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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5/263)

146화

헤르만은 비단으로 만든 동백꽃을 세 송이 들고 들어왔다. 그의 프록코트에도 같은 꽃으로 만들어진 부토니에르가 꽂혀 있었다.

“담소 나누시던 중에 방해했습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빅토리아 대공과 클레어, 요안나에게 각각 동백꽃을 한 송이씩 건네고, 손등에 키스했다.

클레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경은 마지막 날까지 방심할 수가 없군요.”

“할 일 없는 사람이니 숙녀분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도 해야지요. 저희 집에서 요즘 동백꽃을 솎아 내는데, 그 꽃을 보다 보니 공작 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해 놓고 덧붙였다.

“블룸 남작님도.”

“동백꽃이 클레어 님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저도 생각하지만, 저요?”

“겨울 꽃은 고난을 뚫고 피는 법이니까요.”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지난번에 제가 충고하지 않았던가요?”

“저는 아무한테나 아무 의미도 없이 그러지는 않습니다만. 요안나 양은 충분히 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 말이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요안나가 꽃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헤르만이 미소를 지었다.

“밖에 벌써 짐을 실어 나르고 있더군요. 떠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으니까요. 여행치고 한곳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어요. 친구가 배를 태워 주겠다고 초대했으니, 이 기회에 그쪽으로 갈 작정이에요.”

“엘리엇 경이 배 타는 걸 아주 기대하고 있겠군요.”

“어제 잠을 설칠 정도였죠.”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갈 거지만 빅토리아 대공께서는 좀 더 이곳에 머무르시기로 했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어요.”

“아, 말씀은 이미 들었습니다. 대공 전하, 진짜로 이 집으로 거처를 옮기실 생각입니까?”

“자작나무 별관에 더 있기도 민망해지지 않았는가?”

빅토리아 대공이 씁쓸하게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영주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특별히 후작가와 교류를 많이 가진 것은 아니었다.

“뭐, 저는 제가 방문하면 되니까요. 대공 전하께서라도 루덴도르프에 오래 머물러 주시면 제가 기쁠 겁니다.”

“자네가 방문하는 게 내게도 즐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집안 사정도 있는데 굳이 애쓸 필요 없네. 아마 선주 연합을 나에게 소개시켜 준 것 때문에 후작에게 미움받았을 테지.”

“어차피 아버진 절 미워하십니다.”

헤르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냥 대공 전하의 총애를 받는 쪽이 제게는 더 즐거운 일이지요.”

그런 솔직함이 빅토리아 대공에게는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집사가 클레어를 찾았다. 짐을 싣는 문제로 확인할 것이 있다고 하여,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르만이 그녀를 뒤따랐다. 안 그래도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정원으로 나갔다.

“언제 출발하십니까? 제가 기차역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기차역에 에리히가 나와 있을 텐데요?”

헤르만의 웃음에 조금 금이 갔다.

“떠나시는 마당에 공작 각하께서 절 더 미워하시진 않겠죠.”

“이제 그렇게까지 노력 안 해도 괜찮아요.”

“예?”

“짐짓 여자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것도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의미예요.”

헤르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놀란 듯이 물었다.

“제가 억지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경은 사람을 썩 좋아하진 않으니까요. 잘 사귄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지요. 탕아 노릇은 여러 가지로 쓸모 있었을 테지만요. 특히, 다른 남자들과 교류하면서 무시당하지 않을 수단으로.”

이번에야말로 헤르만이 침묵했다.

“부인께서는 자신이 매력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헤르만 경의 경우는 또 다른 문제잖아요. 이제 괜찮아요. 판은 모두 깔렸고, 남은 것은 시간뿐이니까.”

“…….”

“그나마도 경 자신이 당겨서 더 짧아졌죠.”

오랜만에 헤르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자 그 밑에서 드러난 것은 우수에 찬 얼굴이었다.

클레어는 그가 감정을 다스릴 때까지 기다렸다.

“저는 아주 발이 넓습니다. 사람을 사귀고 노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것도 일종의 재능이지요. 브뤼닝 백작은 경의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인가요?”

“솔직히, 수도의 사교 클럽에 자주 드나드는 남자 중에 제 친구가 아닌 사람은 드뭅니다.”

그 누구도 특별하다고 특정 지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헤르만은 고향에 돌아온 뒤로 수없이 많은 편지를 썼다. 알베르트 브뤼닝의 귀에 들어간 정보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적어 보낸 이야기들이 갖는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가 보낸 신호 또한 알아챘으리라.

클레어가 가만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말했다.

“만일에 그게 또다시 빚이 된다면.”

“예.”

“어떻게 할지 같이 생각해 보죠. 그러니까 언제든 연락하세요.”

별말도 아닌데, 헤르만은 그때 갑자기 심장이 갈비뼈 언저리로 내려가는 것 같은 기묘한 출렁임을 느꼈다.

목구멍에 걸려 있던 큰 덩어리를 억지로 삼켜 배 속으로 내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표정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클레어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않나요? 설마 내가 딜러처럼 공평하게 패를 돌린 거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아닙니다.”

“브뤼닝 백작 정도는 알아서 잘 정리할 거라고 믿어요. 어쩌면 거기까지 손쓸 필요조차도 없을 것 같지만.”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이 너무 매정한 것 같아 한마디 덧붙였다.

“일이 없어도 연락하세요. 친구 없는 우리 남편과도 좀 놀아 주고.”

“하하. 공작 각하께서는 절대 절 반기지 않으실 겁니다.”

“으음. 부정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게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부족할 때라면 더욱 좋고요.”

헤르만은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심장은 여전히 가슴이 아니라 배 안에서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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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브뤼닝은 경쾌한 태도로 휘파람을 불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넉넉한 호주머니는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이제 곧 손에 굴러들어 올 이익도 그랬다.

“자.”

그는 스위트룸 거실로 들어서면서 고용인들에게 손가락으로 금화를 하나씩 튕겨서 던져 주었다. 하인들이 허둥지둥 그것을 주웠다.

비서가 정중히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보험금을 대신 지불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시작하신 사업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내일 중으로 전권 대리인이 도착한다는데, 약속을 잡을까요?”

“돈으로 준다던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일부는 바로 인양 비용으로 쓰고, 일부는 선원들에게 지급할 겁니다.”

“그렇군.”

자신에게 한꺼번에 주는 게 훨씬 낫지만, 어차피 나가야 할 돈이니 그렇게 한다고 해도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아쉽긴 하지만, 빨리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루덴도르프 후작가에서 제때 돈을 받아 내는 건 이미 그른 일이었으니까.

“다른 건?”

“별다른 건 없습니다.”

“흠.”

브뤼닝은 소파에 털썩 앉아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비서의 손에서 편지 뭉치를 받아 직접 발신인을 확인했다.

오늘도 헤르만에게서 온 편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느긋한 태도로 생각했다.

‘서둘러서 딱히 좋을 게 없긴 하지. 남의 의심을 살 수도 있고.’

그는 루덴도르프 후작이 만든 어리석은 보험 조항을 보자마자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깨달았다.

그리고 헤르만이 그 내용을 제게 편지로 적어 보낸 이유도.

물론, 그는 그 내용을 자신에게만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장 빨리 움직였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때마침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다.

‘후작은 정말 어리석군. 바로 장남이 배신자인 줄도 모르고 말이야.’

폐기 직전의 낡은 배를 공짜로 새 배로 갈아 치우고, 추가적으로 약간의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신용에 다소 손실이 있었으나,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배는 제때 도착했고, 사고의 원인은 루덴도르프 항구의 운영이 나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브뤼닝은 신용과 사업 계획으로 자재 공급권을 따낸 것도 아니었다. 그때 이용한 인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신용보다는 헤르만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 쪽이 우선이었다. 이런 기회는 두 번은 오지 않으니까.

‘뭐, 후작으로 만들어 주는 건데, 내게 철저히 은혜를 갚아야지.’

그 얄미운 미남을 어떻게 써먹을까를 생각하며 브뤼닝은 느긋하게 시가를 한 모금 빨았다.

그때 호텔 지배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방문 카드에는 이름 대신 연꽃 무늬의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브뤼닝은 숨을 들이켰다.

“모두 물러가라.”

비서와 하인들은 놀랐으나 그것을 태도에 드러내지 않았다.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갔다. 브뤼닝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옷차림을 단정하게 했다.

곧 손님이 안내되었다. 아무 특징 없는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남자는 검은 실크해트를 가볍게 들어 브뤼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브뤼닝 백작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지 않았다. 브뤼닝도 굳이 묻지 않았다.

검은 연꽃 도장이 찍힌 방문 카드는 황후의 비공식적인 사자라는 뜻이다.

그런 자들이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 봤다는 사람은 브뤼닝 주위에는 아직까지 없었다.

“최근에 백작님께서 하신 몇 가지 일에 대해, 어떤 분께서 궁금해하셔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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