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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144/263)

145화

그런 엘리엇의 모습을 보며 빅토리아 대공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어지간히 그 새 손님이 좋았던 모양이로구나.”

“어렸을 때부터 실제로는 본 적도 없으면서 배와 해적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했거든요. 이번에 아주 제대로 불이 붙었어요.”

“하긴, 여기에 올 때도 배를 보면서 얼마나 설레어했니? 해적선이 항구에 있을 거라면서.”

“그러게요. 그런데 정작 항구 구경은 가지도 못했네요.”

“가 봤자 별로 볼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공사판이었잖니.”

“그건 그래요.”

빅토리아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계속 머물러 있을 거라면, 내가 한번 데리고 나갈까 했었지.”

“선주 연합 클럽에 방문한 적도 있으신가요?”

“그래. 거기까지 하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도 되더구나. 항구가 오죽 엉망이었어야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번 일로 아우구스타에게도 좀 실망을 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죠. 그녀는 그냥 딸에 불과하고, 가문을 이끄는 건 후작이니까요.”

“남동생이 제대로 가문을 다스리지 못하는 걸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만.”

빅토리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 다툼 자체에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가문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데 영향력을 미친 아우구스타와는 입장이 달랐다.

하지만 책임을 말하면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선황의 장녀이자 지금도 제1위 황위 계승권자이며, 황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후계 구도에 대해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클레어가 부드럽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입장이 전혀 다르시지요. 제국민을 더 위태롭게 만들 것을 우려하신 것이니까요.”

“변명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만, 남은 아이가 리누스밖에 없었던 것을 어떡하겠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빅토리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렌 공왕조차도 내전을 우려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더 나설 수 없었다.

리누스를 말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계승법을 따져 가며 자신이나 맨프레드가 황위에 오르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고, 클라우제너의 주인인 에리히를 지지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다.

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빅토리아 대공이 바라는 것은 리누스가 당당하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자라 제 역할을 다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황제와 내각만 제 기능을 해 준다면, 나머지는 모두 일시적인 권력 다툼일 뿐이다.

권좌에 탐욕스럽기는 하지만, 황후는 그래도 통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빅토리아 대공은 과거의 에리히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이 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황후와 아우구스타가 생각이 있다면,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루덴도르프 후작에게 이런 대규모 국책 사업을 맡겨서는 안 되었다.

“곯아 버리기 전에 터졌으니 차라리 다행이지요. 그러고 보니 신문은 보셨나요?”

“무슨 새 소식이라도 있었니?”

“에른스트의 고등 재판소에 브뤼닝 백작이라는 사람이 소송을 걸었다더군요.”

클레어는 그녀에게 신문을 집어 주었다.

빅토리아 대공은 코안경을 꺼내 쓰고 신문을 훑어 읽었다.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다.”

단순히 돈을 갚지 못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일로 인해 재판소에 가서 소송까지 당한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수치였다.

“엄마! 나 꿀!”

이제 떠들 만큼 떠들었는지, 엘리엇이 달려와 클레어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클레어는 수건을 엘리엇의 목에 두르고 미리 준비해 놓은 컵에 미지근한 레몬꿀차를 따라 엘리엇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엘리엇이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꼴깍 마시다가 주르륵 흘렸다.

“이런.”

그것도 예상한 바였다. 마저 마시게 하고 나서 그녀는 엘리엇의 입가를 수건으로 닦고 말했다.

“턱이랑 손을 씻어야겠다. 끈적끈적해질 텐데.”

“엄마는?”

“빅토리아 고모할머니랑 더 이야기할 거야.”

“나 배 갖고 올 거야. 엄마, 여기서 기다려야 돼?”

“네 배는 벌써 트렁크에 들어갔어.”

“안 돼!”

엘리엇이 발을 굴렀다.

“윌 아저씨한테 보여 주기로 했단 말이야!”

“어차피 오늘 못 만나.”

“우리 윌 아저씨한테 가는 거 아니야?”

“가긴 갈 건데, 오늘 안에는 도착 못 해.”

“이잉!”

엘리엇이 떼쓰는 소리를 냈지만, 비스마르항까지는 직행 기차가 없다.

빅토리아 대공이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출발해서 언제 도착하려고?”

“오후 기차를 타면, 중간 숙소에 딱 저녁에 내릴 수 있다나 봐요. 에리히도 일을 정리하고 출발해야 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렇구나.”

클레어는 엘리엇의 엉덩이를 두드려서 씻으러 가라고 보냈다.

비로소 엘리엇의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벗어난 요안나가 티 테이블에 앉아, 화제에 끼어들었다.

“저는 오늘 신문을 보고 브뤼닝 백작이 용감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우구스타 님이 있는데도 소송을 걸다니.”

“아우구스타의 체면에 이런 일에 직접 끼어들 수는 없지. 가주가 엄연히 있는데, 사고 수습까지 나이 든 누이가 해 주어서야 되겠느냐.”

하지만 클레어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애초부터 이 사건이 진짜 사고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십중팔구 보험 사기일 것이다.

사고를 낸 항해사는 사흘도 되지 않아 행방을 감췄다. 가라앉은 배는 범선으로, 큰 배이긴 하지만 슬슬 은퇴할 때가 된 물건이었다.

실려 있던 화물이 진짜로 대형 공사에 쓸 만한 고품질의 자재라는 건 또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전부 바다에 잠겨 버렸는데.

‘어딘가에서 망가진 목재를 사다가, 폐기할 때가 된 배에 실어 사고를 내면, 제법 쏠쏠하겠지.’

책임 범위가 정해지지 않은 보험이 아닌가.

게다가 클레어는 한 가지를 더 의심하고 있었다.

선박 사고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하필 부두와 부딪쳐 가라앉은 것이 진짜 우연일까? 하필이면 이 시점에?

아마 이 소송 자체가 최종 목적이었으리라.

요안나가 말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타 님이 이 사건에 직접 개입하여 소송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면 루덴도르프 후작가는 파산할 거예요.”

“적당히 중재하여 화해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돈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아우구스타 님에게 그 정도 사재는 없을 거예요.”

황후의 시녀가 되었을 때 지참금 대신 가져간 재산이 전부일 거라고 요안나가 말했다.

‘그럴 리가.’

클레어는 속으로만 그 말을 부정했다.

아우구스타는 연꽃 이궁의 관리자다.

마약 총책이 일에 헌신하느라 사재를 전혀 축적하지 않았다고? 참새도 비웃을 소리다.

아우구스타가 고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충성심 문제가 제일 크지.]

에리히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을 때, 클레어는 자신의 생각과 표현만 다를 줄 알았다.

아우구스타가 사재를 꺼내 후작가를 구하려면, 돈의 출처를 들킬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루덴도르프 후작가가 파산하도록 방치한다면, 황후의 지지 세력에 균열을 내게 된다. 루덴도르프는 황후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후계자까지 갈아 치운 가문이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쫓아냈던 아렌인 소생 장남이 돌아와 가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황후와 아우구스타의 프로파간다를 역공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에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가문에 충성할 것인가, 황실에 충성할 것인가. 이건 아주 오래된 문제이지. 이 경우 황실 대신 주군을 넣으면 되겠군. 어느 쪽을 택하든 아우구스타는 내부 경쟁 때문에 난처한 처지가 될 거야.]

[내부 경쟁이요?]

[가문을 포기한다면 무능한 자가 되고, 가문을 살린다면 불충한 자가 되겠지. 생각하지 못했나?]

[이간질하는 자가 있겠군요. 충성 문제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나는 황후가 아우구스타를 버림으로써 잃게 될 것 쪽에 초점을 뒀었어요. 혹은, 아우구스타가 루덴도르프를 버린다면 갖고 있는 힘 중 하나를 잃는 셈이니까요. 내부 경쟁에서 패배하게 되겠지, 하고…….]

내부 갈등과 경쟁은 당연히 있을 테지만, 초점을 능력에 맞추고 있었다.

[루덴도르프 후작이 힘이 되긴 무슨.]

[그러게요. 여기 와서 보니, 그냥 짐덩어리였네요.]

한탄을 했는데, 에리히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빅토리아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작의 입장은 어찌 되었든 브뤼닝 백작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그것도 전하께서 내주실 생각인가요? 이만저만 큰돈이 아닐 텐데.”

“애초부터 재보험을 만들자고 한 이유가, 선주 연합 보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대형 사고를 처리하자는 데 있었으니까. 아직 동의도 다 구하지 못했다만, 솔선수범해야지.”

빅토리아 대공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대로 항구가 끝도 없이 막혀 있으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루덴도르프 항구를 근거지로 삼아 먹고사는 사람들뿐이야.”

“빅토리아 전하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자상하시네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원래 저희가 지급 보증을 하기로 했으니, 이번에 루덴도르프 항구를 정상화시키는 것도 저희가 하도록 할게요.”

“정말이니?”

“빅토리아 전하께서 선주 연합의 보험을 감당하기로 하셨는데, 저희라고 해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클레어는 비스마르항에서 인양 전문가를 찾아 보내겠노라고 말했다.

“물론 비용도, 보험금도, 최종적으로는 루덴도르프 후작가에게 청구할 거예요. 하지만 다행히도 남편의 용돈 지갑이 놀랄 만큼 빵빵하니, 저희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받아 내면 돼요.”

“역시 인심은 금고에서 나오는 거야.”

빅토리아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처음부터 제가 제안드렸던 일인걸요.”

그리고 판을 깐 것은 자신이다. 거기에서 누가 무엇을 했든 간에, 일부는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특히 빅토리아 대공이 걱정하는 것처럼, 항구에 기대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말이다.

그때 집사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마님, 루덴도르프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아, 헤르만 경이 마중 나온 모양이네요.”

클레어는 들어오게 하라고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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