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딱히 빨리 가질 작정은 아니었다. 벌여 놓은 일도 많고, 느긋하게 태교하기에 좋은 상황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절대 안 된다는 것도 아니었기에, 생기면 낳는다는 정도의 느슨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시기의 피임법 중에 확률 높은 건, 안 하는 방법밖에 없다.
‘생겨도 상관없는 집에 오히려 늦게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결혼식 전까지 합치면, 꽤 늦는 편이다.
5년 전 단 하룻밤 사이에 아이가 생겼을 거라고 믿고 따지러 왔던 에리히가 약간 웃겨졌다. 본인이 스나이퍼쯤 될 줄 알았던 모양이다.
놀려 볼까?
혼자서 별것도 아닌 농담을 생각하다가, 그것도 지쳐서 클레어는 도로 널브러졌다.
그때 문이 달칵 열렸다.
클레어는 물주머니를 갈아 주려고 온 마사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는데,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잉크 냄새가 나는 손끝이 잇새를 가볍게 벌리더니, 얇은 초콜릿 하나가 밀고 들어왔다. 클레어는 그것을 받아 우물거리면서 눈을 떴다.
에리히가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뭐 하는 거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그가 미지근해진 물주머니를 클레어의 손에서 빼내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안겨 주었다.
이건 좀 좋았다.
출근을 안 하는 것에 이어, 출근 안 하는 남편이 있어서 초콜릿도 갖다주고, 물주머니도 갖다주고.
혼자 있을 때도 마사가 잘 챙겨 주긴 했지만 말이다.
“일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잠깐 윌리엄에게 출항이 어찌 되려나 물어보고 왔어. 더 자지 그래?”
“잠이 안 와요.”
클레어는 그에게 옆에 앉으라고 베개를 탁탁 두드렸다.
에리히가 슬리퍼를 벗고 순순히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일이 있긴 했지만, 집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접견도 없다.
그냥 침실에 앉아서 편지나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클레어가 그의 허벅지를 쿠션처럼 끌어당겨 베고 누웠다. 시트 안이 물주머니 때문에 후끈거렸다.
“윌이 뭐래요? 나 때문에 일정 늦어진 건 아니죠?”
“루덴도르프 항구 쪽 배가 대부분 비스마르항으로 몰려서 입항도, 출항도 모두 밀리고 있다더군. 윌리엄도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나 보던데.”
“당신 힘으로 어떻게 안 돼요?”
“지금 이거, 날 시험하는 건가?”
에리히가 입을 다물라는 소리 대신 초콜릿을 하나 더 클레어의 입에 물렸다. 클레어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음. 아뇨. 진짜로 그냥 물어본 건데.”
“출항 순서를 당기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는 듯해. 보급품도 빠듯하다고 하니.”
“아아, 하긴.”
“게다가 엘리엇이 있지 않나. 윌리엄의 배 중에 그나마 선실이 갖춰져 있는 건 화물선이라는데, 우리는 그렇다 쳐도 아이를 그냥 태우기에는 신경 쓰이는 모양이야.”
클레어는 짧게 신음했다.
“차라리 어선을 타고 조금만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게 구경하기도 괜찮을 거 같은데.”
“윌리엄에게 생각이 있겠지.”
“하긴……. 그걸 몰라서 준비를 한다는 건 아닐 테니.”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출항 준비 시간이 이 정도로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아예 별장에서 늦게 출발할 걸 그랬다.
“덕분에 네가 컨디션이 나쁜 채로 배를 타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않나?”
“그렇긴 하네요.”
일회용이 없는 시대, 바다 위에서 세탁물을 생산해 내고 싶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아쉽지는 않을까?
엘리엇을 자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과, 진짜 자기 자식을 갖는 것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없을까?
시기를 늦추자는 데는 서로 동의했으나, 현실과 별개로 서운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
클레어의 시선을 눈치채고 에리히가 내려다보았다. 새삼 눈매가 깊어 보여서 클레어는 조금 설렜지만, 굳이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허벅지를 탁탁 두드렸다. 바디필로우로 쓰게 좀 누워 보라는 뜻이었으나, 에리히의 꼿꼿한 허리를 구부리게 하지는 못했다.
사실 낮에 그를 침대에 눕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예 벗겨서 이불 속으로 끌어들이는 건 쉬웠지만.
대신 클레어는 고개를 돌려 이마를 비볐다. 그럴수록 근육이 단단해져서, 힘 좀 빼라는 뜻에서 그녀는 다시 탁탁 에리히의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렸다.
“클레어.”
에리히가 예민한 태도로 그녀의 머리를 밀어냈다. 괜히 웃겨서 그녀는 킬킬 웃었다.
“당신도 많이 컸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10년 전에는 내가 월경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고 버럭거렸잖아요.”
“……미혼의 숙녀가 남자를 상대로 함부로 그런 단어를 입에 담는 건 부주의하다고 주의를 준 거지.”
“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생리 현상으로 아픈 건데 말 못 할 건 또 뭐예요?”
“…….”
“그리고, 그걸 내가 말하고 싶어서 했나? 어디가 아픈 건지 말할 수도 없으면서, 꾀병 부리면서 소파에 온종일 드러누워 있지 말라고 찔러 댄 게 누군데.”
“…….”
“지금은 말해도 괜찮나 봐.”
그녀의 입을 도로 막으려는 듯이 초콜릿이 하나 더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하나 더.
이거 씹어 먹는 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제 나에게는 말해도 상관없지.”
에리히가 뒤늦게서야 나직하게 말했다. 클레어는 데굴 돌아누워 그를 도로 올려다보았다.
“흠.”
“뭐가 흠이야.”
에리히가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사나운 얼굴이 클레어에게 통한 적은 없었고, 이제는 속이는 것도 좀처럼 되지 않았다.
“흐으으으음?”
“그건 확실히 네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거지. 남편도 아닌 남자를 상대로, 월경 같은 건 입에 올릴 단어가 아니야.”
“뭐, 어쩌겠어. 옛날 사람이니, 내가 참아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에리히가 또다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클레어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기고 도로 몸을 굴려 이번에는 복근에 얼굴을 비볐다.
뭐라 한들 별로 상관없었다. 요점은 초콜릿과 뜨끈뜨끈한 물주머니와 말랑말랑 대신 만지면 단단해지는 따뜻한 바디필로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근을 안 한다는 것과.
“클레어.”
에리히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불렀다. 클레어는 그러든가 말든가 침대 위에서 굴렀다.
얼마 후에 집사가 편지 뭉치가 놓인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에리히는 그걸 손 닿는 곳에 놓고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끙끙거리는 클레어의 이마를 한번 가볍게 쓰다듬고, 편지 뭉치를 끌어당겼다.
삭, 삭, 소리를 내며 그가 편지 봉투를 넘기는 소리를 듣고 클레어가 도로 눈을 떴다.
“그냥 자. 특이한 소식이 있으면 깨워 줄 테니.”
“내 거 읽어 줘요.”
“이제 아주 당당하군.”
“내 편지 낭독하고 싶어 한 건 당신이잖아요.”
“동화책 대신 읽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리히는 순순히 클레어 앞으로 온 편지를 뜯었다.
“크로지크 백작가에서 소식이 왔군. 가게른 광산에서 네 몫으로 확보한 15%의 지분 이전에 대해서 루덴도르프 후작가와 합의가 이루어졌다는데.”
“음.”
“투자금을 더 넣을 건가?”
“그래야죠? 내가 갱도를 터뜨렸으니까,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내가 뚫어서 사업을 계속하게 해야죠.”
“크로지크 노백작이 직접 관리하면, 손해가 되진 않도록 잘하겠지.”
에리히가 두 번째 편지를 뜯었다.
“위빙 상단의 에른스트 지부에서, 루덴도르프의 포목상과 의상실에서 후작가가 진 외상값을 모아서 하나의 채권으로 묶어 기한을 늦추는 일을 마무리했다는군.”
“음. 봉투에 책임자 이름 있죠?”
“대표 이름으로 왔지만, 지부 내부에는 업무 담당자가 누구인지 기록이 있겠지.”
“봉투에 나중에 확인하라고 메모 좀 해 줘요.”
“지금 날 네 비서로 쓸 작정인가?”
에리히가 눈을 빗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눈을 감은 채 대꾸했다.
“음, 유능하고 잘생긴 남비서를 두는 건 내 꿈 중 하나였죠.”
“…….”
“잘생겼다니까요.”
“하.”
에리히는 헛웃음을 쳤으나 순순히 세 번째 편지를 뜯었다. 그것은 헤르만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냥 넘기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으나, 봉투의 두께가 상당했고, 그쪽에서 받아야 할 보고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루덴도르프의 상속 문제는 수월하게 마무리되었다는군. 하긴, 아우구스타가 손을 뗀 시점에서 차남 혼자 뭔가를 할 수는 없었겠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면, 애초부터 가문을 그 지경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물러나고, 너무 관대하게 처사했어.”
에리히는 과정을 모두 읽어 주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헤르만 경이 독기가 빠졌더라고요. 그리고 심정도 좀 이해가 가고요.”
“그런가?”
“동생의 아내가 임신 중이잖아요. 코넬리아 부인이 너무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어서, 알거지로 만들어서 쫓아내라고는 못 하겠더라고요.”
클레어가 중얼거렸다.
“후작이 그렇게 죽어 버릴 줄도 몰랐고요. 살아 있었다면, 눈앞에서 세간살이를 몽땅 들어내서 뒷목을 잡게 해 줬을 텐데.”
하지만 당사자가 죽어 버린 마당에, 임부까지 있는 집에서 못 할 일이었다.
“아우구스타가 그렇게 빨리 잘라 낼 줄은 몰랐어요. 루덴도르프를 매개로 그녀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까지 한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번에 적어도 세 곳의 상단이 아우구스타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건 알게 되었지. 보험금을 대신 갚겠다고 했으니.”
“아니, 근데 진짜. 사우스랜드 곡물상이 그쪽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거기는 상단주부터 임원급까지 전부 아렌인이거든요.”
클레어가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과 불쾌감에 패배해서 도로 드러누웠다.
끙끙거리는 클레어의 머리칼을 쓸어 주면서 에리히가 말했다.
“식량과 인력, 그게 아렌에서 제일 기대할 수 있는 건데, 당연히 확보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