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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51/263)

152화

“좀 실망인데요. 콧수염 같은 정신 나간 인종주의자인 줄 알았더니.”

“콧수염?”

에리히가 되물었지만, 클레어는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신 판단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황후가 유능한 정치가인 것처럼 말해서 좀 의아했거든요. 하지만 그 모든 게 단순히 수단일 뿐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획득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능력 있다고 할 수 있긴 하겠죠.”

분할하여 통치하라.

오래된 격언은 대체로 유효한 법이다.

재산을 기준으로 참정권을 부여하는 시대다. 선거권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수도와 그 인근이었으며, 그다음은 공업이 발달한 북부 로멜 지역의 도시다.

수도 로텐부르크 자체도 오랫동안 로멜의 수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투표권을 가진 자의 압도적 다수가 로멜 시민이었다.

정치 권력이 황실 것이 아니라 내각의 것으로 넘어가면서, 가장 빠르게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은 로멜 시민의 환심을 사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로멜인이 우월하다는 주장은 아주 쓸모가 많았으리라.

“뭐, 이제는 헤르만 경이 있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루덴도르프를 통한 프로파간다를 뒤집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자 상속제는 아주 오래된 제도이며 전통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황후는 이것을 뒤집으려고 했었다.

차남에, 더 신분이 낮은 모친 소생임에도 순혈 로멜인을 후계자로 세워 그것이 옳다는 선전을 하려 했다.

성공하기만 했다면, 로멜 귀족과 아렌 귀족 사이의 격차는 지금처럼 재산과 권력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 아니라 통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로멜과 아렌의 결합에서 태어난 아이의 상속권을 후순위로 미룸으로써 그것을 낮은 단계의 귀천상혼으로 만든다. 그러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계급이 된다.

위에서 격차가 벌어지면, 아래쪽의 신세는 더 급격히 처참해진다. 아렌인은 빠른 속도로 이등 시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루덴도르프의 후계자가 다시 장남으로 뒤집히면서 전통은 되돌아왔고, 모친의 출신지 문제는 후면으로 사라졌다.

“그는 잘할 거야.”

“잘해야죠. 헤르만 경이 가문을 살려 내지 못한다면, 결국 아렌인은 그것밖에 안 된다는 두 번째 선전의 희생양이 될 테니까.”

그러면 자신은 무척 실망할 것이다.

저쪽은 이미 아렌 심부에 사우스랜드 곡물상 같은 큰 세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적어도 에른스트 바로 곁에 날카로운 칼을 심어야 균형이 맞는다.

에리히가 말했다.

“수완이 상당하더군. 인맥이 넓은 줄은 알았지만, 교섭 솜씨도 상당했어. 꽤 단시간이었는데도 항구의 지분 정리와 재정 계획에도 나무랄 데 없었지.”

“항구요?”

“그래.”

“당신, 항구의 지분을 인수하기로 했어요?”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눈을 깜박거리던 클레어가 물었다.

“몰랐나? 그게 루덴도르프 후작가 재건의 핵심 사업일 텐데.”

에리히가 내심으로 헤르만에 대한 평가를 두 등급 정도 상향 조정했다. 설득력이 좋아서, 클레어가 조금이라도 손을 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분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게 아니라?”

“그래. 사업에서 황후가 빠지게 될 테니, 그 자리에 투자자로 들어가는 거지.”

클레어는 눈을 깜빡했다.

“와, 진짜 어이가 없네?”

“뭐가?”

“판을 깐 나는 고작해야 탄광 하나의 지분 15%를 얻었을 뿐인데, 당신은 뒤늦게 들어와서 항구를 통째로 꿀꺽했네요?”

원래 가장 큰 덩어리는 자금을 댄 자본가 몫이다. 클레어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공사 시작이야. 결실을 보려면 10년 이상 돈을 쏟아붓기만 해야 할 텐데.”

클레어가 울분을 터뜨리려는데, 에리히가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뛰어들 자본이 있으면, 기꺼이 자리를 양보해 주지.”

“재수 없어. 그럴 능력 없는 거 알면서.”

에리히가 킥,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나도 이익을 생각하고 하는 일은 아니야.”

클레어도 안다. 기간 시설 건설이라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이익을 낼 수 있는 사업도 아니고, 에리히가 끼어든 것은 전에 말한 대로 전략 목표가 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재력과 권력으로 보복할 방법은 없었기에, 클레어는 밉상인 남자를 홱 잡아당겼다. 깔고 앉아 내려다봐 줄 작정이었다.

에리히의 몸이 당기는 대로 주르륵 따라오다가 도중에 뭔가를 깨달은 듯 움찔하더니 그대로 버텼다.

그러나 묵직한 게 들어 있는 작은 봉투 하나가 이미 침대로 굴러떨어진 다음이었다.

그가 다시 그 봉투를 집어 들기 전에 클레어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이거 뭐예요? 수상한데?”

“클레어.”

뭔데 숨기려고 한 거지? 자신이 알면 안 되는 클라우제너의 사무라면 그렇게 말할 텐데, 에리히는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인장 반지가 하나 톡 떨어졌다.

그건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 반지였다.

“…….”

“편지 이리 줘요. 당신, 안 읽은 부분이 있죠?”

에리히가 입을 다물더니, 편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클레어는 그의 주먹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편지를 꺼내려고 꾸물거렸다. 에리히가 지지 않고 손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클레어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리 내놔요, 빨리.”

“싫은데.”

“어허! 비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너는 비서의 무릎을 베고 눕나?”

“말 돌리지 말아요. 이건 협상할 일이 아니잖아요.”

클레어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에리히는 거기까지는 순순히 딸려 왔으나 손가락은 클레어가 펴려고 버둥거릴 때까지 버텼다.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내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진짜로 안 주려고 버텼으면 클레어가 힘으로 손을 펼 수는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결국 줄 거면서 쓸데없는 고집은.”

“…….”

클레어는 눈을 흘기면서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잃었던 13년의 삶을 돌려주신 분께, 되찾은 전부를 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수도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인장 반지로 청혼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진짜 인장은 아니고, 가문의 문장 대신 결혼 서약을 새기거나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아 새로 만드는 모양입니다.

그대로 안주인의 인장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는군요.

반지를 새로 만들어 돌려주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것도 요안나의 것과 마찬가지로, 녹인 뒤 헤르만의 사이즈로 새로 제작해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클레어는 여기까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편지에 적힌 내용에 놀랐다.

그녀는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내가 아니라 당신이 웨딩 트렌드의 선도자가 됐네요?

“…….”

“좋겠어요?”

“유행 따윈 상관없어. 내가 네게 준 것에 관심 갖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

그걸 굳이 인장 반지와 함께 편지에 적어 보낸 놈의 의도가 불쾌할 뿐이다.

물론 루덴도르프를 거두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게 불만스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에리히는 클레어의 손에 깍지를 끼어 누르고, 편지를 빼앗아 구겨서 바닥에 던졌다.

입술을 강탈하듯이 거칠게 키스하며 침대에 누르자 클레어의 몸이 꿈틀거렸다.

“아얏!”

그의 손바닥이 내리누르는 바람에 손 사이에 끼인 인장 반지에 눌려서 아팠다.

신음을 했는데도 놔주기는커녕 손이 더 눌렸다. 클레어는 그의 머리칼을 용서 없이 잡아당겼다.

“내 손바닥에 남의 인장을 찍고 싶은 거면 마음대로 하시고.”

“……넌 정말 골치 아파.”

에리히가 한탄하듯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클레어의 귀를 깨물었다.

귀 뒤부터 쇄골까지, 목선을 따라 자국이 날 정도로 잘근잘근 깨문다. 정말 짜증스러웠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고작해야 루덴도르프 따위에게 신경을 쓰게 되다니.

불쾌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자 클레어가 불평했다.

“그만해요. 아프다니까.”

하지만 그의 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육체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클레어의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클레어의 입에서 기분 좋은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그녀가 기어이 손을 붙들었다.

몸을 찢어 벌려 제 온도를 새겨도 시원치 않을 기분이었으나, 정작 붙잡히면 움직일 수 없는 건 에리히 쪽이었다.

밀어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클레어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그의 손을 아랫배에 댄 채 축 늘어졌다.

“손 따뜻하니 좋네.”

“나더러 빌기라도 하라는 건가.”

“빌어도 안 돼요. 나는 생리 중이라고요. 설마, 지금 불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클레어.”

에리히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클레어가 뻔뻔하게 말했다.

“아픈 아내를 상대로 딴생각 말고 약손이나 좀 해 봐요.”

엘리엇에게서 벌써 아기 손은 약손이라는 쓰다듬을 받아 봤기 때문에 무얼 요구하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진심인가?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클레어가 킥 웃었다.

“당신이 내 배를 쓸어 주면, 나도 좀 만져 주지, 뭐.”

그녀는 관대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에리히의 배에 손을 댔다가 그 밑으로 미끄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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