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제 거예요! 고맙습니다!”
엘리엇이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중년 남자는 그것을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돌려 달라고 부르려다가 엘리엇은 머뭇거렸다.
처음에는 아저씨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묘하게 나이 들어 보였다. 엘리엇은 망설이다가 할아버지 하고 말을 고쳤다.
아파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엘리엇이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그거 돌려주세요.”
초조해져서 엘리엇은 두 손을 힘껏 뻗었다. 남자가 이번에는 엘리엇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있다가 툭 말했다.
“네가 에리히의 아들이구나.”
“우리 아빠를 아세요?”
엘리엇은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빠의 친구라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알지. 그렇구나, 네가 에리히의 아들이로구나.”
“웅…….”
“닮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로 많이 닮았어.”
“헤헤.”
사실 아빠는 아빠가 아니다. 아빠가 됐지만, 진짜 아빠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빠를 닮았다는 게 좋았다.
마사와 클레어는 엘리엇에게 가족끼리는 서로 닮을 수도 있는 거라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아빠를 닮았다는 건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빠를 닮았다는 사실을 좋아한다는 것을 엘리엇은 알고 있었다.
마사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닮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다.
“손을 이리 주렴.”
“손?”
엘리엇이 저항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엘리엇의 작은 손을 쥔 채 한참 말이 없었다.
엘리엇은 다시 그를 불러야만 했다.
“아저씨, 뭐 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엘리엇의 소맷자락을 여며서 커프스 링크를 달아 주었다.
“와, 고맙습니다.”
“떼서 가지고 놀고 그러면 안 돼. 그러다 잃어버리고 울지 말고.”
“제가 뗀 거 아니에요. 떨어진 거예요.”
엘리엇이 항의했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팔을 휘두르면서 다녔구나. 에리히는 어릴 때도 그러지 않았단다.”
“웅…….”
“아주 완벽하게 신사다웠지. 싸울 때만 빼고 말이다.”
“아빠가 싸웠어요?”
“네겐 아닌 척하는 모양이지?”
“싸우면 꼭 상대방을 울려야 된댔어요.”
그 말에 남자가 잔물결처럼 웃었다. 행복했던 옛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리히답구나.”
“아저씨는 아빠의 친구예요? 아니면, 친척이에요?”
“친척이지. 외삼촌이란다.”
남자가 묘하게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엇이 신나서 말했다.
“저도 외삼촌 있어요! 찰스 외삼촌이에요!”
“그렇구나.”
“근데 외삼촌은 저랑 하나두 안 닮았어요. 아저씨는 그러면 웅……. 외삼촌 할아버지?”
엘리엇이 손가락을 꼽으며 세어 보았다.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문득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발작적으로 숨이 막히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워지고 손발이 떨렸다. 그는 추위를 느꼈지만, 진짜로 추운 건지 몸이 식은땀에 젖어서 추운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더운 것일지도 모른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발작적으로 팔다리가 뒤틀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그는 몸을 경련시켰다. 코에서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향합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손끝에 보드라운 것이 닿았다. 그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앞에 제 아이가 있었다.
“제러드……?”
그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는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작을 일으키려는 것을 본 시종이 뛰어나와 그를 부축하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움찔 멈추어 섰다.
“아저씨? 할아버지?”
착란 상태에 빠진 남자는 충동적으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엘리엇은 깜짝 놀랐다.
“앗!”
하지만 별달리 저항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외삼촌이면 친척이다. 낯설어서 놀란 것뿐이다.
커프스 링크를 찾지 못한 보좌관이 뒤따라온 것은 그때였다.
“도련님, 헉, 황제 폐하?”
철컥!
아이가 기어들어 왔을 때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호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총부리 십여 개가 단숨에 그를 겨누었다. 총검 두 자루가 목 앞을 위협적으로 가로막았다.
보좌관이 경악하여 그 자리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려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호위 하나가 그의 허리춤과 가슴을 뒤져 무장을 해제시켰다.
엘리엇이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보좌관 아저씨가 왔는데?”
“지금은 귀찮으니 내버려 두렴, 제러드. 보고는 나중에 받으면 된단다.”
보좌관이 소리쳤다.
“폐하! 그분은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의 장남입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엘리엇을 안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때 선룸의 어른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차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공왕은 완전히 지쳐 넋 나간 사람처럼 긴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에리히는 아직 반듯한 자세를 지키고 있었으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찬물과 얼음을 가져오라고 시켜, 진하게 우린 차에 섞었다.
클레어가 이렇게 마시는 것을 처음 봤을 때는 괴상한 식습관이라고 생각했으나, 일단 손대 보자 피곤할 때마다 생각났다.
“저도 좀 주십시오.”
윌리엄이 간절히 말했다. 에리히는 그에게도 얼음물과 진한 차를 가져다주라고 명했다.
윌리엄이 차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선배님.”
“뭔데?”
“결국 황태자 전하께서 하려던 일은 아렌에 더 많은 무게를 실어 주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물론 선배님은 아렌 남작과 결혼하셨지만, 클레어는 선배님에게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니까요.”
그는 로멜의 대귀족이자 지배 가문의 주인으로서 기존 사회 질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황태자가 하려던 일은 그와 대척점에 있었다.
에리히는 얼음을 까득 씹어 삼키고 태연하게 말했다.
“확실히, 제러드의 정견이 나와 일치하지는 않지. 그렇게 억지로 저울추를 맞추려고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게 기존 질서를 흐트러뜨리기 때문이 아니라 고작해야 황제의 결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건 백 년 전의 방식이다. 프리드리히 대제 때는 양국의 왕실을 통합하여 나라를 합치는 것이 가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이 지나자 결국 지금 같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물며 이제 황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땅에 뿌리박힌 문화와 관념이 훨씬 강하며, 그것이 의회와 내각을 지배할 것이다.
차라리 아렌에 예산을 쏟아부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었으리라.
그래야 아렌인들이 제힘으로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균형을 맞출 테니.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
[혈통이니 충성이니, 모두 예스러운 짓거리죠.]
클레어는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듣자마자 에리히는 감정적으로 반발했으나 그녀를 알아 온 삶의 일부와 이성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년 전의 가문 중 남아 있는 곳이 얼마 없듯이, 지금의 귀족 가문이 모두 지켜져야 하는 법도 아니다.
“하지만, 엘리엇이 이미 피로 대가를 받아 버렸으니까.”
그것은 혈관에 흐르는 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흘린 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엘리엇은 태어나기도 전에 목숨을 받고 명예를 내려 주었다. 그러니 마땅히 주군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리고 어린 엘리엇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 부모가 대신 맡아 주어야 마땅했다.
모순된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가문과 위치를 지키는 일이 그 예스러운 ‘짓거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반면, 똑같은 이유로 엘리엇이 받은 피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이제 황후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는 결국 이 의무를 떠맡았으리라.
“그리고 아마 제러드가 살아서 이 일에 협력해 달라고 했어도, 결국 도와주긴 했겠지.”
클레어가 예외가 되면서,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고 익혀 온 가치관은 이미 깨졌다. 그게 아니면 아렌 남작에게 청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제러드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나는 제러드가 하필 클레어의 동생을 택했다는 게 정말 놀라운데. 어쩌다가 이런 우연으로. 물론 델포드는 적합한 가문이지만, 그 비슷한 가문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우연일 리가 있겠습니까?”
에리히의 의문에 윌리엄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