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36. 에머슨 공단
리누스는 황후궁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5년 만에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리누스가 떠날 때에는 겨우 허리까지 오던 꽃나무 울타리가 지금은 가슴 위로 훌쩍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리운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황후가 손수 가꾸는 이 정원은 리누스에게는 짐승 우리보다 별반 낫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생각해 보면, 이 우리는 밖에서 잠기는 것이 아니다. 문을 열지 닫을지는 안의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황후에게는 바깥세상이 짐승 우리이리라. 다른 사람을 모두 짐승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맞는 말이었다.
사박사박.
우아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리누스는 티 테이블의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몸을 젖혔다.
곧 황후가 울타리 너머로 나타났다.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이었다.
얼굴만 보아서는 이 아담한 체구의 중년 부인이 제국을 손에 쥔 잔혹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녀를 뒤따라온 시녀 레나테가 차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햇살이 뜨겁구나.”
“딱 좋습니다. 날씨가 제법 서늘하니까요.”
리누스가 대답하자, 레나테가 티 테이블 전체를 덮는 큰 차양을 펴는 대신 황후의 자리 위에만 양산을 폈다.
사실 밖에서 차를 마시기에는 추웠다. 황후는 털가죽으로 만든 모포를 뒤집어쓰듯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지, 리누스는 잘 알고 있었다.
건물 안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벽과 천장, 바닥, 그 어디에 귀가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하늘과 땅에는 사람이 없다. 울타리 너머에 누군가가 있더라도, 훔쳐 들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리누스는 입가를 비틀었다.
“어머니는 잠은 제대로 주무십니까?”
“악마를 불러들인 자는 악몽에 쫓기다 지옥의 아가리에 떨어진다는 말을 믿니?”
황후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태연하게 되물으며 손수 잔에 담긴 뜨거운 물을 버렸다. 그리고 리누스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리누스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래도 그사이에 자신이 어른이 되기는 한 모양이다.
황후의 태연자약함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살아 있는 귀와 손은 결국 한 사람의 몸에 달린 것이니까요. 귀가 염려된다면, 손도 두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말솜씨가 제법 늘었구나.”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리누스는 구역질이 났다.
“지옥에서 무엇이라도 배운 모양이지? 돌아올 마음이 든 것도 그렇고.”
“돌아오지 않으려 해도, 어머니는 어차피 절 끌고 오셨을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 나는 분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긴, 그냥 절 죽여 버리고 다른 수단을 강구하는 편이 좀 더 어머니다운 일이긴 하죠.”
레나테의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양산이 요동쳤다. 황후는 굳이 그걸 꾸짖지는 않았다.
대신 깊은 눈매로 리누스를 바라보았다.
“제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까?”
“조금 자란 줄 알았더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조금 궁금하긴 해서요. 굳이 아우구스타까지 보내실 필요는 없었지 않나 해서.”
루덴도르프 후작가의 파산 위기와 후작의 급작스러운 죽음, 장남의 작위 계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우구스타의 오점이 되었다.
그녀가 수도에 있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더 나았을 것이다. 오점은 오점이지만, 몰랐다, 다른 일로 바빴다는 핑계라도 있었을 테니까.
“저보다 중요할 텐데.”
“네 말마따나, 아우구스타는 중요한 사람이니 굳이 뜻을 꺾을 마음은 없었다. 가족의 일이 언제까지고 마음에 무겁게 남아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끝을 보는 게 낫지.”
“그녀가 시간 낭비를 했다는 건 부정하실 마음이 없으시군요.”
“그게 시간 낭비일지 아닐지는, 이제부터 네가 결정할 일이 될 거다.”
황후가 마치 제 일이 아닌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누스는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맑은 찻물 위에 파문이 번졌다.
어린 시절 한때에는 그녀의 시선을 받고 싶어서 안달했다. 또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현명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라며 자랑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그녀가 비록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들의 위에 서는 고귀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의무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황후가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인간 이상의 존재이기는 했다.
그리고 그 괴물의 피를 받은 자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괴물이다.
“에리히의 집에 머무른 것이 진짜로 우연이었니?”
“글쎄요. 우연이든 아니든, 어머니가 궁금하신 건 그게 아닐 텐데요.”
리누스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건 많다만, 네가 내 궁금증을 풀어 줄 것 같지는 않구나.”
“…….”
“아이는 어떻더냐?”
리누스는 잠시 어린 엘리엇을 생각했다. 환한 웃음과 쉬지 않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그 활달함을.
사람을 무서워할 줄 모르고 지치지 않고 다가든다. 끈질긴 것도 타고난 천성이리라.
“놀랄 만큼 제러드를 닮았더군요. 아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열중할 겁니다.”
제러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황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골치 아픈 일이지.”
“제거하실 겁니까?”
“글쎄. 아직 어리지 않니?”
황후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가 자랐을 무렵에는 이미 네게도 자식이 있을 텐데. 아무리 인망 있는 황족이라도, 육촌이 황자의 경쟁자가 되기는 어렵지.”
“…….”
“클라우제너가 이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아야 된다는 이야기이기는 하지.”
“에리히는 아내와 아이를 지키려고 할 겁니다.”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란다. 하긴, 모름지기 제대로 된 남자라면 그래야 마땅하지.”
“어머니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말입니다.”
리누스가 말했다. 황후가 깊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답지 않구나.”
“어떤 점에서요?”
“예전의 너라면, 짐짓 경멸하는 체하거나 동경을 숨기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짜증스러워 보이는구나. 너도 이제 스무 살이지.”
“그게 저다운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슬슬 어떻게 살지 결정을 내렸니?”
리누스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결정하면, 어머니는 제 뜻을 들어주시긴 할 겁니까? 제 미래와 운명을 이미 결정해 두신 줄 알았는데요.”
“네가 얼마나 저항할지가 문제 아니겠니? 아우구스타의 말로는, 나와 협상할 게 있는 것 같던데.”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얼굴은 다정하기까지 했다.
무력한 것보다는 거만한 것이 낫다. 심신을 완벽하게 다스려 냉정을 유지한다면 좋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면 탐욕스럽고 냉혹한 것이 낫다.
오만하고 당당하게 제 몫을 요구하는 쪽이 훨씬 더 황후에게는 기특한 자식일 것이다.
그녀는 기꺼이 양보해 줄 마음이 있었다.
리누스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녀는 제 자식을 그 나름대로 사랑했다. 리누스는 바라는 것을 쥘 자격이 있고,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애써야 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리누스의 요구는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클레어 델포드와 그 아이를 제게 주십시오.”
“뭐라고?”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 여자와 아이를 가져야겠습니다.”
“어이가 없구나.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서 하는 말이니?”
“엘리엇은 형의 아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제가 가장 가까운 혈족이죠. 누가 그 애를 아들로 삼는다면, 당연히 제가 제일 적임입니다.”
“아이는 그렇다 치자.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빼앗아 황자비의 관을 씌우겠다니, 제정신이냐?”
황후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았으나 일일이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게 간단한 일이면 어머니에게 찾아올 이유가 없죠.”
리누스의 얼굴에는 욕망과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의 역겨운 방침 때문에 아렌인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결혼도, 후사도 어머니 뜻에 맡기겠습니다.”
황궁에 누굴 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리누스는 이곳을 제집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를 제 침대에, 아이를 제 식탁에.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니, 황궁으로부터 거리는 오히려 멀수록 좋다.
“리누스, 이건 협상 불가능한 문제다. 고작해야 네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다는 이유로 클라우제너와 전쟁을 할 수는 없어.”
“그건 제 이유고요. 어머니의 이유는 하찮은 제 욕심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작정하고 반대파에 서면 꽤나 곤란하고 골치 아픈 상황이 될 겁니다.”
황후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동요한 것이 분명했다.
리누스는 거의 승리감을 느끼며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어머니와 손을 잡겠습니다. 단순히 살아 있는 왕관 보관대 노릇 이상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황후가 침묵했다.
클레어가 에머슨 백작령에 도착한 것은 전갈을 받은 날로부터 보름 후의 일이다.
그녀는 그날 밤에 전령이 타고 온 쾌속정을 타고 도로 비스마르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기차를 전세 내어, 쉬지 않고 에머슨 백작령까지 달렸다.
공단은 에머슨 백작령의 평야에 있다. 넓은 강줄기가 있지만, 좀처럼 범람하지 않는 좋은 땅이다.
이 땅이 버려졌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머슨 백작령의 농토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인구 유출이 계속되는 탓에 농지의 범위는 오히려 전보다 줄고 있었다. 에머슨 백작은 충분한 대가를 받고 클레어에게 광범위한 땅을 임대했다.
그녀가 그 땅에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차역을 세우는 것이었다.
“신혼여행 중에 죄송합니다, 남작님.”
마중 나온 로저 카슨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