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1/263)

142화

평소라면, 에리히의 귀가는 꽤 시끄럽게 이루어진다. 엘리엇이 강아지처럼 반가워하며 정원까지 뛰어나오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환영 세리머니가 없어서 에리히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손님이 있나?”

“예. 마님의 옛 친구분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옛 친구?”

에리히는 방한용 외투만 벗고 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옛 친구가 북방에, 그것도 루덴도르프에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집사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진짜루요! 그래서 그때 피터 팬이, 앗, 아빠다!”

낯선 남자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재잘대던 엘리엇이 폴짝 뛰어내려 도도도 에리히에게 달려왔다.

“아빠! 후크 선장님이 왔어요!”

“후크 선장?”

에리히는 엘리엇을 안아 올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딜 봐도 뱃사람이었다. 엘리엇이 후크 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하지만 이게 클레어의 옛 친구라고?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자네 설마, 윌리엄인가?”

그는 눈을 의심하며 물었다. 클레어가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며 웃었다.

윌리엄이 미소를 지었다.

“알아보시는군요. 워낙 오랜만에 뵈는 거라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몸이 아주…… 건강해졌군.”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너무 놀라워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윌리엄 프레스콧은 약간 통통하고 어려 보이는, 말랑말랑한 인상의 소년이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팔뚝 힘만으로 밧줄을 찢을 수 있을 것처럼 단련된 사나이였다.

윌리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배를 탔습니다. 바다에서 몇 년 구르다 보니 몸도 튼튼해지고 얼굴도 이렇게 되더군요.”

“그랬군. 무탈해서 다행이야.”

에리히는 한 손에 엘리엇을 안은 채로 흔쾌히 손을 내밀어 상대를 환영했다.

세계관이 무너진 엘리엇이 당황해서 둘레둘레 눈을 굴렸다.

“왜?”

“피터 팬이랑 후크 선장은 사이가 나쁜데…….”

여기에는 뭐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인가. 에리히도 에리히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을 굴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클레어가 웃으면서 상황을 수습했다.

“오늘은 휴전이야.”

“휴전?”

“싸우지 않고 참는 거. 엘리엇이 좋아하는 후크 선장님을 아빠가 쫓아내면 안 되니까.”

에리히는 엘리엇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은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지만, 두 사람 다 마냥 좋았기 때문에 이내 생글생글 다시 웃었다.

클레어가 말했다.

“윌은 이름을 바꿨대요.”

“그래? 가문의 사정 때문인가?”

에리히의 질문에 윌리엄이 모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클레어에게는 연락하고 지냈다면 좋았을 텐데. 몇 안 되는 친구가 아닌가.”

“내가 친구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당신하고는 다르니까.”

클레어가 끼어들어 말했지만,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니, 내 말 맞잖아요.”

“음, 내 생각에 이건 공작님 말씀이 옳아.”

윌리엄이 싱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은 함부로 친구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거고, 너는 매정해서 연락을 안 하는 거잖아.”

“내가 언제.”

“답장 기다리는 쪽만 애타지.”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쁘군.”

클레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아니, 소식 끊은 게 대체 어느 쪽인데?”

“윌리엄은 그렇다 치고, 내가 연락했으면 잘도 답장했겠어?”

에리히가 비꼬듯이 되물었다. 클레어는 말문이 막혔다.

“당신은 친구가 아니잖아요.”

“그것도 기쁜 말이군.”

에리히는 뻔뻔하게 대꾸하고 윌리엄을 향해 물었다.

“저녁은 들고 갈 거지? 시간이 있으면, 묵고 가게. 곧 해도 질 텐데.”

“신혼을 방해하는 건 도리가 아니겠지만,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공작님.”

“옛날처럼 편하게 해.”

“알겠습니다, 선배님.”

윌리엄은 ‘어찌 감히’라고 말하는 대신 싱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엘리엇이 내려 달라고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아직 환영 뽀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에리히는 의아한 기분으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곧장 윌리엄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어른들이 인사를 하는 중이라 꾹 참았지만, 이제 인내심이 한계였던 것이다.

“선장님, 배 이야기 더 해 줘요. 그래서 갈고리 손을 단 그 항해사는 어떻게 됐어요?”

“아, 그 갈고리 손이 말이지.”

윌리엄은 기꺼이 엘리엇을 다시 안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러면서 흘끔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에리히는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응접실을 나섰다.

‘그놈의 후크 선장.’

아이가 다른 사람을 따르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세상 경험을 채워 줄 만한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이고, 윌리엄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응접실에서 뒤따라 나온 클레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물었다.

“서운해요?”

“아니.”

에리히는 일단 부정했다. 하지만 클레어가 그를 붙잡아 뺨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생각을 정지시키고 고개를 숙였다.

쪽 하고 짧은 입맞춤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오늘은 엘리엇 몫을 내가 해 주지 뭐.”

“네 몫은?”

그는 클레어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물었다. 클레어가 웃으면서 검지로 그의 아랫입술을 벌려 열고 천천히 키스했다.

5년 동안 윌리엄에게 늘어난 것은 근육만이 아니었다.

그는 시원스럽게, 공개적으로 말해 버렸다.

“결혼까지 5년 걸렸다고 말하면 안 되죠. 클레어가 도망간 게 8년 전인데.”

“클레어 님이 도망가셨다고요?”

요안나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 하고 그날 오후 기차 타고 델포드로 가 버렸답니다. 저한테도 인사 안 했어요.”

“어머. 저녁에 무도회가 있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수도의 결혼 시장에 나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죠, 그거.”

윌리엄이 빙글빙글 웃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선배님이 클레어를 쫓아가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에리히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나이프를 틀어쥘 기세였다.

“나한테서 도망친 여자한테.”

“아, 이거 약간 웃기네. 내가 도망치긴 도망쳤지만, 당신한테서는 아니죠.”

클레어도 발을 까닥거리며 부정했다. 그리고 생글거리고 웃으며 윌리엄에게 말했다.

“내가 그해 결혼 시장의 핫 매물이었잖니. 은쟁반 밑판이 빠질 정도로 구혼장이 쌓였다고.”

작위에 영지까지 가진 여자는 드물다.

졸업식 당일부터 각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 혹은 신분 상승을 위해 작위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는 사람은 모조리 달려들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결국 남부 아렌 사교계에서도, ‘우리 지역에서 남편감을 구하나 보다’ 하고 밀어 넣는 어중이떠중이를 하나씩 치워야 했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그냥 찰스와 결혼할까 5분 정도 고민해 보기도 했을 정도였다.

에리히가 말했다.

“어차피 전부 별 볼 일 없는 남자였겠지.”

“그거 본인에 비해서 그렇단 뜻으로 말한 거죠?”

“…….”

에리히는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진짜. 그때 내가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겸손하고 선량하고 잘생긴 남자가 몇 명은 있었을 텐데.”

“나도 없었다에 표를 주고 싶은데.”

윌리엄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적어도 위아래로 서너 살 안의 귀족 남자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걸. 클라우제너 소공작님을 아는 사람이면 누가 감히 구혼장을 넣었겠어.”

“자네 말이 이상하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때 클럽에서 내기도 있었습니다.”

“내기?”

“선배님이 과연 청혼을 할 것인가, 되도 않게 오빠 노릇을 하려고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요. 어느 쪽이든 구혼자를 전부 쓸어 낼 거라는 소리이긴 하지요.”

에리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빠 노릇?”

어이가 없어서 대답할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안나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결국 각하께서는 클레어 님이 졸업하자마자 청혼할 계획은 있으셨다는 거네요?”

“없었네.”

에리히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심이야 누가 알겠는가. 실제로 뭔가를 하기도 전에 클레어는 떠났었으니까.

클레어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나한테 청혼할 마음이 진짜 있었으면 델포드에 있다고 해서 구혼장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어?”

그녀의 시선이 에리히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소리였다.

“…….”

에리히가 입을 다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