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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156/263)

157화

로저를 뒤따라온 위빙 상단의 간부와 에머슨 공단의 책임자들도 모두 낯빛이 시커멨다.

오너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거점에 대형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에머슨 공단은 위빙 상단의 자랑이자 가장 큰 업적이었다.

3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에 작은 기차역만 덜렁 세워진 땅에 불과했다.

거기에 위빙 상단의 주력 상품인 문직물 공장이 들어서고, 뒤따라 방적 공장과 봉제 공장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판자로 세웠던 임시 숙소 자리는 제법 번듯한 목조 주택이 가득한 거주 구역으로 바뀌었다.

임금을 제대로 받는 공인이 모여드니, 상인들도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정기 시장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아 인근의 행상 조합과 별도의 협의를 거쳐야 했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대형 상단의 지점이 들어선 상점가가 따로 형성되었다.

물론 북방 로멜 공업 지역의 대도시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렌은 공업 지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큰 규모의 도시였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에머슨으로 모였다. 꼭 위빙 상단 소속이 아니라도, 관련 사업을 하는 공장과 상단들이 이곳에 자리 잡기를 원했다.

대량의 물류가 오가면서 교통도 발달하고, 그에 따라서 지나가야 하는 길목의 도시들도 발달하고 있다.

이 자리에 있는 간부들은 대부분 에머슨이 아직 거대한 휴경지일 때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이루어 온 성취에 긍지와 애정이 있었다. 클레어가 그들을 믿고 이곳을 맡겼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 같은 실책에 더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화재를 주의하라고 특별히 더 당부했을 텐데요. 경쟁 상단에서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을 거라고.”

클레어는 공장장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나 전처럼 일일이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이게 사고가 아니라 황후의 공격이라고 해서 공장장들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죄보다는 변명이 듣고 싶군요. 상황이 어떻게 된 거죠?”

그 말에 공단 책임자 마이어스가 더욱 공손해진 태도로 말했다.

“야간 순찰 인력을 세 배로 늘렸습니다만, 미처 손 닿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다. 일단 확실한 것만, 일곱 곳에서 동시에 방화가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숙직하는 사람과 순찰대가 그중 다섯 개 현장을 미리 발견하고, 방화가 이루어지거나 막 불이 붙은 상황에서 진화를 완료했다.

그러나 두 곳은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한 곳은 빈 창고였기 때문에 숙직자도 없어서, 창고 벽에 불이 붙은 뒤에야 발견되었다.

섬유 공장의 화재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 공장 여섯 개와 대형 창고를 전소시키고 주거 구역까지 뻗어 나갔다.

진화 작업이 완료된 지금도 탄내와 재가 바람에 날려 왔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화에 나서서 주거 구역 쪽에는 피해가 없습니다.”

“인명 피해는?”

“사망 세 명, 중상이 스물한 명입니다. 경상자의 수는 많은데, 진화 작업 중에 가벼운 화상을 입거나 다친 경우가 많아서 아직 파악 중입니다.”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중상자가 많군요. 야간에 공장에서 생긴 일인데.”

“방화범이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에머슨 백작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고?”

“크게 염려하긴 하셨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번진 것도 아니고, 공단 안에서 끝났으니 그냥 전부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역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먼저 올라타고, 막시밀리안이 그 뒤에 탔다. 마지막으로 로저가 뒤따랐다.

그녀는 마이어스도 함께 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고 로저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방화범 전원의 경력을 조사했지만, 우리 상단에서 일한 지 오래된 사람들입니다.”

“그래? 그러면 발각되는 순간 가족까지 연루될 게 분명한데?”

“예. 그래서 수상합니다.”

로저 자신이 경쟁 상단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싶다면, 이런 자에게 시키지 않을 것이다. 훨씬 싸고 쉬우며, 신원도 불분명하여 처리하기 쉬운 놈이 있을 테니까.

“불안감을 부추기게 될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만, 황금 새싹단이 연루된 일 같습니다.”

“그거 반정부 단체잖아?”

“예.”

클레어는 굳이 근거를 묻지 않았다. 로저는 근거 없이 말할 사람이 아니고, 사실 예상 범위 안의 일이기도 했다.

[날 시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노림수가 따로 있겠지.]

[당신을 시험하다뇨?]

그 질문에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진짜로 위빙 상단을 노리고 한 짓은 아닐 거잖나. 공장 몇 개 타는 걸로 파산할 정도로 허술하게 경영 중인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죠. 에머슨 공단이 전소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거긴 섬유를 다루는 곳이라고요. 소방 시설에는 적지 않게 투자하고 있어요.]

[그전에 공단 전체가 타 버릴 정도라면, 너 하나로 끝나지도 않을 거고.]

[당연하죠. 위빙 상단이 무너지면 연쇄로 망할 상단도 여럿 있겠지만, 귀족이나 하원 의원 중에도 강물의 수심을 재러 갈 사람이 여러 명일걸요.]

빚도 거대해지면 자산이 된다.

에머슨 공단이 삼키고 있는 투자금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내각은 만장일치로 공적 자금이라도 투입해서 살려 주려 할 것이다.

황후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원자재를 공급하는 아렌의 목화 농장은 알 바 아닐지 몰라도, 에머슨 공단에 들어가 있는 로멜 귀족의 채권과 수도에서 모아들인 자산가 계급의 집합 투자 기금은 모르는 척하지 못한다.

[나 때문에 금융 특별법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르죠.]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군.]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거잖아요. 장담컨대 역대급 악녀로 손꼽힐걸요.]

그렇다고 황후가 위빙 상단을 죽인 채 투자금만 돌려줄 능력이 있을 리도 없었다.

에리히는 어이없는 얼굴만 했다. 클레어는 그것을 무시하고 생각을 찬찬히 정리했다.

[어쨌든 이걸로 위빙 상단을 단시간에 몰락시키는 건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위빙 상단을 나와 분리하거나, 투자자와 채권자가 내게서 등 돌리게 하는 게 목적이겠군요.]

[파산하면 곤란하지만, 투자자가 자금을 조금씩 회수하거나 채권 기한을 연장하지 않거나 하게끔 하여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

[실제로 위빙 상단이 빚을 질 수 있는 건 실패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에 그걸 무너뜨리려고 하겠군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가, 잠시 후에 덧붙였다.

[이게 당신이 말한 노림수로군요. 내부 조사를 해서 위빙 상단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싶지만, 귀족의 사유 재산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죠. 하지만 방화로 인해 대형 화재가 발발했다면, 감찰청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범죄 조직의 냄새를 맡았다거나, 주인에게 반란 의혹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래서 일단 감사를 시작하면, 핑계는 뭐든 끼워 넣어 날 의회로 불러내겠죠.]

쓸 만한 재료를 찾지 못한다면, 증거를 조작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당신을 시험하려는 게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한 거군요. 나를 위해서 당신이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할지, 어디까지 할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

[…….]

[좀 궁금하긴 한데? 파산하면 당신, 아주 재밌어하면서 돈다발로 남의 기업을 싹 쓸어다 호주머니에 넣고 날 비웃고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연하지.]

[그래도 이건 당신 기준으로는 명예 문제니까?]

에리히는 끝까지 그 시험에 어떻게 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일이 그 지경에 이른다면, 클레어 자신보다는 엘리엇을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대화를 하고 나서 배에 올랐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준비는 다 마쳤다.

하원 감찰청이 움직인다면, 오히려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 격이다.

그녀가 태연하게 미소 짓자 로저가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도 농담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남작님.”

“걱정 마. 사실 안 그래도 불러 뒀어.”

“부르셨다뇨……?”

“감찰청 감사관.”

클레어는 빙긋 웃었다. 로저는 그 웃음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매수하셨군요.”

“요한 경이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지. 의회 정치는 정말 좋은 거야.”

황후는 황제의 조사관을 움직일 수 없으니, 하원 감찰청을 쓸 수밖에 없다. 사실 황제 직속 기구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하원 감찰청에 황후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전원을 장악할 수는 없다. 내각도, 하원 의원도, 각자의 계파를 감찰청에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중 여럿은 돈에 반응한다. 충분한 돈으로 매수되지 않는 것은 신념을 가진 사람뿐이다.

‘그런 사람은 드물지.’

프란츠 알트마이어 같은 사람을 돈으로 쓰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모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리고 엘리사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들도.

그들은 아마도 황태자가 그리는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엘리사조차도.’

하지만 황후가 과연 그런 신념을 제시했을까?

모를 일이다.

클레어는 생각을 가볍게 떨어냈다.

뭐가 되었든, 문제는 항상 불확실성에 있다. 방화범이 반정부단체라면 예상 안의 일이고, 이제 더 이상은 문제가 아니었다.

“감사관이 올 때까지, 그 방화범들의 수장을 좀 잡아 보자. 전부 따로 가둬 놨을까?”

“예. 그렇게 지시하셨으니까요.”

“좋아. 오늘 바로 흔들어 봐도 되겠네.”

클레어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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