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에리히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아빠!”
포크를 쥔 채 달려오던 엘리엇이 갑자기 생각난 듯 얼른 손을 뒤로 숨겼다. 제 얼굴에 묻은 것이나 테이블에 놓인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손에 든 포크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에리히는 아이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 시종에게 넘겨주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엘리엇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초코 케이크 안 먹었어!”
“…….”
“진짜예요!”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편들어 달라는 듯 아렌 공왕 쪽을 홱 돌아보았다.
“공왕 할아버지!”
아렌 공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바동거리는 작은 몸을 제 쪽으로 누르듯이 붙들었으나, 엘리엇은 기어이 그 손에서 빠져나가 아렌 공왕의 품에 뛰어들었다.
“헤헤.”
아렌 공왕은 조그마한 몸을 끌어안았으나, 걱정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자신인 것 같아 염치가 없었다. 에리히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무조건 편들어 주신다고 다가 아닙니다.”
“알지. 나도 아네.”
공왕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낯선 사람이 준 걸 함부로 입에 넣지 말라는 교육은 다시 해야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황제가 지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히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
“……오랜만이구나.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는데 내가 그러지 못했지.”
핏기 없는 손이 허공을 저었다. 발작과 섬망 뒤에는 으레 무기력이 찾아오곤 했다. 아이를 상대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었으나,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저 시선을 마주하는 데만도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미안하구나.”
결국 황제는 비탄에 잠긴 얼굴로 눈을 감아 버렸다. 제러드를 닮았지만 너무 다른 그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은 늘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몸이 편치 않으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로 서운해하지 않으니 염려 마십시오.”
“네 아내와 아이를 한번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보러 가자는 아렌 공왕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남지 않은 황궁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밖이 나을 것 같았다. 비록 그는 모든 일을 내팽개쳤으나 가족에 대한 기억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에리히는 제러드와 친했고, 요절한 누이를 생각해서라도 조카에게는 마음을 써야 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 알트마이어라는 것도 그가 움직인 이유였다. 알트마이어는 언제나 충실했으며, 제러드를 위해 목숨을 던진 장남을 생각하면 거듭 위로와 치사를 건네도 부족했다.
이 기회에 한 번 더 만나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출발할 때는 계획이 많았으나 정작 이곳에 당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황궁에서 나오지 않는 쪽이 나았으리라. 공왕은 위로가 되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릇된 원망이 솟아올랐다.
한때는 형제처럼 닮은 아이들이었는데, 에리히는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저를 닮은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제러드의 삶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게 에리히를 원망할 일이 아닌 줄은 안다. 그저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자기 자신부터, 제국과 세상까지.
“아이가, 무척 너를 닮았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널 닮은 거지.”
황제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에리히는 물끄러미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의 돌발 행동은 엘리엇을 위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클레어의 계획에 지장이 될지도 몰랐다. 감당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배제하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는 시종이 향합을 든 채 머뭇거리는 것을 흘끗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종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깨달은 황제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허탈하게 물었다.
“날 경멸하느냐?”
“옳은 선택을 하셨다고는 할 수 없지요.”
에리히는 냉담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썼다.
혈통은 자질을 담보하지 못한다. 황제가 슬픔에 잡아먹힌 것은 그가 심약하기 때문이다.
제러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애써 버텨 온 것 같지만, 실은 에리히는 그때도 이미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 암살 사건 이후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에른스트를 비롯한 귀족원의 주요 세력과 타협하여 내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에 동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제는 위정자로서 자격이 없다.
하지만 아내와 아이가 생긴 지금, 이해까지는 할 수 없어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에리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종의 손에서 향합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이것을 끊고 온전한 상태가 되지 않으신다면, 저는 보호자로서 폐하와 엘리엇을 만나게 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이는 귀여웠다. 그러나 그것이 제게 무슨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에리히가 아렌 공왕을 돌아보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공왕 전하께서 맡아 주십시오.”
이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슬픔과 비탄을 함께 나눌 사람이어야 한다.
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엘리엇을 안아 들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라는 걸 깨달은 프란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황제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얼굴을 훑는 초점 흐린 시선을 받으며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를 기억하십니까? 알트마이어의 프란츠입니다.”
“알트마이어 경.”
황제가 앵무새처럼 반복했다가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 전하의 마지막 명령을 들은 사람으로서, 또한 황태자 전하의 결혼 서약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올려야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혼, 서약?”
황제가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리히는 그 목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미처 현관 밖으로 나서기 전에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황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엇이 깜짝 놀라 에리히의 어깨를 껴안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어떡해요, 아빠. 저 할아버지 진짜 많이 아픈가 봐.”
“괜찮으실 거다.”
설령 괜찮지 않더라도, 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몫이다.
“그나저나 엘리엇,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모르는 사람 아냐. 아빠의 외삼촌이라고 그랬는데?”
“거짓말이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앗. 거짓말이에요?”
에리히는 곤란해졌다.
“아니, 외삼촌인 것은 맞다만…….”
“에이.”
그것 보라는 듯이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또다시 이걸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무서운 일은 없었고?”
“쪼꼼 무서웠는데……. 막 자꾸 이렇게 몸 흔들고, 날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고. 근데 아픈 건 불쌍하게 여겨야지 무서워하면 안 된다구 했으니까.”
“그랬었나?”
“그래서 약손 해 줬는데 웃었어요. 제임스 할아버지가 혼내는 것보다는 안 무서웠는걸.”
경계심을 가르쳐야 할지, 용감했다고 칭찬해 주어야 할지 헷갈려서 에리히는 잠깐 망설였다.
“아빠가 고쳐 주면 안 돼요?”
“폐하를?”
“응. 의사 선생님을 불러서!”
“글쎄다. 어떤 병은 의사도 못 고치거든.”
“웅…….”
엘리엇이 슬픈 얼굴을 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참, 나 공왕 할아버지가 준 개구리 잃어버렸어요!”
“그건 찾아 두었다.”
“진짜요?”
엘리엇이 기쁜 듯이 웃었다. 그러더니 생각난 듯이 손목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리고 파란 돌도 안 잃어버렸……. 앗!”
여밈이 풀린 셔츠 소매가 펄럭거렸다. 에리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크 먹다가 신나서 팔 흔들었지?”
“아, 안 먹었는데…….”
엘리엇이 윗니에 아직도 거뭇거뭇한 크림을 묻힌 채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에리히가 속지 않았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한 입밖에 안 먹었는데…….”
“케이크는 괜찮아. 하지만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먹으면 안 돼.”
“그치만.”
엘리엇이 투덜거렸다.
그때 근위대장 로건이 다가왔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기다려 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폐하께서 내리셨던 황명을 따른 것뿐이니까요.”
이제 근위대는 완전한 문서로 작성되어 인장이 찍힌 것이 아니면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따르지 않는다.
황제가 그 규칙을 만든 것은 4년 전의 일이다. 착란 상태에 빠진 자신의 명령 때문에 오히려 안전에 해가 될까 봐 우려한 것이다.
‘무의미한 시간 벌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무의미한 일이 아니게 되었군.’
에리히가 생각했을 때였다.
비서 하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조금 전에 전령이 가져온 소식입니다. 하원 감찰청이 공작 부인을 고발했습니다.”
로건이 깜짝 놀라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에리히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계획된 일은 문제라고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