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38. 누구의 아이인가
아렌 공왕은 그때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 엘레나와 함께 별채의 선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선룸 안은 햇볕을 받아 따뜻하고, 유리 벽 너머로 앙상한 겨울 정원이 보였다. 나이 든 사람이 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러면 전하께서도 클라우제너 공작님이 무슨 용건으로 공왕 전하를 이곳으로 초청했는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로군요.”
엘레나 부인이 의아하게 말했다.
“저는 공작님께서 공왕 전하를 이곳에서 만나겠다고 하시기에, 그저 단순히 이름만 빌려 드리는 역할인 줄 알았습니다.”
“억지로 숨길 필요가 있는 만남도 아닌데, 부인에게 아무런 용건이 없다면 그럴 리가 있겠는가.”
“글쎄요. 제가 아이를 맡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지요.”
“그대도 그 아이를 보면 마음이 바뀔 거야. 정말 귀엽거든.”
공왕이 미소를 지었다.
에리히는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낼 만한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는 엘리엇을 보기 위해서 짧은 여행을 기꺼이 감수했으리라.
무엇보다도 알트마이어보다 더 믿을 만한 여행지는 없다. 그의 동행에게는 더욱더.
“무척 다감한 성격이더군. 그리고 그대도 알다시피, 다감한 성품의 황족이란 늘 위태로운 법이 아닌가.”
아렌계 방계 황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위험성을 띠고 있는데 말이다.
“가만히 있어도 성품을 트집 잡는 자가 분명히 있을 걸세.”
“황자나 황녀라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클라우제너 공작이라면 괜찮습니다. 작금에 이르러 황실의 권위에는 입을 대는 자가 많으나, 공작가 안에서 공작위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자는 없을 테니까요.”
“그 말도 옳긴 하네만.”
공왕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지위와 권위가 있는 사람이 아이 곁에 붙어 있어 주면 좋겠다 싶더군.”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로멜 제일의 숙녀라면 더더욱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무척 귀여워하시는군요.”
엘레나 부인이 조금 놀란 듯이 말했다.
아렌 공왕이 아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리히의 아들을 위해 자신에게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하지만 저는 사교계에 다시 나갈 생각이…….”
그때였다.
하녀가 노크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엘레나 부인이 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가 없구나.”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닙니다, 큰, 큰 마님. 어서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이냐?”
“큰 도련님이, 큰 도련님이! 돌아오셨어요!”
하녀가 부르짖었다.
엘레나 부인은 처음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보다 공왕이 먼저 그 말뜻을 이해했다. 알트마이어의 장남이 돌아왔다고?
그게 누구인지 공왕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프란츠는 제러드의 측근이었고, 언제나 곁에 있었으니까.
어릴 때에는 과자를 집어 주던 아이다.
엘레나 부인이 뒤늦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럴 때조차도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우아했다. 그러나 이내 침착성을 잃고 황급히 선룸 밖으로 나갔다.
공왕은 찻잔을 집어 들다가 자기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찻잔 접시에 부딪혀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데, 도무지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프란츠가 돌아왔다고?”
설마.
그렇다면 혹시?
아니다. 그는 한발 늦게 프란츠의 시신이 부패한 채 발견되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시신은 그뿐이었다.
‘에리히 공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건가?’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반은 분노, 나머지 반은 혼란에 휩싸인 채 벌떡 일어섰다.
자신은 그날의 일을 전부 알아야 했다. 그럴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를 밖으로 내보일 틈은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저택을 통과하는 대신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손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에리히가 엘리엇을 직접 안아 들고 있었다. 옷까지 같은 모양을 입은 것을 보니 어찌나 닮았는지, 정말로 그 아비를 조그맣게 줄여 놓은 것처럼 보였다.
“오.”
잠시 분노를 잊고 공왕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일어서서 손수 선룸의 문을 열었다. 엘리엇이 터뜨리는 울음소리가 째앵 귀로 날아들었다.
“흐어엉, 나도 엄마 보고 싶어, 으으응!”
“열 밤을 참겠다고 하지 않았니.”
“흐으윽, 엄마, 엄마아!”
엘리엇이 몸부림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에리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구기면 안 된다고 말하기는커녕 더럽히지 말라는 말도 못 할 상황이었다.
마사라면 좀 더 솜씨 좋게 달랬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일은 보안이 중요한 터라 데려오지 않았다.
아렌 공왕이 피로에 찌든 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어서 오게. 힘들어 보이는군.”
“아닙니다, 공왕 전하.”
인사부터 해야 하는데, 그럴 기력이 없었다. 에리히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시하기 위해서 내쉬는 한숨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바닥까지 폐부를 쥐어짜 내는 한숨이었다.
“엘리엇, 인사를 드려야지.”
“엄마, 흑, 엄마가……. 공왕 할아버지?”
엘리엇이 울다 말고 깜짝 놀라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훌쩍거리고 코를 울렸다.
뭐가 또 서러운 모양이었다.
“공왕 할아버지이이……!”
“아이구, 아가가 서러웠구나.”
공왕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었다.
에리히는 움찔했지만, 엘리엇은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왕의 팔로 옮겨 갔다.
“뭐가 그리 슬퍼?”
“엄마 보구 싶어요.”
엘리엇이 하소연했다. 잠깐 까먹고 있었는데, 후크 선장 아저씨가 몇 년 만에 엄마를 만난 거라는 말을 듣자 더럭 겁이 나면서 서러웠던 것이다.
공왕이 엘리엇을 조곤조곤 달랬다.
“엄마가 우리 아가만 두고 갔나?”
“열 밤 자고 온댔는데 안 와요.”
“몇 밤이나 됐는데?”
“웅…….”
엘리엇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았다. 그러느라고 잠깐, 울던 것을 잊었다.
에리히가 진심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무래도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이어지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는 먼 길인데 초대에 응해 주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달래 주어 감사하다는 의미인 게 분명했다.
공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야 그냥 울음만 그치게 하려고 하니까. 부모와는 다르지.”
“예. 그래도 감사합니다.”
유모 손에 버려두지 않는 것만 해도 기특했다. 공왕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자신이 에리히를 칭찬하거나 훈계할 위치는 아니라서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숫자를 다 센 엘리엇이 에리히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열일곱 밤! 열일곱 밤이에요! 엄마는 열 밤만 자고 온다고 그랬는데 아직 안 왔어!”
“엄마가 나빴구나.”
“엄마 나빠, 흑.”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러 갔어도, 약속은 지켜야지.”
마치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처음이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엇이 공왕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렌 공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만 울렴. 그러다 눈이 개구리처럼 된다.”
“개구리?”
“그러고 보니 개구리가 있구만.”
“어디?!”
엘리엇이 깜짝 놀라 공왕의 목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개구리가 바닥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개구리는 공왕의 손에 있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개구리 장난감을 공왕은 솜씨 좋게 아이의 등에 붙였다. 그리고 꽁무니에 달린 줄을 당겼다.
피이익--!
개구리 소리라기보다는 피리 소리 같은 것이 났지만, 바로 등 뒤에서 들렸기 때문에 엘리엇은 발버둥 칠 정도로 놀랐다.
피이익--!
“왁! 등에!”
엘리엇이 제 등을 보려고 발버둥 쳤다. 공왕은 껄껄 웃으며 등에서 장난감을 떼어 엘리엇의 손에 넘겨주었다.
“개구리!”
엘리엇이 신나서 두 손으로 그것을 쥐었다. 서럽게 울었던 것을 벌써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공왕은 아이를 내려 주고 눈물에 젖은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닦아 주었다.
“제가 가서 씻기겠습니다.”
윌리엄이 자청했다. 공왕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은 개구리를 꾹 쥔 채 윌리엄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떴다.
에리히가 묘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실은 공왕 전하께 좀 더 제대로 인사시킬 작정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공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미 우리가 더 친하다네.”
엘리엇이 자리를 떠났어도 공왕은 퍽 마음이 풀어진 채 말했다.
“레이디 엘레나는 하녀가 불러서 잠시 자리를 비웠어. 전하는 말을 들었는데, 프란츠가 살아 돌아왔다고?”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모셨습니다. 프란츠 때문에 여기서 뵙자고 한 것이기도 하고요. 이야기가 깁니다.”
에리히가 그렇게 말하고는, 공왕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서서 들으실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슨 일이기에…….”
아렌 공왕은 에리히가 자리를 권한 이유를, 이야기가 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다. 충격을 받아 쓰러질 것을 우려한 탓이다.
에리히는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장소가 선룸인 덕에, 멀찍이 선 호위와 수행원들의 위치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아마 제가 결혼할 무렵에, 여러 소문이 있었던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엘리엇이 제 아내를 이모라고 부른다는 소문을 들어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