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7/263)

148화

호르스트가 헤르만의 거실을 방문한 것은 몇 시간 뒤의 일이다.

가신 둘이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소후작님.”

둘 다 호르스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신들도 벌써.’

호르스트 앞에서 달아나듯이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났다.

호르스트는 거실 문을 한 번 두드렸다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열었다.

“호르스트.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벽난로 앞에 서 있던 헤르만이 놀란 듯이 물었다. 가신들과 호르스트가 이 앞에서 마주친 것을 알았을 텐데, 그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어쩌면 이미 대세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실에서는 사과와 알코올 향이 뒤섞인 냄새가 퍼져 있었다. 벽난로에 작은 주전자가 걸려 있었다.

“글루바인을 직접 만들고 있었어?”

“그런 기분이라서.”

“그런 기분이 어떤 기분인데?”

헤르만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고작 글루바인에 취한 것도 아닐 텐데, 어딘가 설렌 듯 홀린 듯 달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이삼 일만 지나면 잊을 거다.”

호르스트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마 10년 전의 자신이, 아무도 없는 방에서 꼭 그런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형의 약혼녀를 만날 때마다.

하지만 헤르만은 소년 시절의 저보다는 훨씬 침착했다. 그는 침실로 달아나거나 어색하게 시선을 떨구는 대신에 쾌활하게 말했다.

“앉아라.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너한테도 한 잔 줄 수 있어.”

호르스트는 불편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헤르만은 주석 잔을 꺼내 음료를 따랐다. 호르스트는 따끈따끈한 잔을 받아 손가락 끝을 녹였다.

“요즘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가 봐?”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된다, 호르스트. 상황이 상황이니, 다들 불안해하는 거지. 너도 굳이 내 방까지 찾아온 건, 아버지와 상의해도 더 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거고.”

호르스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모님이 급한 건 다 막아 주셨어. 브뤼닝 백작이 소송을 취하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랬었군. 클라우제너에서 보험금을 먼저 지급해 주기로 했다지만, 그것만으로 쉽게 물러날 친구가 아니라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헤르만이 말하다 말고 호르스트를 보고 말했다.

“날 의심하고 있구나.”

“브뤼닝 백작은 형의 친구라면서.”

“친구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린 개처럼 군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아마 내게 구둣발을 핥게 하기 위해서라면, 배 한 척쯤은 예사로 바다에 처박을 거다.”

그 말로 헤르만은 자신이 한 일을 완곡하게 긍정한 셈이었다.

“형은 그걸 친구라고 부르나?”

“구둣발을 핥게 해 달라고 매달릴 수조차 없는 상대가 세상에는 훨씬 많으니까.”

호르스트는 기이한 기분으로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남의 구둣발을 핥겠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헤르만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안색이 화사하다고 해서 로멜 귀족답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감정을 제어하고 표정을 숨기는 것이 귀족적인 것이라면, 그가 훨씬 자신보다 자질이 뛰어나다.

그래서 호르스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덴도르프가 이렇게 된 것은 내 실패 탓이다. 내가 너희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아우구스타는 담백할 정도로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녀가 말한 것은 호르스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루덴도르프를 통해 하려고 했던 일이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직접적으로는 부친이 원인이며 궁극적으로는 아우구스타 자신이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르스트에게는 그 말이 제가 실패작이라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내가 내 동생을 잘못 봐서 너희에게까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떠안겼다.]

[고모님…….]

[클로트비히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안고 가마.]

아우구스타는 조용한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이 이번에 서명한 보험 조항에 대한 문제는 너희가 이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게다. 항구 공사는 중단되겠지만, 그게 루덴도르프의 책임으로 돌아올 일도 없을 거고.]

[가문과 절연하실 생각입니까?]

[절연이라……. 글쎄. 너희 아이들이 보고 싶긴 할 거야.]

[고모님…….]

[하지만 더 이상 황후 폐하의 것을 나 때문에 루덴도르프에 낭비하고 싶지는 않구나.]

그보다 더 확실한 절연 선언은 없었다.

[나머지 일은 이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려무나. 후계자인 네게도 당연히 가문 경영에 상당한 책임이 있고, 헤르만도 제가 뿌린 씨앗은 스스로 거둬야 할 테지.]

아우구스타는 그렇게만 말하고 떠났다.

아쉬웠지만 호르스트가 이해하지 못할 처사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행동을 목도하고도 끊임없이 퍼다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호르스트에게는 계속해서 실패라는 말이 메아리쳐 돌아왔다.

아우구스타가 루덴도르프 후작가에서 한 일 중 가장 큰 것은 호르스트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실패는 곧 호르스트가 실패작이라는 뜻이었다.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가 가진 것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본래 헤르만의 약혼녀였다.

자신이 실패작이니, 이제 자리의 정당한 주인이 나타날 때가 아닐까.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호르스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코넬리아는 그의 아내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웅다웅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정한 사이였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만, 헤르만이 만일에 코넬리아에게 일부러 수작을 건다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네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기 위해서일 거다.]

아우구스타는 그렇게 말했고, 호르스트도 동의했다.

하지만 코넬리아도 과연 그럴까?

코넬리아는 원래 헤르만을 좋아했다. 헤르만이 꽃과 반지를 들고 방문하여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 그저 어릴 때 어른들이 결정한 정혼이라도 뺨을 붉히고 설레어했다는 사실을 호르스트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러는 동안에 자신은 코넬리아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후계자의 자리에 거론되었을 때 솔직히 가장 기뻤던 것은, 이제 코넬리아가 자신의 약혼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시하고 비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헤르만에게서 후계자 자리를 빼앗은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다,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그런 반면, 거기에 걸려 있었던 것이 코넬리아와의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비열한 짓을 해서라도 그 자리를 움켜쥔 채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모두 의미 없는 짓이다. 

누가 누구를 원했든, 결혼은 이미 성사되었다. 이제 와 자신이 루덴도르프를 헤르만에게 돌려준다고 해도, 거기에 코넬리아가 포함될 일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배 속에 있는 건 자신의 아이다.

비록 열정이 일방적인 것이라 한들.

그렇지만, 그릇된 생각이 강박처럼 머릿속을 헤집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쓴 물 때문에, 달고 따뜻한 음료로 입 안을 적셔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헤르만이 다시 물었다. 호르스트는 해서는 안 될 질문을 입 안에서 수도 없이 굴렸다.

코넬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어떤 의혹은 아예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한 법이다. 연못 바닥을 일부러 휘저을 필요는 없다.

실은 코넬리아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루덴도르프의 후계자였고, 지금 중요한 것은 가문을 장악하는 일이다.

그는 글루바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잔은 어느 틈에 비어 있었다.

이것보다는 술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쾅! 쾅쾅!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헤르만이 물었다. 문이 콰당 열렸다. 뛰어 들어온 것은 부집사였다.

“헉, 헉, 두 분 함께 계셨군요. 급합니다. 주인님께서!”

“아버지에게 무슨 일 있나?”

호르스트는 당황하며 물었다.

“주인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호르스트와 헤르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부집사가 두 사람을 후작의 침실 쪽으로 인도했다.

이미 주치의가 후작을 진찰하고 있었다. 침실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어서 온통 추웠는데도, 달콤한 향내가 실내에 감돌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가 대답했다.

“아편 과용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하셨을 겁니다.”

호르스트는 경악하여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야에 헤르만이 똑같이 놀라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할까요, 소후작님?”

그가 후계자였기에 의사가 그렇게 물었다.

호르스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타가 안고 가겠다는 책임이었다.

후작이 비록 술과 담배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연잎 궐련조차 피운 적이 없었다. 아우구스타가 아편도, 진정제도, 진통제마저도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호르스트는 이제 자신이 그 사실을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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