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것은 지난 5년 동안 프란츠와 고락을 함께해 온 윌리엄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윌리엄은 물론 에리히마저도 숨 쉬는 것을 한순간 잊었다.
이제 이 문제는 지금까지 그가 이해한 것과 또 다른 종류의 것이 되었다.
엘리엇이 사생아가 아니게 된다.
자기들끼리 언약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클레어도 그냥 전해 들었던 것뿐이다. 설령 언약서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비로소 계승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생긴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엘리사가 아렌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언약서가 교회에 제출되었다면, 그것은 혼인 성사를 갈음할 수 있다.
곧, 엘리엇은 황태자의 합법적인 결혼에서 생긴 원손으로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1순위 황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에리히는 다급하게 물었다.
“누가 증인으로 서명했나?”
“마빈 슈나이더와 제 할머니입니다. 제출 일자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당일입니다.”
이번에는 윌리엄이 경악할 차례였다.
자신이 알기로, 가짜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프란츠는 줄곧 자신의 집 벽장에 숨어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가 엘리사를 델포드 타운하우스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그는 언약서를 제출하러 나갔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위험한 짓을……!”
“미안하네. 하지만 꼭 그때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죽은 날짜 뒤에 제출하면 혼인 성사가 무효가 되었을 것이다.
에리히가 물었다.
“제러드의 이름으로 혼인 성사가 치러졌는데, 어떻게 그걸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빈민가에 있는, 사제님 한 분이 관리하는 오래된 교회의 옛날 기록 사이에 남몰래 묻어 두었습니다. 신분 차로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인데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고, 사제님의 증명을 받았습니다.”
아이를 혼외자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 태어나기 전에 결혼 서약을 먼저 하고 싶다는 말에 늙은 사제는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게 되었군요.”
클레어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리히는 그녀를 다시 안으려 했지만, 클레어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클레어.”
“그냥 바람이 좀 쐬고 싶어요. 제가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당신이 나중에 알려 줘요.”
클레어는 에리히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탁.
문이 닫혔다.
에리히는 말없이 문만 쳐다보았다.
뒤따라가야 할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감정에 휘말릴 때가 아니다.
클레어가 감정적인 상태라면 더욱 그랬다. 죽은 이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이 냉정해야 한다.
“프란츠, 그 교회의 위치를 알려 주게.”
“신중하셔야 합니다. 각하께서 움직이시면 황후가 알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서약서의 존재를 알든 모르든, 선배님과 클레어가 아이를 사이에 두고 결합한 시점에서 황후 역시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해.”
윌리엄이 끼어들었다.
“엘리엇이 선배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아렌 혈통의 황위 계승권자이니 이미 적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해도 증거는 확보해야 해. 성사의 주관자인 사제도 찾아서 보호해야겠어. 중요한 증인이 되어 줄 테지.”
“선배님.”
윌리엄이 다시 끼어들었다.
“엘리엇을 황손으로 밝힐 작정이십니까?”
숨길 작정이라면, 구태여 건드리지 않고 지금 이대로 두는 게 낫다.
지금까지도 비밀이 지켜졌다.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만 입을 다물면, 그 언약서는 영원히 묻힐 것이다.
에리히는 잠시 선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클레어가 거기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클레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옳아.”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무적인 대화까지 모두 끝난 것은 오후 늦게의 일이다.
기력을 전부 짜내 쓴 듯, 프란츠는 너덜거리는 얼굴로 물러갔다. 윌리엄은 항해사의 부름을 받아 갔다.
에리히가 갑판으로 나왔을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엘리엇은 누구와 어딜 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수에 클레어가 서 있었다.
노을이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얼굴에도 붉은 빛이 내리쬐고 있을 텐데, 머리칼 탓인지 평소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무표정한 표정에서는 생각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
아니, 에리히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일부와 같은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다만 그 강도와 슬픔의 깊이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클레어.”
그녀가 완전히 자신의 세상으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에리히는 이름을 불러 그녀를 상념 속에서 꺼냈다.
“네 탓이 아니야.”
“나도 내 탓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
클레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안 가네요. 걔는 왜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까요?”
“클레어.”
“아니지, 반대할 줄 알았으니까 그랬겠지.”
클레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윌에게 간 거겠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니 나한테 왔어도 소용없었겠네. 그날 그 애가 죽음으로부터 피해서 달아나고 있을 때, 나는 선배랑 같이 술이나 마시고 키스나 하고 그러고 있었으니까.”
“클레어.”
“집에 있었어도 윌보다 대처를 잘하진 못했을 거고.”
에리히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날 그런 일이 생길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까.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네가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거야.”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클레어가 쥐어짜 내듯이 말했다.
“그게 합리적이었죠. 당신에게 가든, 공왕 전하에게 가든, 엘리사를 숨긴다는 목적에서는 거리가 멀었고, 내가 사실을 알았다면 허점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컸었죠.”
“넌 엘리엇을 무사히 지켜 냈어.”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엘리사가 누구를 만나는지 윌이 알고 있었는데, 나는 몰랐다고요.”
“위험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네가 소개해 줘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아니, 생각해 보니 이것도 당신이 했던 이야기네요.”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클레어는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뺨을 닦았다.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사실 이것도 지나간 지 꽤 된 일이다. 엘리사는 이미 죽었고, 엘리엇이 누구의 아이인지 알아챈 것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다.
그런데도 눈이 쓰렸다. 쏟아부을 애정의 대상이 있다는 건 늘 축복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어졌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15년을 훌쩍 넘게 살았는데도, 클레어는 여전히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가족이라는 줄기가 없었다면, 아마 부평초처럼 떠내려갔으리라.
에리히가 그녀에게 더 말을 거는 대신 뒤에서부터 가만히 끌어안았다.
뺨이 보드랍게 그녀의 머리를 비볐다. 좀처럼 하지 않는 다정한 태도에 클레어는 허탈한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됐어요. 이미 끝난 일이니까.”
“클레어.”
“지나간 일에 그렇게까지 마음 쓰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 어떻게 할지 말해 줘요.”
팔 안에서 클레어가 몸을 돌렸다.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역시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에리히는 잠시 침묵한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내가 결정할 일이라고 확신하나?”
“당신은 이 일을 모르는 척할 사람이 아니니까. 알트마이어 경을 비롯해서 그 많은 사람이, 아무런 정치적 의도도 없이, 스무 살짜리들의 연애 때문에 목숨을 버렸을 리가 없잖아요.”
글쎄. 그럴 수도 있긴 할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종종 클레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까지 그저 감정 문제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황태자비 선정 문제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그 둘이 차라리 어리석은 연애를 했다면 좋았으리라. 도저히 안 될 사이에,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데도 혈기와 열정에 들떠 사랑에 빠지고, 앞뒤 가리지 않고 아이를 가졌다면 클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황태자는 언약을 했다. 황제가 반대했다는 것은 교제 사실을 알렸다는 뜻이다. 황태자의 충신들이 목숨을 던졌다.
엘리엇은 그들의 삶을 받아서 태어났다.
클레어는 엘리엇이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가 진 빚을 어린아이가 갚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엘리엇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겠죠. 그게 혈통을 바르게 하는 일이고, 황태자의 유지를 잇는 것은 엘리엇의 혈관에 흐르는 의무니까.”
“……네가 반대한다면.”
“난 반대예요. 엘리엇이 왜 그런 짓을 해야 돼? 그깟 혈통이 뭐라고.”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가 또다시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그렇지만……, 이미 결정했어요. 당신도, 나도. 그렇죠?”
이 세상에서 적어도 두 사람은 엘리엇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래.”
에리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해가 툭 떨어지듯 가라앉았다. 바다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가 검은빛으로 변하며 은물결이 떠올랐다.
거리를 두고 뒤따르는 호위선에서 불꽃이 올라왔다.
클레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것도 엘리엇을 위해서 연출된 불꽃놀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감아 안고 있던 에리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왜 그래요?”
“급한 소식이 있는 모양이군.”
에리히가 말했다.
안 그래도 느릿느릿 가고 있던 화물선이 속도를 더 늦췄다. 선미에서 선원들이 신호용 불빛을 환하게 켰다.
작은 쾌속정 한 척이 미끄러지듯이 파도를 가르고 다가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선체에 달라붙었다.
전령이 달려와 경례를 올리고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부인. 다급한 전언이 있습니다. 사흘 전에 전신으로 잘츠기터에 도착한 소식으로, 곧바로 전령이 출발했습니다만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예고하지 않고 움직였으니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인가?”
소리 내서 말하기에는 전언의 등급이 높았기에, 전령은 대답 없이 밀봉된 봉투만 내밀었다.
에리히는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클레어에게 건넸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전신과, 그 부호를 해석한 편지 내용이었다.
『에머슨 공단에 대형 화재 발발. 방화 추정. 귀경 요망. 로저.』
긴말을 전달하기는 어려웠기에,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그걸로도 클레어에게는 충분했다. 에머슨 공단은 위빙 상단이 세운 거점 중 가장 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