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보라. 지금 앞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왜 그래요?”
“왜, 그러느냐니?”
“아파요?”
내려놓은 소파에 그대로 얌전히 앉아 있던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털썩 안락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별것 아니다. 사실 그는 좋은 상태인 날보다 이런 날이 더 많았다.
머리도 아팠지만, 그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약손 해 줄까요?”
“약손?”
“우리 엄마는 내가 이거 해 주면 하나도 안 아파진대요. 공왕 할아버지도 그렇댔어요.”
엘리엇이 소파에서 뛰어내려 총총 그에게 달려와서는, 태연하게 무릎 위로 기어올라 왔다.
황제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제러드가 헨리에타의 무릎 위에 앉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곧 그런 모든 생각을 잠시 잊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무게가 무릎 위로 실려 왔다. 그는 행여나 자신이 잘못 움직였다가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엘리엇이 말랑말랑한 손으로 토닥토닥 황제의 머리를 만졌다.
“아기 손은 약손. 나아라, 나아라, 나아라.”
“하하.”
황제는 어금니를 문 채 웃었다. 불현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의 병은 이런 것으로 낫지 않고, 통증이 실제로 사라졌을 리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 쉬는 게 조금 나아진 기분이었다.
뒤늦게 시종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뒤에서부터 그에게 약통을 내밀었다.
이런 약 따위를 먹어서 무슨 소용이냐 싶어서 그는 좀처럼 약을 제때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한순간 고통을 덜어 주는 것뿐인데, 효과가 향합보다 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런다고 즉각적으로 상태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황제는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돈하려고 애쓰며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제러드는 등에 총을 맞고 죽었는데, 왜 여기에 있을까? 자신은 또 환각을 보는 중인 건가?
“내 아이가 아니야.”
그는 중얼거리면서 고통스럽게 팔걸이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몽롱하여 어지러웠다. 머릿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뇌의 표면을 스쳐 가는 이성이 서로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수천 번을 과거로 되돌아가는 망상을 했다. 다시 사는 것을 꿈꾸었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아내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아이라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다시 살 수 있다면, 아내가 임신한 후에 모든 음식을 스스로 기미하고,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을 전부 혀로 핥아 독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직접 의술을 배우는 게 좋겠다.
헨리에타가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녀는 임신 직후부터 이미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아기를 낳고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원인은 불명이었다. 의사들은 출산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져서일 거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는 동안 잠들 수 없었고, 밤에 잠들지 못하니 낮에 두어 시간쯤 의식이 꺼지듯이 잠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것이 십 년 넘자 상실감이 어느 만큼 사그라진 뒤에도 제정신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곤 한다는 것을 그는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있는 동안에는 정신을 놓을 수 없었으니까.
복수를 미뤘다.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아이를 안은 채 증오를 불태울 수 없었으니까. 아내는 아이가 온통 피에 젖은 황궁에서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으리라.
그는 버티기만 할 작정이었다. 그자들이 원한 것이 권력이라면 넘기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다 자라 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때까지 황제의 관을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아니, 그것도 뒤늦게야 했던 생각이다. 아니면, 너무 일렀거나.
그는 천 번을 넘게 했던 생각에 또다시 잠겨 들었다.
다시 살고 싶었다. 아내가 죽은 뒤라도 좋다. 그날의 전날이기만 해도 좋다. 혹은 전전날이기만 해도 좋다. 사흘 전이기만 해도, 나흘 전이기만 해도 좋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렇게 숫자를 늘려 가며 그 전날로 되돌아가는 것을 꿈꾸었다. 그러면 그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처럼.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는 어린 아들을 안고 달아나는 꿈을 꾸었다. 제러드가 죽은 그 숲에서.
제러드는 이미 다 자라 있는데도 그는 알지 못했다.
[제 행복을 먼저 생각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제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문을 닫고 들어간 공간에서 이 삶의 치열함을 잊고 다정한 말을 나눌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는 너무 어려.]
[아버지는 영원히 제가 어리다며 반대하실 겁니다. 진짜로 원하시는 건 제가 타협하여 로멜인의 황제가 되는 것일 테니까요.]
아들은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예리한 눈과 강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해야 제가 안전하고, 또 제국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가족만 끌어안은 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아버지가 행복이라고 여기시는 삶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뭐?]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피를 대가로 받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러드!]
[이대로라면 제가 아렌식 이름을 가진 마지막 황태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버지. 제가 제 이름에 합당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이제 황실에서 아렌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아내와 얼굴도 모르는 소녀가 그의 양쪽 귀에 원망을 속삭였다. 당신이 믿고 도와주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랬다면 제러드는 살았을 수도 있다고.
그 때문에 꿈속에서 이렇게 늘 어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사탕 한 알에 행복해하던 때는, 진짜로 자신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눈을 깜박거리는 그에게 엘리엇이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많이 아픈가 보다.”
“그래.”
“아빠는 언제 와요? 아빠 오면 제가 아빠한테 할아버지를 고쳐 주라고 할게요.”
아빠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아이의 순진한 믿음이 귀여웠다.
제러드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
“글쎄다. 나는 병이 난 게 아니라서.”
“그럼 아픈 게 아닌 거예요?”
엘리엇이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그의 팔을 주물러 주며 물었다. 보들보들한 아이 손으로 눌러 봐야 자극조차도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증을 경감시켜서 황제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어째서 아렌 공왕이 이 아이를 만나고 기쁨을 얻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잃은 것이 떠올라, 폐부를 쑤시는 듯 고통만 더 심해졌을 따름이다.
“나는 이제 괜찮다. 네 이야기를 해 보렴. 초콜릿은 좋아하니?”
“초코!”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쳤다.
“진짜 진짜 좋은데 엄마가 맨날 못 먹게 해요.”
“그러면 내가 주어도 안 되겠구나.”
엘리엇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건 괜찮은데.”
엘리엇이 웅얼거렸다.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누가 주더라도 유모나 엄마의 허락 없이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 때문에 아빠가 혼나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황제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아이를 데려왔을 때부터 준비된 것이 있었기에, 시종은 곧 초콜릿 케이크와 우유를 내왔다.
황제의 다과상에는 언제나 초콜릿 케이크나 쿠키가 한 가지 나왔다. 착란 상태일 때 종종, 어린 아들을 달래기 위한 간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초콜릿 크림이 잔뜩 발린 케이크가 나오자 엘리엇이 헉 숨을 들이켰다. 몰래 하나 입에 쏙 넣고 잊을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라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웅……. 내가 허락 없이 케이크 먹으면 아빠가 혼나는데.”
엄마도 마사도 같이 오지 않았으니까, 허락해 줄 사람이 없다. 엄마가 분명히 아빠한테 화를 낼 것 같았다.
그건 너무 미안한 것 같아서 엘리엇은 망설였다.
황제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비밀로 하면 되지.”
“비밀?”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밀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달콤한 울림이 있었다. 엘리엇과 비밀을 함께해 주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엄마랑 아빠는 맨날 자기들끼리만 비밀을 만들었다. 아빠는 자기랑 친구라고 해 놓고, 맨날 윌 아저씨나 후크 선장 아저씨랑 비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만 끼워 주지 않기도 했다.
그러니 나도 비밀을 만들어야지. 게다가 그 비밀에서 달콤한 냄새까지 나니까 얼마나 좋은가.
“좋아요. 그러면 할아버지랑 저만의 비밀인 거예요.”
엘리엇이 신나서 말하자 황제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아내에게 아이 교육에 좋지 않다고 혼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네!”
엘리엇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포크를 들었다.
에리히가 도착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평소에 쓰이지 않았던 저택 동관은 그때도 고요했다. 근위대는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호위는 대부분 몸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근위대장 로건이 현관에 나와 있었다.
“로건 경.”
에리히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다는 듯이 그의 이름만 불렀다.
로건이 기다렸다는 듯이 길을 열어 주었다. 황제가 데려온 것이 누구의 아들인지 이미 짐작했던 데다가, 함께 온 아렌 공왕은 언제나 알현이 허락되어 있는 몸이었다.
“고맙네.”
에리히는 짧게 답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요! 엄마가 그때 이따만 한 연을 만들어 줘서요!”
거실에서 엘리엇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히는 형식적인 노크만 하고 문을 열었다.
“앗, 아빠 왔다!”
다행히 엘리엇에게는 별일이 없었다.
별일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신나서, 얼굴에 온통 초콜릿 크림을 묻히고 포크를 휘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