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에리히는 생활의 불편을 거의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적절한 수준의 시중이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남을 신경 쓰며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제 한 몸만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이를 보살펴야 하고 보안에 신경 써야 했으며, 그러면서 또다시 아이를 보살펴야 했다.
“편지는?”
“말씀하신 방문 요청 카드는 이미 보냈습니다. 초대장에는 전부 거절의 답장을 썼고요.”
비서가 미리 분류한 편지 몇 장과 작은 흑단 상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클라우제너에서 온 심부름꾼이 도착했습니다.”
“아, 내가 찾아보라고 한 그거군.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비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더 있었지만, 에리히는 셔츠와 바지가 구겨진 것을 의식하고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냥 비서를 보는 것 정도면 이대로도 상관없겠지만, 오늘 향해야 할 곳은 보다 더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자리다.
사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 도시의 시장과 행정 관료를 비롯하여 주요 인사 몇몇과 조찬을 들었다.
그다음 엘리엇이 깨어나기 전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깨어났을 때 혼자 있으면 클레어를 찾으며 칭얼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있다고 해서 안 운다는 법은 없었지만, 아예 마사에게 맡겨 놓고 팽개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다시 침대에 들어가서 아이 곁에 누워야 했다.
거기에 엘리엇이 얼굴과 머리를 잔뜩 비비고 다시 일어났으니 구김도 가고 얼룩도 생겼다.
가느다란 금빛 머리칼이 단춧구멍에 끼어 있었다.
에리히는 상자를 내려놓고 집사에게 새 옷을 가져오게 했다.
“편지는?”
비서에게서 그럴듯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에리히는 이번에는 집사에게 물었다.
어차피 아무리 빨라도 이제 겨우 에머슨에 닿았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냈어도 당도할 시기가 아니었다.
뻔히 알면서도 그거라도 있으면 엘리엇을 달래기 쉬울 것 같아 자꾸 묻게 되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집사는 괜히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한 양 송구스러워했다.
“달리 연락 온 것은 없습니다.”
“그렇군.”
에리히는 혀를 찼다. 솔직히 에머슨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줄지 어떨지도 불투명했다.
언제 원하는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소식을 준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나만 애타지.’
약혼 기간에도 매일 굳이 이렇게까지 자주 만나러 올 필요가 있느냐고 하질 않나, 편지 한 장 제대로 쓴 적이 있나.
윌리엄의 말이 딱 맞다. 그녀는 연락하는 게 귀찮아서라도 안 할 사람이다.
에리히는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아빠.”
엘리엇이 얼굴과 앞머리와 소매를 몽땅 적시고 나왔다. 에리히는 아직 셔츠를 갈아입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녀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아이의 얼굴과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 냈다.
“엄마 안 왔어?”
“일이 바쁘단다.”
에리히의 말투가 자기와 똑같이 불만스럽게 들렸기 때문에 엘리엇은 서러워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빠도 내 편이다. 그러면 덜 억울했다.
“엄마 오면 화낼 거야.”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다.”
“엄마 나빠.”
말하다 말고 엘리엇이 서러워진 듯 진짜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셔츠를 갈아입지 않아서 다행이다. 에리히는 엘리엇을 안아 올렸다. 아이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 보고 싶어, 흑, 흐응……!”
엘리엇이 눈물을 힘껏 참았다.
일하러 갔을 때 떼쓰면 안 된다. 중요한 일이니까.
딱히 누가 그렇게 훈육한 적도 없는데, 제가 먼저 분위기를 알고 눈치 보는 것이 불쌍해서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내도 돼. 엄마가 잘못한 거야.”
“흐으응, 우응…….”
“그렇지만 울면 안 된다. 울어서 얼굴이 부은 모습을 남에게 함부로 보이면 안 되니까.”
엘리엇이 에리히의 어깨에 다시 눈물 콧물 다 묻은 얼굴을 비볐다. 마사가 몸 둘 바를 모르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도련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그간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귀족 부부가 아이를 직접 기르는 것은 원래 흔한 일이 아니다. 클라우제너 같은 대귀족 가문에서는 더욱 그랬다.
사실 어디에서든 아버지가 아이를 직접 보살피는 일은 그다지 없다. 하물며 아이의 친모가 클레어가 아님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마사의 입장에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인 엘리엇을 많이 사랑해 주는 것까지는 그저 감사하고 기쁠 따름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엘리엇은 당연히 클레어가 데려갔어야 했다. 일정이 급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면, 마사 자신이 데리고 천천히 클레어를 뒤따라가거나 적당한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괜찮네.”
에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엘리엇을 떼어 놓고 움직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초부터 엘리엇이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의 옆이다.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윌리엄의 배를 탄 뒤로 결정된 여정은 더더욱 그랬다. 애초부터 자신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엘리엇을 위한 여정이었으니까.
그는 엘리엇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서러우면 울지 말고, 잘 기억해 놨다가 화를 내라.”
“막 화내면 안 되는데…….”
엘리엇이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로 말했다.
“눈물 날 정도로 화나는 일이 있으면 그래도 괜찮아. 대신 울먹거리느라고 웅얼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나중에 후회할 짓 하면 안 된다. 한 번 화낼 때 불처럼 화내서, 상대방을 울리는 거야.”
그는 최대한 아이에게 단호하게 화내는 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클레어가 들었다면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었다.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겨우 아이가 진정되고 나자, 집사가 미리 준비한 작은 정장을 가져왔다.
마사가 얼른 옷을 받아 엘리엇에게 셔츠를 입혔다. 엘리엇이 웅 하고 투정 부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마사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었다.
에리히는 그동안 아까 비서에게서 받아 온 흑단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조그만 커프스 링크를 꺼내어, 엘리엇의 소매에 달아 주었다.
엘리엇이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도 잊고 눈을 반짝 빛냈다.
“우와, 파란 돌 예뻐!”
“내가 여섯 살 때 예법 교육을 시작할 때 선물받았던 첫 번째 커프스 링크지.”
엘리엇이 제 손으로 커프스 링크를 떼어 내려 했다. 에리히는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떼어 내면 신사가 아니다.”
“앗.”
“팔을 마구 휘두르다가는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조심하도록 해.”
그런다고 진짜로 아이가 조심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실은 커프스 링크 자체에 작은 끈이 달려 있어서, 떨어지더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치가 취해져 있었다.
물론 에리히는 단추 하나 떼어 낸 적이 없었다. 몸에 달아 놓은 것을 전부 떼어 갖고 놀다 잃어버리는 것은 제러드 쪽이었다.
에리히는 그다음 손수 작은 크라바트를 매어 주고, 장식 있는 프록코트를 입혔다.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 손님을 만날 때 리본 타이를 매거나 귀여운 정장을 입은 일은 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에리히의 것과 똑같은 예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우리 어디 가요?”
“아빠의 옛날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거야.”
에리히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그것보다는 좀 더 중요한 다른 용건이 있었다.
그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선배님, 저희는 준비 끝났습니다.”
“거의 끝났네. 들어와.”
에리히가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어우, 우리 엘리엇이 다 컸네.”
“윌 아저씨!”
커프스 링크를 만지고 싶어서 소맷부리를 더듬거리고 있던 엘리엇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를 뒤따라 문안으로 들어선 것은 예복을 걸친 프란츠였다.
오랜만에 입어서 적잖이 어색했다. 상처 부위를 가린 가면을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바꿨으나, 드러난 부분이 볕에 타고 거칠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낡은 의수와 아직 몸에 남은 반듯한 예법이 부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이 엘리엇의 심장에 더 꽂힌 모양이었다.
“후크 선장 아저씨! 진, 짜, 멋있어요!”
잽싸게 달려가 매달리는 엘리엇의 어깨에 반사적으로 왼손을 올리고는 프란츠가 난처하다는 듯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윌리엄이 킬킬 웃었다.
“질투 나십니까?”
“안아 줘. 옷은 구겨지지 않게.”
그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프란츠는 조심스럽게 엘리엇을 왼팔로 안아 올렸다. 그러자 엘리엇은 서러웠던 것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후크 선장 아저씨도 같이 가요?”
“예.”
“와, 진짜요? 우리 오늘도 배 타는 거예요?”
“배는 타지 않습니다. 알트마이어 가문을 방문하는 것이니까요.”
그의 목이 가라앉아 쉰 이유를 엘리엇은 결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