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2/263)

163화

아렌 공왕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들었네.”

사교계에는 신문에서 떠들어 댄 것 이상으로 온갖 종류의 소문거리가 있었다. 그런 소문을 멀리하는 아렌 공왕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다.

소문은 각자 그럴듯한 근거를 꼬리로 달고 여기저기 퍼졌을 것이고, 어쩌면 진짜로 증거라고 할 만한 것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나이까지 살다 보면, 세상에 별 사연이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외일 정도로 모든 집에 다 하나씩은 있었다.

엘리엇을 보면, 부부가 아이를 사랑하고, 또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거면 족하지 않은가. 애초부터 그가 관여할 일도 아니었다.

에리히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말했다.

“엘리엇은, 실은 제 친자가 아닙니다.”

머뭇거린 것은 단어를 골랐기 때문이다.

혈통의 문제를 떠나 그는 이미 엘리엇을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양자라고 해서 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리히는 잠시 더 망설였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공왕이 과연 이 일을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어떤 일은 돌려 말한다고 해서 희석되지 않는다. 사실이 그 자체로 충격적이라면, 말을 다듬어 고치는 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조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 담백하게 사실을 고했다.

“제러드의 아들입니다. 생모의 이름은 엘리사 델포드. 제 아내의 여동생이며, 아이를 낳다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달그락달그락.

사기그릇이 곧 깨지기라도 할 듯이 마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공왕은 찻잔 손잡이를 부서지도록 쥔 채, 내려놓는 것도 잊고 에리히를 노려보았다.

엘리엇이 그의 친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는 물론 혈연이 통하지 않아도 그냥 닮은 사람이 존재한다.

하지만 에리히가 제 자식으로 받아들인 아이가, 그저 우연히 닮은 아이일 리가 있겠는가.

공왕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을 틀어쥐었다. 에리히가 그를 살피려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괜찮네. 괜찮아.”

그는 정신없이 말했다. 몇 번이나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는 정말로 괜찮았다.

잃는 것도 버텨 냈다. 아내가 죽었고, 안아 기른 딸이 죽었으며, 그다음에는 외손자가 비명에 갔다.

그런데 되찾는 것을 견디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저 친척을 통해 외손자의 모습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제 분신을 남겼다.

[무척 예쁜 사람이에요. 아, 아직은 보여 드릴 수 없어요. 섣불리 내보였다가 괜히 상처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린것이 다 자랐다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특했는데, 연애를 한다더니. 사랑에 빠졌다더니.

아이가 있었다.

새순 같은 어린아이가 살아서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

그게 옳다. 

아렌 공왕은 이제야 비로소 제러드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그는 줄곧 세상의 섭리가 뒤틀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기를 다섯 살까지 키워 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젊은 사람이 사고와 병으로 죽는 일도 흔하며, 늙은이가 온몸이 병들어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오래도록 사는 일이 많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먼저 떠나는 게 순리가 아닌가. 딸과 손자를 앞세우는 게 아니라.

하지만 아이가 있다. 용케 살아남아서,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그 아이가 제러드보다 오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꽃과 잎이 진 고목에서도 새싹이 핀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왜 아직도 살아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월만큼 깊어진 주름에 눈물이 고여, 그것이 턱밑으로 떨어지는 것에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스스로 눈물을 흘리는지도 몰랐다.

에리히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굳이 공왕을 위로하려거나 손수건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굳이 잘하지도 못하는 일에 손을 내밀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고저 없는 차분한 어조로 공왕이 알아야 할 일만 말했다.

“저와 아내가 그 사실을 숨기기로 한 것은, 엘리엇이 사생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권리를 다툴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은데 친부를 밝혀 봐야 위험만 늘어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증거도 없었다. 엘리엇이 제러드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내려면, 엘리사가 제러드와 교제했다는 사실부터 증명해야 했다.

그들 부부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공왕에게 남몰래 알려 주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공왕은 긍정했다.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더 일찍 알고 싶었다고 마음 바닥에서 외치는 반면,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이의 안전을 위한다면 에리히의 아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나았다.

“지금도 그래서.”

“아니요. 만일에 이 일을 끝까지 숨길 거라면, 전하께도 알리지 않았을 겁니다.”

에리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엘리엇은 사생아가 아닙니다.”

“뭐?”

“언약서가 있습니다. 프란츠의 진술을 듣고 제가 사람을 보낸 결과, 언약서와 주관자인 사제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아렌 공왕이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레이디 엘레나가 그 언약서에 증인으로서 서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트마이어로 찾아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공왕 전하.”

에리히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명확하게 말했다.

“엘리엇이 정당한 제1위 황위 계승권자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단순히 사랑의 결과물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아렌의 하급 귀족. 신분은 낮지만, 오래된 전통을 가진 영주 가문.

고난이 있겠지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이미 그와 클레어의 결혼이 증명했다.

그러나 한쪽이 황태자인 이상, 그건 가십거리와 사랑 이야기로 끝날 수 없다.

아렌의 남작 영애가 황후가 되고, 그 소생이 차기 황제가 된다.

그 결혼은 단순히 로멜과 아렌을 통합한다는 목적을 넘어서서, 아직 논란이 있는 계승법을 단숨에 확장시켜 진정한 의미에서 귀천상혼을 없앴으리라.

[그 많은 사람이, 아무런 정치적 의도도 없이, 스무 살짜리들의 연애 때문에 목숨을 버렸을 리가 없잖아요.]

클레어는 거의 절망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자랑으로 여기는 총명한 여동생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이는 로멜의 대귀족들이 쥐고 있는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15년을 그늘에서 암약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온 황후가 갑자기 과격한 방식의 암살에 나선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제 자식으로 키워도 되긴 하겠습니다만…… 제러드의 유지를 외면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무엇보다도, 엘리엇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제 이 일은 끝을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이 가만히 있어도, 황후가 그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 공왕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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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는 더 길어졌다.

놀아 주던 윌리엄이 불려 가고 나자 엘리엇은 혼자 정원에서 놀게 되었지만,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공왕 할아버지가 준 개구리 장난감은 잘도 울었고, 여기저기 잘 달라붙었다.

“우와!”

꽁무니에 달린 실을 당기면 피이익, 피리 소리를 내면서 펄쩍 뛰었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빠, 엄마, 아기가 다아 모여서.”

엘리엇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것을 당겨서 바닥에 놓고 개구리가 펄쩍 뛰는 것을 구경했다. 잘 붙으니까, 나무에 붙여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서 엘리엇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엇, 도련님.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보좌관이 뒤따랐다. 엘리엇은 팔짝팔짝 뛰며 길도 나지 않은 정원의 수풀을 헤쳤다.

“와! 연못!”

작은 인공 연못과 수로가 있었다. 엘리엇은 개구리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겨울이라 개구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앗!”

그래도 엘리엇은 개구리를 개구리답게 놀게 해 주려고 쪼그리고 앉아 연못가 바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평소에 물가에서 마사가 해 주는 것처럼 소매를 걷으려고 했다.

“어?”

에리히가 소매에 달아 주었던 파란 돌이 없었다. 엘리엇은 울상이 되었다.

“안 돼! 아빠가 준 건데!”

엘리엇은 발딱 일어섰다. 개구리 장난감은 잊어버리고, 커프스 링크를 찾으러 되돌아갔다.

“앗, 도련님!”

평소에 엘리엇을 돌보던 이들이라면 좀 더 능숙하게 대처했을 터이다. 그러나 제니는 일을 그만두었고, 마사도, 막시밀리안도 없었다.

보좌관은 당황하여 개구리 장난감을 회수하러 갔다. 공왕께서 주신 것이니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엇을 놓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저택 전체를 아렌 공왕의 호위들이 둘러치듯 감싸고 있었고, 별채에 클라우제너의 호위들이 또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엘리엇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도련님?!”

보좌관이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엇은 자기가 지나쳐 왔다고 생각한 수풀로 쏙 기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실은 그 방향이 아니었다.

“파란 돌, 파란 돌. 아빠의 파란 돌.”

뭘 찾고 있는지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한참 풀숲을 기어 다니는데, 누군가의 손이 불쑥 엘리엇의 눈앞에 나왔다.

“네가 찾는 게 이거니?”

손바닥에 작은 사파이어 커프스 링크가 놓여 있었다.

“앗! 내 거!”

엘리엇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병색이 완연한 금발의 중년 남자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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