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6/263)

147화

『충실한 아우구스타에게.

지난번에 네가 편지와 함께 보내 준 마음은 잘 받았다. 돌이켜 보니, 내가 네 선물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가 보답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지.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앉아 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이 자리에 네가 함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귀향은 오랜만인데, 잘 쉬고 있는지.

세월이 많이 흘렀어. 20년도 넘은 옛일도 마음속에서는 마치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지만, 옛날에 지내던 방의 가구는 흰 천을 덮어 곱게 놓아두었더라도 그때와는 느낌이 다를 테지.

고향 집의 동백꽃은 그대로일까?

진실한 마음을 담아.

마르고트.』

아우구스타는 이미 세 번은 읽었던 편지를 한 번 더 읽고, 반으로 접어 도로 봉투에 넣었다.

편지함에 넣을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만두었다. 대신 그녀는 그것을 손수건에 싸서 손가방에 넣었다.

겉으로는 별것도 없는 다정한 안부 편지였으나, 이 며칠 동안 전해진 여러 보고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가 본다고 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아우구스타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아우구스타 자신조차도 헷갈릴 때가 있었다.

쾅쾅!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시녀가 당황하여 아우구스타를 바라보았다.

“가방을 챙겨서 먼저 나가거라.”

“네, 아우구스타 님.”

시녀가 공손히 말하고 하녀들을 재촉했다. 하녀들이 짐 가방을 들고 나갔다.

체류가 예상외로 길어지긴 했지만, 애초에 올 때 가벼운 몸으로 온 탓에 돌아갈 때의 짐도 많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녀가 나가면서 복도에 있는 루덴도르프 후작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올렸다.

루덴도르프 후작은 그 인사에 마주 응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뛰어들듯이 아우구스타의 방으로 들어왔다.

“누님!”

“소란스럽구나.”

“이렇게 갑자기 떠나신다니, 정말입니까?”

짐 가방을 든 하녀들이 나가는 것을 보았으니 진위는 확인할 필요 없을 텐데도, 후작은 당황하여 그렇게 물었다.

“더 오래 여기 있을 이유도 없지 않니? 황후 폐하께서도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하시니, 돌아가야지.”

아우구스타는 꼿꼿한 자세로 선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군요. 그러면 돌아가셔야지요…….”

“아쉬운 체할 필요 없다, 클로트비히.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고, 그에 적절한 결정도 이미 내렸으니까.”

루덴도르프 후작이 눈을 굴렸다. 아우구스타는 씁쓸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가 여기까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다른 귀족들처럼, 규모가 줄어든 영지와 수입을 가지고 그럭저럭 제 한 몸 인생 끝날 때까지 살았을 것이다.

아니다. 사실 규모에 맞게 살림을 꾸리면서 살 것 같진 않았다. 허세를 부리고 빚을 잔뜩 져서 파산한 다른 가문과 그리 다를 바 없었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그 파멸은 조용히, 제 몫에 어울리는 수준으로 이루어졌겠지.

‘내가 한 일이니, 내가 정리하는 게 옳지.’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브뤼닝 백작은 소송을 취하할 거다.”

“아!”

후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역시 누님이 조치해 주셨군요! 하긴, 제깟 놈이 뭐라고 우리 가문에게 소송을 건단 말입니까?”

“브뤼닝 백작가도 제법 오래된 로멜 귀족가다, 클로트비히. 황후 폐하께서는 딱히 우리 가문의 편을 들어 주신 건 아니야.”

아우구스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덴도르프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요즘에 들을 수 없었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가문에는 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

아우구스타는 검은 연꽃이 보내온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알베르트 브뤼닝은 꽤 대가 셌다. 단순히 구슬리는 것만으로는 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인할 수 없었기에, 자백제를 세 개나 사용했다.

『브뤼닝 백작은 헤르만 루덴도르프와 같은 폴로 모임에 소속되어 있으며, 친분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헤르만 루덴도르프가 직접 종용한 바는 없습니다.』

헤르만이 쓴 편지 중 수십 통의 사본이 이미 황후의 손에 들어갔다.

그 편지는 마치 연못에 잉어 밥이라도 던지듯 부정확하고 얕은 정보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브뤼닝 백작은 루덴도르프의 뒤에 자신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게 그 떡밥을 물었다.

아니, 그걸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떼돈을 벌고, 잘하면 후작가 하나를 휘어잡을 수 있는 기회를 왜 놓친단 말인가.

‘헤르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아우구스타는 하루 동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건 그냥 루덴도르프 후작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헤르만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이다.

하필 상대가 귀족이라 권력으로 짓뭉갤 수 없었고, 소송도 재판소에 정식으로 올라갔을 뿐이다.

놀랄 만큼 마음이 차가웠다.

‘루덴도르프는 실패였어.’

아우구스타가 바랐던 것은 루덴도르프가 전통 있는 로멜 귀족으로서 되살아나, 황후의 주요 지지 세력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계속해서 이쪽의 자원을 빨아먹다가 로멜 귀족 중에서도 어리석은 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아우구스타의 실책이다.

만일에 자신의 가문이 아니었다면, 황후는 이미 가혹한 제재 조치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럴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은 단순히 로멜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사업을 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덴도르프에 애초부터 항구 증축 사업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꼭 필요한 위치였다면, 먼저 영주를 쫓아내고 쓸 만한 사람을 심는 사전 작업부터 시작했으리라.

하지만 황후는 이런 거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아우구스타는 루덴도르프를 어떻게 할지 직접 결정할 수 있었다. 황후의 사자들은 보고서를 모두 그녀에게 보냈다.

그것이 황후가 포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리누스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마음’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물론 기회가 있다고 해서 그걸 마음껏 쓸 수는 없었다. 주군이 금지한 일만이 아니라 실망할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타는 자신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15년 전의 그녀였다면, 어떻게든 가문을 살려서 황후의 밑으로 데려가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실망감은 너무 깊었다.

자신이 그리워하던 것은 옛 시간이지, 이 장소가 아니다.

황후의 말이 옳다. 20년도 훌쩍 넘어 30년에 더 가까운 옛 추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맞지 않는 옷처럼 이 집의 방은 더 이상 그녀에게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버릴 때였다.

“내가 떠나도 별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먼저 내준 보험금 문제도 내가 대신 교섭해 두었다.”

“아, 역시 누님밖에 없으십니다.”

“돈은 결국 갚아야 해. 몇 개 상단을 통해 빚을 먼저 갚고, 그쪽에는 장기간에 걸쳐서 나눠서 갚을 수 있도록 부탁해 두었는데, 자세한 사정은 호르스트와 재산 관리인에게 말해 두었으니 확인해 보거라.”

“예.”

후작은 이제 완전히 안심한 듯한 얼굴이다. 거무죽죽했던 얼굴색이 평소의 빛깔로 생기 있게 돌아올 지경이었다.

“클로트비히.”

아우구스타는 낮은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그리고 아까부터 손가방에 그냥 넣을까 말까 고민했던 향합을 테이블에 그냥 내려놓았다.

“이걸 주마.”

“예?”

“별건 아니다. 잠이 안 올 때 내가 쓰는, 가벼운 수면 효과가 있는 향인데.”

아우구스타는 다정한 말씨로 말했다.

“안에 심지가 있으니 불을 붙이면 된단다. 안색이 안 좋구나.”

“아, 감사합니다. 실은 제가 잠을 설친 지 며칠 됩니다. 누님에게 그런 것까지 걱정을 끼치다니…… 부끄럽습니다.”

후작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아우구스타는 냉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우구스타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루덴도르프 후작 부인이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을 때, 호르스트가 창가에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르스트, 왜 그러니?”

“아.”

호르스트가 시선을 돌렸다. 그 얼굴은 창백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후작 부인은 창가로 다가갔다. 정원에 헤르만과 코넬리아가 있었다. 헤르만은 막 외출에서 돌아온 듯,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두 남녀는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코넬리아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후작 부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호르스트가 먼저 말했다.

“괜한 말씀 마십시오.”

“호르스트.”

“형님은 원래 여자에게 친절합니다. 어머니도 가끔 꽃을 받으셨잖아요. 그리고 코넬리아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호르스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 갈라진 목소리의 나머지 반쪽은 고통스러운 말을 속삭였으나,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될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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