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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158/263)

159화

클레어는 애초부터 황금 새싹단을 의심하고 있었다. 반로멜을 표방한 반정부 조직이라기에는 너무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렌을 위한 정치 조직이라면 수도에서 통하는 이슈를 만들려 했을 것이다. 의회와 내각이 존재하니, 거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목적에 훨씬 부합한다.

로멜에 대한 증오가 앞선다면 북방 공업 도시에 폭탄이라도 하나 던져 주는 게 훨씬 목적에 걸맞은 활동이리라.

그러나 이들은 아렌 내부에서만 움직인다. 몇 곳 되지도 않는 상공업 지역에 테러를 하거나,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마치 로멜의 주구가 되는 일인 것처럼 호도하는 게 전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논리가 없는 것도 아니긴 했다. 상공업을 발달시키려면 필연적으로 로멜과 관계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최대 규모의 시장과 기자재 공급처가 로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이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이비 종교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지.’

조직원들에게서 활동비를 수금하고, 공짜로 일을 시킨다. 부자나 귀족을 꾀어 돈을 뜯기도 한다.

하는 짓이 꼭 비슷하지 않은가. 다만, 팔아 치우는 것이 내세의 구원이 아니라 아렌의 긍지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다른 문제로 느껴졌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이 황후의 것인 마당에, 황금 새싹단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법이 어디 있겠어요.]

애초부터 아렌 안에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상단의 싹을 밟아 버리는 게 목적이라면, 충분히 말이 된다.

황후가 아렌의 발전을 막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간편하고 의심을 사지 않을 수단도 드물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반로멜 단체를 억누르는 효과도 있다. 위험 분자의 명단을 미리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클레어의 말에 뉴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날 뭘로 보고……!”

“그럼 돈만 받았나?”

“뭐요?!”

“돈도 안 받았는데 이런 일에 끼어들 만큼 멍청해 보이진 않아서.”

클레어가 빈정거렸다.

뉴먼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록 잡혀 오긴 했으나 그도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낸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러는 남작님이야말로 비난받은 게 억울해서 그러시는 모양인데,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소.”

“그래?”

“정부가 아렌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고, 아렌인은 돈 안 되는 밀 농사나 지으라고 하는 게 어디 일이 년이오? 그러다 살기 힘들면 어린애를 팔고, 여물지 못한 딸들도 하녀나 직공 일을 하겠다며 고향을 떠나 소식도 없고, 저 위로 올라가 보아도 소개장 없이 할 수 있는 건 날품팔이가 아니면 더럽고 위험한 일뿐인데!”

뉴먼이 주먹을 불끈 쥐고 역설했다.

“당신은 아렌인들의 힘을 모아 이 엄청난 사업을 일으켰잖소! 그러면 마땅히 아렌에 갚았어야지! 그걸 지참금으로 들고 로멜 귀족 가문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사람들은 그걸 기대하고 당신을 지지했던 게 아니오!”

“난 딱히 아렌을 중흥시키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닌데. 지지는 성공에 뒤따라온 거야. 그걸로 성공한 게 아니라.”

클레어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아렌의 미래를 생각하고 이 땅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부끄럼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성자는커녕 하다못해 선각자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멍청하다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머리가 장식이었다.

어차피 욕심대로 행동하는데, 상황을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돈을 받았어?”

“그런 말로 날 모욕하지 마시오!”

“찔리나 보네. 안 받았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 걸 보니.”

뉴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클레어가 책상 위에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뉴먼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장에 대해서, 황금 새싹단의 활동에 대해서, 할 말이 몇 가지 생각나긴 했지만 그만두었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 법이다. 설득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상대도 아니고.

뉴먼이 목구멍을 울리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협상합시다.”

“말해 봐. 협상할 가치가 있을지 어떨지는 듣고 나서 결정하겠어.”

“감찰청에, 황금 새싹단의 후원자가 남작님이라고 말한 것은 단체를 키우기 위해서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번에는 질투 때문에 방화 교사를 했다고 증언하겠소.”

“맞는 말이잖아. 돈을 받든 안 받았든, 너는 내 이름을 이용했을 텐데.”

뉴먼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무시한 채 해야 할 말만 했다.

“대신 내가 거짓 증언을 하는 사태가 오지 않도록 날 보호해 주시오. 일을 이 이상 크게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내 말대로 합시다.”

뉴먼은 클레어가 이 협상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클레어가 황금 새싹단의 후원자인 건 사실이라고 말할 테니까. 그러면 곤란해지는 건 클레어다.

나쁜 이미지는 쉽게 붙고 잘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청문회가 열리면 클레어는 무조건 손해다.

하지만 자신도 전향하려면 보호가 필요하다. 황후의 감찰관들은 고문을 해서라도 그의 입에서 필요한 증언을 얻어 낼 테니까.

클레어가 빙긋 웃으며 옆을 돌아보고 말했다.

“거짓 증언을 해 준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감사관님?”

뉴먼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옆 사무실과 연결된 문이 끼이익 열렸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 문은 꽉 닫혀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동일한 색의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넷이었다. 칼라에도 똑같은 배지를 달고 있었다.

하원 감찰청의 배지다.

“이야기는 들으셨을 거라고 믿어요.”

“예. 정황은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제일 나이 많은 감사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뉴먼은 눈을 크게 떴다. 감찰청에서 올 것은 황후의 손이 닿은 자들이었을 텐데?

클레어가 감사관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의 계좌를 까 보면 꽤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상단부터 은행, 우편 업체까지 전부. 아마 가명으로 모은 재산이 상당하겠죠.”

“남작!”

“협조하세요, 뉴먼 씨. 정상 참작이 될 상황은 아니니까.”

클레어가 책상을 돌아 뉴먼에게 다가갔다.

뉴먼은 주춤주춤하면서도 지기 싫어 물러나지 않았다. 클레어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그는 목부터 꼬리뼈까지 바짝 긴장시킨 채 뻣뻣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가 왜 이러.’

생각이 미처 구체화되기도 전에 뭔가가 박살 나는 통증이 단련 불가능한 부위를 덮쳤다.

“끄, 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는 찰나에 막시밀리안이 그의 덜미를 잡아 의자에 눌러 앉혔다.

클레어는 그를 내려다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내가 왜 의회에 나가는 걸 사양하겠어? 거기서 발언하는 것보다 더 빨리 공론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 없는데.”

“으, 윽, 헉…….”

“어떻게 해야 가장 크게 화제 몰이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고 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었거든. 아편과 노예계 말이야.”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그녀가 몸을 구부려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건 원래 네가 했어야 하는 일이야. 네가 진짜로 아렌을 위한다면 제일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야지. 아마 그랬다면 진짜로 존경했을 거야.”

말하고 나서, 클레어는 허리를 쭉 편 다음 아직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뉴먼을 보고 너무 야만적인 보복이었나 5초 정도 생각했다.

하지만 미안하기는커녕 속 시원하기만 했다.

“암말한테 걷어차인 거라고 생각해. 되도 않은 수놈이 알짱대다간 원래 그렇게 되는 법이잖아?”

뉴먼의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37. 알트마이어

에리히가 배에서 내린 것은 클레어가 떠난 지 닷새 후였다.

그는 일부러 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다급히 에머슨으로 달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신까지 일정을 바꾸어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그에게 엘리엇을 달랠 능력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엄마가 열 밤 자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열흘을 기다리기는커녕 이틀째부터 오지 않는다고 엘리엇이 울기 시작했다.

마사가 달래도, 데리고 자도 별 소용이 없었다. 낮에라도 신나게 해 줘야지.

그리고 배에서 내린 지 열흘째.

“웅……. 엄마는?”

눈을 반만 뜨고 비몽사몽인 채로 엘리엇이 또 제일 먼저 그것부터 물었다. 에리히는 엘리엇을 안아 침대에서 내려 주었다.

“세수해야지.”

“아빠? 엄마 편지…….”

여전히 잠에 반쯤 취한 목소리로 엘리엇이 웅얼거렸다.

에리히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 욕실 쪽으로 보냈다. 욕실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사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엘리엇의 손을 잡고 씻으러 갔다.

그다음 에리히는 거실을 거쳐 아예 밖으로 나갔다. 비서를 부르는 대신 자신이 그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호텔의 두 층을 통째로 빌렸으나 여러모로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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