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34. 주머니에 난 구멍
호르스트가 짧은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루덴도르프 후작저의 분위기는 우울했다.
맑은 날씨였는데, 마치 이곳에만 폭우가 쏟아지기라도 한 듯 공기마저 침침했다.
‘또 무슨 일 있나.’
가문에 닥친 위기에 대해서 고용인들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지 전체를 휩쓰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후작은 그렇게 표정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욱 좋지 못한 소식을 가져왔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사실 하려던 일을 성사시켰다 하더라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똑똑.
“아버지, 접니다.”
서재의 문을 두드린 후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던 루덴도르프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구나!’
루덴도르프 후작의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 있었고 눈동자는 퀭했다.
후작이 호르스트를 보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찌 되었느냐?”
“크로지크 백작가와 협상은 되었습니다.”
호르스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주 연합의 돈을 빅토리아 대공에게 갚아야 할 처지에 빠진 후작이 돈을 꺼낼 만한 곳이라고는, 가게른 광산에 투자한 자금뿐이다.
광산 개발을 일시 중지하고, 자금을 빼서 선주 연합의 보험료를 갚는다. 그다음 항구 사고가 정리된 뒤에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 후작의 계획이었다.
물론 크로지크 백작가가 그런 일에 간단히 동의할 리 없었다.
“지분 22%를 넘기는 조건으로 협상했습니다.”
“고작해야 중지하는 것만으로 22%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 사정이 급하고 어렵다는 것을 저쪽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 날도둑놈들이 따로 없군.”
후작은 탄식했다.
“광부 놈들은?”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무슨 일이 또 생겼느냐?”
“자콥이라는 놈이 도망갔습니다.”
“뭣?!”
후작은 이번에야말로 벌떡 일어서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자콥에게 지불했던 돈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개발을 중지할 거라면, 광부 놈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고를 일으킨 놈들에게 보상금을 받아 내지는 못할망정 급료를 주다니, 말이나 되는가.
그래서 호르스트에게 급료로 내준 돈을 회수해 오라고 했던 것이다.
호르스트가 난처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클라우제너 쪽에서 연락이 있었다고 합니다. 콜베르크 광산에서 횡령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놈이었다더군요.”
“허! 하지만 밑에 사람을 많이 거느린 놈이었지 않느냐!”
“거기에도 또 사정이 있습니다. 클라우제너 쪽에서 남은 자들을 데려갔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후작의 관심사가 아닐 터이므로, 호르스트는 그렇게만 말했다.
후작이 기운 빠진 듯 도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목을 젖히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렇구나. 결국 이미 지급된 돈은 못 찾아왔다 이거지.”
“광산 개발을 중지했으니 일단 전부 메꿀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지나간 기간의 주급은 회수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콥에게 주었기에 혹시나 싶었던 거지, 광부 개인에게 주었다면 대부분 이미 써 버렸거나 해서 되찾을 수 없었으리라.
루덴도르프 후작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버지, 그사이에 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후작이 목을 울렸다. 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브뤼닝 백작이 찾아왔었다.”
“가라앉은 배 주인 말입니까?”
“그래, 그놈!”
루덴도르프 후작은 욱하여 언성을 높였다.
브뤼닝 백작이 찾아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변호사를 보냈는데, 후작님께서 제대로 상대해 주시지 않는다며 제게 편지를 썼더군요. 제게도 작은 일이 아닌지라 서둘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백작이 무슨 할 말이 있소? 그럴 시간이 있으면 빨리 가라앉은 배나 인양해 가시오.]
[인양은 제게도 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한 자금을 내주셔야지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배는 백작의 것이니, 당연히 책임도 백작이 져야 할 것이 아니겠소?]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계약서에 따르면, 항구에서 일어난 사고의 처리 비용은 후작님이 내셔야 합니다.]
[계약서라니?]
[손해 배상 보험 말입니다.]
브뤼닝 백작의 변호사가 그의 앞으로 임시 보험 계약서를 가져왔다.
그것은 항구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1차적으로 해당 항구에서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다.
차후 선주가 소속된 보험에 청구하거나, 금액에 따라 영주 연합으로 구성될 재보험에서 보상해 주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다른 지역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제때 연락이 되지 않아 선원들이 무일푼 상태가 된 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떠돌거나 사고 난 배의 처리를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던 것이다.
이것이 빅토리아 대공이 새로 만드는 보험 체계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당시에 루덴도르프 후작은 별생각 없이 그 약정서에 서명했다.
선주 연합에서 보험금으로 가지고 있는 적지 않은 자금을 보관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기항하는 배에게서 받는 임시 보험료도 공돈 같았던 것이다.
[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영주인 후작님 본인께서 보장하는 것이기에 기꺼이 보험료를 냈습니다. 그러니 이 계약서에 따르면, 보험금을 당연히 제게 내주셔야 합니다.]
[그건 사고일 때 이야기지. 백작의 항해사가 저지른 일 때문에 지금 항구가 무슨 꼴이 나 있는지 뻔히 알면서 염치도 없소.]
루덴도르프 후작은 우겼다.
[이게 어떻게 피치 못할 사고요?]
[여기에 피치 못할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만 보상해 준다는 조항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제 항해사가 아니라 루덴도르프 항구의 도선사가 일으킨 문제겠죠. 듣자 하니 술주정뱅이를 고용하셨다던데.]
브뤼닝 백작이 빈정거렸다.
[제 손해는 지금 단순히 배 한 척이 아닙니다, 후작님. 가라앉은 자재가 대체 얼마치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돈은 오히려 우리 손해가……!]
[게다가 이번 일은 국책 사업입니다. 신용을 잃는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일인지, 이 일을 따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짐작하신다면, 이런 말씀 쉽게 못 하실 텐데.]
백작이 입가를 비틀었다.
[하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누이가 가져오는 대로 서명만 하신 후작께서 무엇을 아시겠습니까?]
다시 생각해도 분이 나서 루덴도르프 후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놈이 인양 자금과 망가진 배와 잃어버린 화물의 손해 보상을 요구했다. 제때 지급하지 않으면, 법정에 가겠다는구나.”
“아…….”
호르스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배의 규모는 그도 보았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의 루덴도르프 후작가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친에게는 이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
후작이 유능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을 때에는 그럭저럭 가문이 굴러갔다. 그래서 호르스트는 그가 이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인 줄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능동적으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된 가업에, 오래 일한 실무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인장만 찍는 일은 누구든 할 수 있으니까.
“잘될 겁니다, 아버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네가 잘해 줘야지. 네가 후계자이니.”
루덴도르프 후작이 머리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의지하기라도 한 양.
호르스트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서서 답답한 마음에 창밖을 문득 내다보자 헤르만이 정원에 있었다.
후작으로부터 적지 않은 꾸중을 듣거나 화풀이 대상이 되었을 텐데도, 그는 평온한 얼굴로 동백꽃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그 곁에는 코넬리아가 서 있었다. 헤르만이 그녀의 바구니에 꽃봉오리가 맺힌 가지를 던져 넣었다. 아마 코넬리아가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도움을 자처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헤르만은 왜 수도로 돌아가지 않을까. 호르스트가 후계자로 결정된 이후로, 그는 결코 이 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
엘리엇이 두 손을 크게 들어 올렸다.
“윌 아저씨는 날개가 이따아만큼 큰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은 적이 있대요!”
“그렇군요.”
“이렇게 펄럭거리는데, 날지는 못하고 물속에서 헤엄만 친대요. 그리구! 진짜 날아다니는 물고기도 있다고 그랬어요!”
마치 제가 직접 보기라도 한 양 엘리엇이 신나서 요안나에게 설명했다.
클레어는 헛웃음을 머금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리엇은 하루 만에 어찌나 윌리엄에게 푹 빠졌는지, 들은 이야기를 몽땅 외워 아는 사람들에게 전부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도 이미 클레어에게 두 번 하고, 에리히에게 한 번 하고, 마사에게도 한 것이다.
한동안 심취했던 신사 놀이는 도로 해적 놀이로 돌아갔는데, 그 해적이 매일 낚시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