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단순히 아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손해를 감수하며 날짜를 미뤄 준다는 건가?”
“안다는 건 신용이 있다는 뜻이지. 게다가 빅토리아 대공 전하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과도 친분이 있으니까.”
헤르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고귀한 숙녀와의 친분이라는 건 종종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되지.”
호르스트는 묘한 기분으로 헤르만을 바라보았다. 헤르만이 하는 말의 의미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의 이름으로 신용을 대체할 수 없다면, 스스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헤르만은 가문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것을 구축해 왔다는 것이다.
호르스트는 그가 구두를 핥을 기회조차 흔하지 않다고 말한 의미도 이해하고 말았다.
그가 부친 밑에서 실무를 해 온 자신보다 훨씬 더 세상에 익숙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군.”
호르스트는 짧게 중얼거렸다. 인정해 버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가신들이 헤르만을 찾아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번엔 형의 용건을 들어 보고 싶은데.”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에게서 항구의 투자를 약속받았다.”
그가 편지를 흔들어 보였다. 호르스트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호르스트는 눈을 크게 떴다. 부친이 꽤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분을 넘기기로 했어?”
“자금을 차입하는 게 아니라 아예 투자자로 들어오는 거야. 증축 사업은 중단될 테니, 그 자리에 정부 대신.”
“클라우제너 공작가라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 안 돼.”
“우리 측 지분을 담보로 차입금도 들여올 거야. 수도를 거점으로 한 대형 상단의 주인들이나 후계자들과도 친분이 있어서.”
“형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어?”
“고개를 많이 숙여야 하긴 했지만, 중요한 사람에게 빚을 지는 것도 인연을 쌓는 법이지.”
아무 사이도 아닌 것보다는 그게 낫다고 헤르만이 말했다.
호르스트가 그를 바라보고 말했다.
“형은 정말로 인맥이 넓군.”
“지금까지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날 책망하는 거야?”
“설마. 너도 네 처지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걸 나도 알지.”
호르스트는 그 말에 심장이 불안하게 덜컹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헤르만이 알고 있을까 봐.
그건 오히려 후계자의 자리를 탐냈다는 것보다도 더 더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늘 이미 결정했던 일을 되새기고 침착성을 되찾았다.
“지금 형이 가져온 모든 조건은, 형이 작위를 계승할 경우에 유효한 거겠지?”
“그야, 작위를 얻지 못한 장남은 가문을 떠나는 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헤르만은 전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클레어는 그의 억울함을 알아주었다. 울분도. 사교적인 웃음과 습관적인 다정함 밑에 숨기고 있는 것도 꿰뚫어 보았다.
그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빼앗겼다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그것이 제 인생을 모조리 헤집어 놓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박탈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덴도르프 후작가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물론 클레어가 그에게 처음 편지를 썼던 목적을 생각하면, 그는 작위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 중 하나로 여길 수 있었다.
호르스트가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가신들은 전부 형의 편이겠군. 그러면 상속 소송을 걸어도 내가 질 가능성이 월등히 높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황후 폐하께서도, 고모님도 지켜보고 계실 테니. 게다가 이 이상 불명예스러운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도 않고.”
헤르만이 나직하고 예사롭게 중요한 제안을 했다.
“네가 물러난다면, 지금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의 절반과 장원 두 개, 가게른 광산의 지분 전체를 넘기마.”
“빚은 전부 형이 떠안고?”
“루덴도르프 가문의 빚이니, 당연히 루덴도르프 후작이 책임져야지.”
헤르만이 말했다.
“가게른 광산의 개발도 재개될 거다. 이번에 크로지크에게 넘어간 지분의 일부를 델포드 남작가가 인수했으니까.”
“공작 부인이.”
“그런 셈이지.”
“하, 하하.”
호르스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부친이 그렇게 바라던 클라우제너의 투자를 결국 헤르만이 받아 온 셈이다.
그러다가 웃음을 뚝 그치고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었다.
“내가 물러나는 게 순리겠지.”
“호르스트.”
“원래도 코넬리아와 나는 가게른 남작령으로 갈까 했어. 외삼촌에게도 연락했고. 나는 꼴 보기 싫지만, 어머니와 코넬리아는 기꺼이 환영해 주시겠다더군.”
“그렇군.”
“형도 예상했던 것 아니야? 그러니까 가게른 광산의 지분까지 해결해 둔 거고.”
“그러라고 권할 작정이긴 했다. 루덴도르프의 상속권을 포기하더라도 가게른 남작가의 후계자는 너이니까.”
“…….”
“분하냐?”
“아니.”
호르스트는 허탈하고 시원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진짜로 원하는 것은 모두 얻었고, 원래 제 몫이었던 자리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실은 헤르만의 동정이 뼈를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자신의 무능이 그대로 증명된 꼴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가족의 삶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코넬리아가 바라는 것이 아이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키우는 것이라면, 그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루덴도르프 후작가 따위는 내버릴 수 있었다.
“나에게는 코넬리아도 있고, 아이도 있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 재산 분할은 고맙게 받겠어.”
“하.”
헤르만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경고하듯이 말했다.
“너 때문에 주는 게 아니야. 코넬리아와 곧 태어날 조카를 위해서 주는 거지.”
“…….”
“왜?”
“형은, 코넬리아를 어떻게 생각해?”
“너 같은 놈을 거두느라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지.”
“…….”
“좋아하면, 잘해라 좀. 어릴 땐 원숭이처럼 쫓아다니면서 관심 달라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더니, 이제는 남자 노릇 한다고 외롭게 만들고 말이야.”
헤르만이 혀를 찼다.
“너는 코넬리아에게 남은 평생 미안해해야 해. 후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외롭게 한 걸로.”
“……코넬리아가 외로워한 걸 형이 어떻게 알아?”
“눈 달린 사람이면 그걸 누가 몰라. 네가 교섭이다 뭐다 해서 날마다 집을 비우니까, 홑몸도 아닌 몸으로 이 날씨에 자꾸 정원에 나와 있는 거지.”
호르스트가 무심코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헤르만이 등받이에 몸을 젖혀 기대며 오만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인장 반지나 가져와. 상속 포기 서류에 서명하고.”
호르스트는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속 포기 서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 이름을 채우고 서명했다.
그리고 손가락에 맞지 않아 중지에 대강 걸치고 있던 부친의 인장 반지를 빼서 헤르만에게 넘겼다.
헤르만이 그것을 봉투에 넣어 봉했다.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돌아왔다.
만족감과 동시에 아쉬움도 들었다.
만일에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됐다면, 지금쯤 사모하는 귀부인을 기쁘게 하려면 무슨 색 꽃을 사야 할지, 즐거운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 삶이 즐거웠으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이 며칠 사이의 일이다.
물론, 그것보다는 인장 반지를 바치는 쪽이 훨씬 충만하리라.
호르스트는 그가 혼자 빙그레 미소 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코넬리아에게. 서재에서 달리 챙길 건 없으니까 이대로 형이 쓰면 돼.”
헤르만이 그를 올려다보고 미소를 지었다.
“정원에 동백꽃이 딱 예쁘게 피었더라. 그거라도 갖고 가라.”
“충고는 필요 없어.”
호르스트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섰다.
헤르만의 말이 옳았다. 봉오리를 한 차례 솎아 낸 정원의 동백나무에 커다란 꽃송이가 만개해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제일 크게 핀 꽃 한 송이를 따서 조심스럽게 손안에 감쌌다.
그리고 코넬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처소로 향했다.
35. 잊힌 사람
늦은 오후였지만 클레어는 아직 침대 속에 있었다. 배는 아프고 몸은 찝찝하고 눈꺼풀은 떨어지지를 않았다.
새벽부터 피의 축제가 벌어졌다. 평소보다 열흘 가까이 늦었다.
‘으…….’
클레어는 맥을 못 추고 미지근해진 물주머니를 끌어안은 채 널브러져 눈을 감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잤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이 시기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이었다.
전생에는 이것보다 덜 괴로웠던 것 같은데.
현대 문명이 정말 그리웠다. 선제적으로 먹어 치우는 효과 좋은 진통제, 배 위에 얹어 놓으면 무게가 딱 좋았던 전기 찜질팩, 말랑말랑하고 커다란 바디필로우.
아니, 생각해 보니 출근을 안 하는 것 쪽이 좋긴 했다.
‘시원섭섭하네.’
열흘이나 늦어서, 이번에는 임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