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윌리엄이 말했다.
“그야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고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오래 섞은 건 우연이 아니었겠죠.”
에리히가 그게 무슨 의미냐고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선배님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친분이 깊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당연히 델포드라는 이름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고작해야 델포드를?”
“아니, 이분이 진짜. 황태자 전하는 선배님이랑 친했다면서요.”
본인이 클레어의 이름을 얼마나 입 밖으로 많이 냈을지 아직도 자각이 없는 건가.
윌리엄은 황태자를 잘 몰랐으나, 그가 클레어의 이름부터 눈동자 색깔까지, 몰랐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엘리사는 예뻤으니까 처음 말을 건 건 그 때문이었겠지만, 솔직히 클레어 이야기로 화제가 터졌을걸요.”
자신이 황태자라 해도, 에리히가 관심 갖는 클레어의 여동생이라고 하면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봤을 것이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왔던 것부터 클레어가 궁금해서 찾아왔던 게 아니었을까?
에리히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원망 들을 이유가 하나 늘었군.”
“뭐, 어쩌겠습니까?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거라지 않습니까?”
윌리엄이 놀리듯이 말했다. 에리히가 그를 노려보았으나 절대 굴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참, 두 분은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취향도 닮으셨군요.”
“뭐?”
“직접 보셨으면 꽤 마음에 들어 하셨을 겁니다. 엘리사가 겁이 없었거든요.”
엘리사는 클레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윌리엄은 황태자와 엘리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나, 그녀가 상대의 신분을 알고도 전혀 놀라지도, 겁먹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건 좀 이해가 가는군.”
에리히는 클레어가 자신의 여동생을 깃털로 만든 천사 인형처럼 달콤하고 연약하게 묘사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 소녀였다면, 대담하게 제러드의 손을 잡았을 리 있겠는가. 그 어린 연인이 하려던 일은 솔직히 그 나이에 직접 시도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모한 일이었다.
‘클레어가 좀, 자기 식구 상대로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편이긴 하지.’
엘리엇은 확실히 천사지만.
본인도 고슴도치인 줄은 모르고 에리히가 그렇게 생각했다.
“내게 오기라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긴 의자에 누워 지친 듯 쉬고 있던 공왕이 탄식했다.
“내 탓이네. 내가 제대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더라면, 내게 왔을 텐데…….”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엘리사 델포드는 그날 막 사교계에 데뷔했습니다. 결혼 허락을 받고자 해도, 그 뒤의 일로 계획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엘레나 부인이 프란츠와 함께 선룸에 들어섰다. 에리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디 엘레나.”
그는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엘레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가 마땅히 종종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군요.”
“바쁜 분에게 그런 기대까지는 하지 않는답니다.”
엘레나 부인이 주름진 입매에 미소를 머금었다.
에리히도 약간 웃었다. 옛날 같으면, 그는 그 말을 좀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그만큼 무정했다는 의미인 것을 이해하겠다.
“제가 그다지 다정한 사람은 못 되지요. 그래도 수도에 계셨다면 간혹 찾아뵙긴 했을 겁니다.”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기쁠 따름입니다.”
엘레나가 프란츠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다. 프란츠의 얼굴도 온통 벌겋게 부어 있었다.
“프란츠도, 이렇게 데려와 주셨고.”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리히는 겸양하고, 이번에는 프란츠에게 물었다.
“모친께서는 괜찮으신가?”
“놀라서 까무러치신 것뿐이니까요. 정신이 드셨습니다.”
프란츠가 갈라져 터진 것 같은 성대로 겨우 말했다.
“가족 간에도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급할 것은 없어. 공왕 전하께 드려야 할 말씀은 다 드렸네.”
“부모님께서 진정하시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좀 주무셔야 하고, 아버지에게도 그러시라고 권했습니다. 그간의 이야기는 한두 시간 사이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는 살아 있었고, 이제 얼마든지 가족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수 엘레나의 의자를 빼 주었다.
아렌 공왕이 눈가에 얹고 있던 손을 내리고 일어나 앉았다. 시종이 그에게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그 물수건으로 얼굴을 한번 닦은 후에 엘레나에게 물었다.
“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프란츠에게서 대강 사정은 전해 들었습니다.”
엘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서명을 부탁하셔서 해 드린 적이 있긴 합니다. 그게 언약서인 줄은 몰랐지만.”
“내용을 모르고 서명하신 겁니까?”
“소중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유언장 같은 것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내용을 알리지 않고 서명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엘레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성인이 되셨으니까요. 상황을 생각하면,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해서 가까운 이들에게 글을 남겨 두고자 하셨어도 이해할 수 있었고요.”
별다른 내용이 없어도, 진짜 자신이 쓴 편지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증인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군…….”
공왕이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프란츠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사 님에 대해서, 황제 폐하께만 말씀 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반대하시다가, 정 그러면 무어 공작님의 양녀로 하여 결혼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지요.”
“제러드가 그걸 거절했나?”
“예. 두 분 다.”
“어려운 길을 택했군. 그걸로는 계승법의 확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겠지만.”
에리히가 중얼거렸다.
클레어가 알았다면, 정말로 크게 반대했을 법하다. 그녀는 일개인의 힘으로 세상이 바뀐다고 믿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키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마 여동생이 진전이 생기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에리히는 생각했다.
‘원망을 사겠군.’
그녀가 화내는 것은 좋지만, 미움받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은데.
하지만 제러드가 엘리사와 대화를 나누게 된 원인이 자신이라면, 그녀는 분명히 원망할 것이다.
그때였다.
엘리엇을 돌보라고 보낸 보좌관이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혼자였다.
“각하, 공작 각하!”
“무슨 일인가? 엘리엇은?”
“황제 폐하께서……!”
보좌관이 부르짖었다.
“황제 폐하께서 도련님을 데려가셨습니다!”
“뭐?!”
에리히는 경악하여 벌떡 일어섰다.
“그게 무슨 소린가? 황제 폐하가 왜 여기에 계신다는 건가? 호위는?”
“여기 계셨습니다!”
보좌관이 억울한 듯이 말했다.
아렌 공왕의 호위가 빈틈없이 별채에 배치되어 있었다. 클라우제너의 호위가 알트마이어 저택 전체의 보안 계획을 잡을 때, 별채만 예외로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별채의 정원 전체에 호위가 있었을 터이다.
에리히는 아렌 공왕과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아렌 공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모셨네. 황궁에서 벗어나는 게 병세에 도움이 될 테고, 엘리엇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저 닮았을 뿐, 에리히의 친자라고 생각했을 때 결정한 일이다.
바람도 쐬고, 상태가 좋으면 다정한 친척 아이를 만나 잠깐의 기쁨도 누리면 좋다.
에리히가 거절한다면 먼발치에서 잠깐 보게 할 작정이었다. 자신에게 엘리엇이 위안이 되었으니 황제에게도 틀림없이 그럴 테니까.
에리히가 벌떡 일어섰다.
“레이디 엘레나, 폐하의 거처는 어디입니까?”
물론 그도 황제에게 엘리엇을 데려가 알현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다.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자신이 동석한 채 해야만 한다.
황제가 온정신을 잃은 것은 이미 수년 전의 일이다. 그는 극도의 무기력증을 앓고 있으며, 하루 중 대부분을 아편이 섞인 향을 피워 놓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발작을 일으키고 착란 상태에 빠지는 것도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아이 혼자 만나게 할 수 있겠는가.
클라우제너의 이름으로 막지 못할 사람이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줄 알았다면, 후원에 나가 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왕이 사과했다.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이라, 잊고 있었다.
“이건 내 실수군. 폐하께서 정원으로 나오실 줄 몰랐어.”
“이해합니다. 폐하께서는 지난 몇 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는 일 자체가 드무셨으니.”
에리히는 그렇게 대답했으나 다급히 선룸을 나섰다.
엘레나가 서둘러서 앞장서고, 공왕이 그의 뒤를 따랐다.
별일 없을 것이다. 황제가 아이를 데리고 떠나려 하기라도 했으면, 밖에서 지키고 있는 클라우제너의 호위와 충돌하여 벌써 소란이 일어났을 테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를 어른이 해치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하며 소란조차도 필요 없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급한 일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마차 준비가 끝나지 않았느냐?”
황제의 신경질적인 물음에 근위대장 로건은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준비 중입니다.”
황제는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암살자가 오면 모든 게 무산된다. 또다시 아이를 지키지 못할지도 몰랐다.
제러드는 쫓기다가 죽었다. 목숨을 빼앗은 상처는 대부분 등 뒤에 있었다.
‘제러드가 죽었어?’
황제는 약간 멍해진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아이를 안고 달아나다 총에 맞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