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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142/263)

143화

진퇴양난이었다.

거절당했다고 생각해서 구혼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 자신이 청혼할 마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까지 진지하게 청혼할 마음 따위는 없었다고 말하면, 저지른 짓이 있기 때문에 또다시 트집을 잡힐 게 뻔했다.

에리히는 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발화자의 신뢰를 없애 버리는 수단은 자기 자신에게도 유효한 법이다.

그는 남 일을 말하듯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당했다고 생각하고 좌절감이라도 느꼈나 보지.”

그건 완전히 사실이었으나,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세운 얼굴은 빈정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클레어가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어이없어하는 건지는 불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지그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표시를 한 건 너 아닌가?”

새파란 시선이 클레어에게 못 박히듯 파고들었다. 그 눈빛보다 더 에리히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은 없었다.

촛불 심지에 불이 붙듯 몸 안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생겨나는 감각에 클레어는 마른침을 삼켰다.

놀릴 작정이었는데, 자신이 곤란해졌다.

실은 할 만한 말이 별로 남지 않았다.

사춘기 호르몬이 불러일으키는 일시적인 충동이었다거나, 그가 신분 차이를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이제 무효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자극하고 있는 것은 의식일 텐데, 촉각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가 아렸다.

“아니면, 그 말 무르겠어?”

에리히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클레어는 입술 안쪽을 혀로 한 번 훑고 빙긋 웃었다.

“있긴 뭐가 있어요? 징하게 싸운 것밖에 없는데.”

그리고 시선을 나누기에는 이 자리에 너무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이젠 아닌 척도 안 하네. 하긴, 결혼까지 한 마당에 아닌 척하는 게 더 웃기긴 하겠다만.”

윌리엄의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깼다.

“내가 뭘 아닌 척했다는 거야?”

“내가 4년 동안 이 꼴을 봤는데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요안나가 소리 내서 웃고, 막시밀리안마저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는걸? 난 딱히 숨기는 게 없어서.”

“내가 눈꼴시어서 입을 열면 누구 이야기가 더 많을지, 잘 생각해 봐, 클레어.”

윌리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아주 흥미롭군.”

에리히가 침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윌리엄, 혹시 증기선도 운영하고 있나?”

“있긴 합니다만, 전부는 아니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윌리엄이 의아한 듯 대답하다가, 에리히의 의도를 깨달았다. 턱이 빠졌다.

이 시점에서 제국 최대 규모의 탄광주께서 증기선에 대해서 왜 물으시겠는가.

클레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요. 지금 당신, 윌리엄을 매수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친구에게 다소간 편의를 봐주겠다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근데, 순수하게 호의로 하는 말도 아니잖아요!”

윌리엄이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부부가 재미 삼아 하는 신경전에 진짜로 끼어들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클레어를 팔아먹을 것을 고려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선배님?”

“야, 윌, 너 입 다물어. 한마디라도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에리히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가 문제지? 명령한 것도 아니고, 네가 싫어하는 권위로 강요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돈으로 매수하는 건 네가 제일 선호하는 방식이 아닌가.”

“아니, 잠깐. 그걸 그런 일에 쓰지 말라고요!”

클레어가 언성을 높여 따졌다.

윌리엄은 그것 보라는 듯이 요안나와 막시밀리안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시 낄 일도 아니었으나, 끼려고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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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끝난 뒤였다.

요안나가 먼저 물러가고, 막시밀리안도 모처럼 호위 자리에서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갔다.

에리히는 윌리엄에게 거실로 가자고 권유했다.

“브랜디 한잔 정도는 더 할 수 있겠지?”

“기다려요. 나는 세수 좀 하고 싶은데.”

“다녀와.”

클레어는 수상한 눈초리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겠어서 못 가겠어.”

“이제 와서 새삼.”

에리히가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거의 자동 반사처럼 거기에 팔짱을 끼었다.

세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는 사이에 윌리엄의 얼굴이 차츰차츰 가라앉아, 에리히가 브랜디 병을 손수 챙겨 왔을 때는 만찬 중의 유쾌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클레어가 먼저 말했다.

“윌, 나는 네가 그 이야기를 그냥 덮었으면 좋겠어.”

“…….”

“어느 집이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하나쯤 있는 법이잖아. 우리는 잘 지내고 있어. 아무 문제도 없고, 가족으로서 아주 행복해.”

윌리엄이 복잡한 얼굴로 클레어를 바라보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윌.”

“나는 확인해야 해. 엘리엇이 누구의 아이인지.”

“…….”

클레어 대신, 에리히가 담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내 아이라고 확답하면, 날 경멸할 텐가?”

“아뇨. 아닙니다. 선배님이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윌리엄이 진실 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클레어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도 믿고 있고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클레어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리엇을 에리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훌륭한 일을 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렇다고 윌리엄이 진실을 알 리 없었다. 아이가 엘리사의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어도, 그 생부에 대해서는…….

윌리엄이 브랜디 잔을 훌쩍 비웠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만나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윌리엄.”

“클레어도 함께. 하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비스마르항까지 오실 수 있겠습니까?”

에리히가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아이가 해적 놀이를 무척 좋아하니…… 바다까지 온 김에 친구의 배에 태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왕 항구로 갈 거라면, 수도로 돌아갈 때도 기차 말고 배를 타고 가도록 하죠.”

클레어도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혹, 간자가 있을 때를 대비해서였다.

운 나쁘게도 루덴도르프항은 언제 열릴지 모르니, 비스마르항으로 가야 할 것이다.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객실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푹 쉬게.”

에리히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윌리엄은 그와 다시 한번 악수를 하고, 클레어의 뺨에 키스를 한 뒤 거실에서 나갔다.

에리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윌리엄은 확인하러 온 셈이군.”

엘리엇을. 그리고 자신들이 변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고 빈 브랜디 잔을 내밀었다. 에리히는 그 잔을 받아 얼음을 채우고, 술을 따랐다.

그녀는 속이 타는 듯, 잔을 건네받자마자 훌쩍 마셨다.

“우리도 그걸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윌은 지금도 여전히 믿을 만한 사람일까요?”

“5년이 짧은 세월은 아니지.”

5년 전에 그들은 고작해야 스물두 살이었다. 그 나이는 한 사람의 평생을 확신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사실 이제 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클레어 자신마저도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윌리엄이 그때와 같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윌리엄이 사라졌던 게 정말 프레스콧 자작가 때문이었는지 의문이 드네요, 이제.”

클레어는 조금 울적한 기분으로 말했다. 실은 계속 마음 한구석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었어도 친구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도와 달라고 연락하는 쪽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이제 5년 전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일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다.

에리히가 가볍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우기는 데 이길 장사 없지. 엘리엇은 내 자식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상, 아무도 뭐라고 못 해.”

“우기기 장사께서 말씀하시니 설득력이 넘치네요.”

클레어는 잔을 내려놓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서, 진실은 어느 쪽인데요?”

“뭐가?”

“8년 전에 진짜로 나한테 청혼하려고 했어요?”

“다행히, 내게는 진실을 고발할 친구가 없군.”

에리히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클레어를 훌쩍 안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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