의 말이 진짜겠어.’
혈육을 닮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이의 얼굴이 꼭 에리히를 닮았는데도, 윌리엄은 거기에서 엘리사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