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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160/263)

161화

지난 5년 동안 고요에 휩싸여 있었던 알트마이어 백작저에, 아주 오랜만에 공기가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리가 생겨났다.

“클라우제너 공작께서 오신다고요?”

아침에 식재료를 대러 온 청년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안 그래도 식자재 주문량이 엄청 늘었다면서, 아저씨가 어쩐 일인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대부인께서 공작 각하의 어린 시절 가정 교사를 맡으신 적이 있어요. 공작 각하께서는 그 정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으시고 매년 안부 편지를 보내셨답니다.”

10년 가까이 알트마이어의 주방에서 일해 온 조리사가 자랑하듯 말했다.

“이번에도 아드님을 맡겨 주실 모양이에요.”

“알트마이어가 황실의 가신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클라우제너 공작가와도 그렇게 인연이 깊은 줄 몰랐습니다.”

“우리 대부인께서 황녀님의 예법 교사셨답니다. 돌아가신 선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말씀이에요. 그 인연으로 우리 대부인을 아드님의 가정 교사로 부르셨던 거지요.”

“그렇군요. 그래도 공작님 같은 분이 직접 방문까지 하시는 일은 잘 없을 것 같은데.”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콜릿색 눈동자가 동그래져서 조리사를 바라보았다. 식료품상의 오촌 조카라는 이 청년은 어쩌면 이렇게 귀엽게 잘도 생긴 데다가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 주는지.

대단하다, 놀랍다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면, 제 일이 아니라도 무엇이든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졌다.

“우리 대부인께서는 숙녀 중의 숙녀이시니까요. 이제 칠순도 넘었는데도 여전히 꼿꼿하고 아주 우아한 분이랍니다.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우시지요.”

“아주 무서운 분일 것 같은데요.”

“그건 그래요.”

그러자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좋은 일이 생겼으니, 알트마이어에도 활력이 좀 돌면 좋겠군요. 손님이 자주 오셔서 저희 매상도 많이 올려 주면 좋고요.”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우어 씨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라라 양이 걱정해 주는 걸 알면 아저씨도 기뻐할 거예요.”

스테판 하인즈는 가볍게 조리사에게 윙크하고 짐마차에 올라탔다.

‘공작이 이곳에서 대체 누굴 만나려는 거지?’

손님은 클라우제너 공작가만이 아니다. 들어가는 식자재의 양이 늘어난 것은 사흘 전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아우어 식료품상의 장부를 까 보면, 이미 열흘 전에 한 번 주문량이 늘었다.

스테판은 사흘 전에 도착한 손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렌 공왕의 동향은 뭐 그리 대단한 정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열흘 전에 온 것은 누구일까? 외부와의 교류를 포기하고, 막내딸의 사교계 데뷔조차 포기한 채 칩거하고 있는 이 알트마이어에.

‘이 이상 지켜볼 이유가 있는 곳인가?’

알트마이어의 명예 같은 건 결국 구시대적 가치다.

노부인이 숙녀 중의 숙녀라는 찬사를 받았었지만,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프란츠 알트마이어가 황태자의 측근으로서 요주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미 죽었다.

그 뒤로 알트마이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역사책에 영광된 이름을 남긴 채 잊힐 가문이었고, 아마 알트마이어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아니, 하지만 아렌 공왕이 왜 여기에서 공작을 만나지?’

뭐, 명령받은 건 알트마이어에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황후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과묵한 것이 알트마이어의 특징이라고 웃으며 농담하곤 했다.

실제로 모두 그런 성격을 타고난 것일 리는 없는데도, 그게 일종의 가풍이라도 된 듯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 사람당 두 마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말을 고용인들 역시 농담처럼 하곤 했다.

그렇기에 5년 만에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면서도 알트마이어 가족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고요한 시선만이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끼듯 내려앉아 있었다.

미리 연락받은 시간에 마차가 정원으로 들어왔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화려한 사두마차였다.

백작 부부가 공작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의 계단을 내려가 마차 앞에 섰다. 집사가 달려가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내린 것은 에리히였다.

“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알트마이어 백작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쪽에서 아이가 뛰쳐나왔다.

“이욥!”

“엘리엇.”

에리히가 팔로 마차 문 앞을 가로막았다. 함부로 뛰어내려 백작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엇은 지지 않았다. 아이는 에리히의 팔 밑으로 후다닥 기어 나왔다.

“앗!”

도열한 사람들을 보고 뒤늦게야 엘리엇이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전에도 이러다가 클레어에게 혼났기 때문이다.

“아앗! 죄송합.”

에리히의 반응은 물론 클레어와 달랐다. 엘리엇이 사과하며 배꼽 인사를 하기 전에, 그러지 못하도록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달랑달랑 들어 올렸다.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아빠?”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다.”

“그치만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막 뛰어나가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보지도 않고 막 뛰어내리면 안 돼. 하지만 고개를 함부로 숙여서도 안 된다.”

“그러면 잘못했습니다는 어떻게 해요?”

처음부터 사과할 일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었으나, 그게 옳은 대답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이 나이 때 뭐라고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에리히는 곤란해졌다.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아빠는 엄마보다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알트마이어 백작 부인이 굳어 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백작의 분위기도 온화해졌다.

에리히가 그것을 기화로 엘리엇의 질문을 모르는 체하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백작 부인, 백작. 가끔 한번 노부인을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이런저런 일로 바빠 미처 그러지 못했네.”

“아닙니다. 이렇게 잊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마 어머니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백작이 공손히 답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지금까지 편지 정도밖에 쓰지 않았던 사람이 조용한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을 몰고 들어온 셈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희 가문에.”

백작 부인이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마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하려던 말을 잊었다.

그녀의 시선이 마차에서 내린 기괴한 모습의 남자를 마구 훑었다. 상처의 흔적이 남은 코, 볕에 갈라지고 얼룩덜룩해진 턱을.

그리고 갈고리 의수를 낀 손과 가면 너머의 눈동자를. 그리고 굽은 어깨와 반백이 되어 버린 머리칼을 보고, 신발과 살아 있는 왼손을 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의 장남은 이미 5년 전에 죽었다. 

남편이 말리는 것을 제치고 그녀는 끝끝내 시신을 직접 확인했다.

그때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른손은 확실히 아들의 것이었고, 머리칼도, 키도, 체구도 비슷한 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 시신은 이미 부패되고 있었다. 얼굴도, 몸도 알아본 것이 아니다.

부인의 눈이 다시 남자의 갈고리 의수를 훑었다. 저 손은 언제부터 비어 있었을까.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 지르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프, 란츠?”

물어서는 안 될 말을 결국 입 밖에 낸 것은 부인이 아니라 백작 쪽이었다.

그는 말해 놓고도 주먹을 움켜쥔 채 견디기 위해 애썼다.

아닐 수도 있었다. 맞는다면, 생사를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었으리라.

지금도, 가면을 쓰고 클라우제너 공작의 뒤에 묵묵히 서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손님이 없는 집 안이라지만 정원은 개방 공간이었다.

하물며 이 자리는 저택 모든 곳에서 내다볼 수 있는 곳이다. 어디에 누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은, 저택을 드나드는 누군가가 말을 전할 수도 있다.

5년 동안 칩거한 이유가 있었다.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귀족의 명예는 피를 대가로 치르는 것이다. 알트마이어의 명예는 더더욱 그랬지.]

그녀는 신분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그 품위와 몸가짐이 사교계 제일이라는 평을 받은 영예로운 숙녀였다. 황제조차 그녀에게 충분한 존경을 표시했다.

그런 그녀조차도 프란츠의 시신 앞에서 쓸쓸하게 말했다.

[이 애는 그것을 너무 잘 배워 버렸구나. 아무리 찬란한 명예라도, 이제는 잊힐 시대이건만.]

피를 흘려 꽃을 피우느니, 꽃 같은 아이들이 살아 있는 쪽이 낫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니 백작 부부는 아들을 그냥 마음에 묻었다.

고요하게 살았다.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도록. 더 이상 이 집에서 죽는 이가 생기지 않도록.

그러니 지금도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안전을 위해서.

그러나 백작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란츠가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백작도 그랬다.

에리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입을 다물고 아무도 구체적인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해서 황후에게 아무 말도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믿는 쪽이 어리석다.

숨길 작정이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허가를 받은 프란츠가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 얼굴은 흉으로 엉망이었으나, 가족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흐윽……!”

부인이 한 번 오열을 터뜨렸다가, 그 자리에서 혼절하듯 뒤로 넘어갔다.

“어머니!”

프란츠가 소리 지르며 가면을 던져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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