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이게 전부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던 건가? 기가 막히는군.”
황후의 주위에는 지난 몇 주 동안 발간된 신문이 시간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표제와 내용을 큰 종이 한 장에 요약 정리한 보고서가 앞에 놓여 있다.
막내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제 눈에는 신문을 팔아 보려고 허튼소리를 늘어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율리아, 황후 폐하께서 까닭 없이 고심하시겠느냐?”
레나테가 그녀를 꾸짖었다. 율리아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고도 반박했다.
“황후 폐하께서 처음에 내리셨던 명에서 많이 어긋난 상황인 것은 알고 있어요. 황금 새싹단의 수장이 치정 문제 때문에 일방적으로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문제의 초점을 그렇게 만들면, 델포드 남작의 후원을 받고 있노라고 했던 것도 전부 거짓말로 일축할 수 있다.
클레어 델포드가 반로멜 사상을 가지고 황금 새싹단을 지원했다고 말해도 이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뭐가 아쉬워서 테러 조직을 후원한단 말인가. 그녀는 엄연히 귀족이었고, 막대한 재산을 쥔 사업가였다.
그리고 이제는 로멜에서 가장 고귀한 숙녀 중 하나다. 어떻게 생각해도 불만분자가 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뉴먼의 머그샷과 함께 신문에 나란히 박힌 에리히의 초상화가 설득력을 더했다. 공작 부인이 이 남자를 두고 저놈의 손을 잡는다? 시각적으로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이게 치정 문제가 되어도 어차피 그냥 그게 끝이 아닌가요? 황후 폐하께서도 에머슨 공단의 일을 중단하기로 하셨었고요.”
“그것부터 문제였지. 황후 폐하께서 그만두시기 전에, 감찰청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으니까.”
황후의 명을 받은 감사관이 에머슨 공단에 당도하기 전에 다른 감사관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이렇게 되면, 황후파의 감사관은 에머슨 공단 일을 맡을 수가 없었다.
감찰청 내부에도 경쟁이 있다. 권력이 강한 기관인 만큼 감사관끼리의 신경전도 어마어마했다.
이미 다른 자가 맡았는데, 그 일을 일방적으로 빼앗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부자끼리의 문제이기에 더 그랬다.
황후가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클라우제너에 직접적으로 싸움을 거는 일이 된다.
황후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대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황후의 이름으로 직접 행정부를 움직이려고 해 봤자 반발을 살 뿐이다.
게다가 움직인 감사관은 체펠린 후작의 입김을 쐰 자였다. 체펠린 후작까지 이 일에 개입하게 되면, 하려던 일이 까발려지게 된다.
아니, 궁극적으로 문제는 그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게 단순히 에머슨 공단에 뿌려 놓은 씨앗을 없애기 위해 하는 일일 리가 없어. 그게 목적이라면, 감사관을 매수하는 것으로 충분해.”
고발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으로 마무리 짓게 하면 끝난다. 그 정도라면 에리히의 힘을 빌릴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클레어 델포드는 사람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매수된 감사관이 오히려 물주를 고발했다.
거기에 본인의 의사가 들어가 있지 않을 리 없다. 그것은 일을 무마하여 끝내려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연단 위에 선 사람을 암살하는 건 불가능하지.”
황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후라고 해서 그동안 언론을 무시했을 리가 없었다. 믿음직한 심복을 통해 신문사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소유한 것은 모두 정론지였다. 화력을 모으는 부분에서 전혀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황후는 지금까지 의제를 선점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녀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은 숨겨졌다.
늘 자신에게 유리한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만 의제로 올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찬반이 있더라도 그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황후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요컨대, 루덴도르프 항구를 증축할 것인가 말 것인가, 증축한다면 예산을 얼마나 줄 것인가를 의회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반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렌에 국책 사업을 줄 것인가는 아예 의제로 오르지 않았으므로 찬성할 기회 자체가 없다.
이것을 인지하는 자는 오로지 일부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는 화제가 의회까지 얽은 채 수도 전체를 끓어오르게 했다.
델포드 남작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진흙탕의 소용돌이 속으로 의회를 끌어들이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주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리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무엇을 하려는 건지 황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주도권을 빼앗긴 것만은 분명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황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생각을 다듬어 정리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아우구스타의 눈을 신뢰했다. 에리히가 아내를 향한 열정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추잡한 일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애초부터 에리히가 개입하면 이 일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려던 것이기도 했으니, 아우구스타의 평가를 들은 시점에서 더 시험해 볼 이유가 없었다.
불효자식 놈의 기가 찬 거래 요구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공격을 중단했을 것이다. 클라우제너의 대리인이 찾아오면, 보상으로 무엇을 내줄지까지 생각해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에리히는 아이를 데리고 알트마이어에 머무르고 있지. 제러드의 아들과 알트마이어라……. 슈나이더 백작가에 있었던 것처럼, 알트마이어에도 뭔가 남아 있었던 건가.’
아렌 공왕이 알트마이어를 방문했다는 스테판의 연락도 받았다.
황제도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사라지듯이 조용히 황궁을 나선 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황궁에 들어와서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는데도 그녀는 아직도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지 못했다.
제러드가 죽고 황제가 넋을 놓았을 때, 이 진절머리 나는 짓이 끝날 줄 알았다. 황제와 국새를 확보하기만 한다면, 공식적인 통치 권한을 획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물밑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냥 같이 죽이는 게 나았을까?’
아니, 찬찬히 복기해 봐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를 암살한 것도 무리수를 둔 것이었다. 황제가 비탄에 빠져 현실 도피를 위해 향합에 손을 댄 그 순간이라면 약의 농도를 조절하여 죽일 수 있었겠지만, 그때 그랬다면 두 대공과 귀족원의 반발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두어도 오래 버티지 못할 줄 알았다. 퇴위를 하든, 아편과 수면제 과용으로 목숨이 끊어지든.
하지만 황제는 아직도 살아 있다. 마치 거북이가 팔다리와 목을 움츠리듯 황궁 깊은 곳에 숨었고, 그녀는 때를 놓쳤다.
이제 근위대와 궁의부를 뚫고 황제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두 기관은 황명조차 듣지 않는다.
내버려 두어도 그 껍데기 속에서 황제는 느릿하게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 굳이 무리한 수를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처리했어야 했을까?’
황후는 이제 와 그렇게 생각했다.
혈통은 자질을 담보하지 못한다. 황후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황제의 관은 너무 무겁다.
하지만 수십 년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있는 모양이었다.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그가 자신의 왕관을 지키기 위해서 쌓은 성벽은 쉽사리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펜대를 쥔 채 멀거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황후 폐하, 전령이 왔습니다.”
“아.”
황후의 펜 끝에서 잉크가 떨어져 손끝을 검게 물들였다.
“어머.”
율리아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물에 적신 다음, 황후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잉크 얼룩을 닦았다.
전령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우구스타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어찌 되었느냐?”
지금 하원에서 감찰청의 고발로 에머슨 공단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고 있었다.
황후는 서둘러 전령이 내민 편지 봉투를 열었다.
『황금 새싹단의 간부가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동포를 노예로 삼아 부렸기에 용납할 수 없어서 불을 질렀다고 증언했습니다. 감사관이 에머슨 공단에 아렌인 노예계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아우구스타가 황급히 갈겨 쓴 쪽지가 들어 있었다.
황후는 이 증언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결코 의제에 올리지 않았던 것, 곧 아렌인 노예계가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발언되었으며, 그 존재가 기록으로 남았다는 뜻이다.
황후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전령을 노려보았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은?”
“제가 출발할 무렵에 막 청문회장에 도착했었습니다.”
전령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서 경시청이 동원되었습니다. 기자의 숫자만으로도 인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황후의 안색에서 핏기가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