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러나 그녀는 꾹 참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위빙 상단이 화제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위빙 상단의 도덕성을 판결하느라 정작 중요한 사건은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한 채 회장님들이 쓰시는 전가의 보도 중 첫 번째 것을 꺼냈다.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신다고요?”
울리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물경 80명에 해당하는 제국 시민이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고작해야 하루에 두 끼를 제공받는 조건만으로 에머슨 공단에서 1년도 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클레어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 정말이지 당황스럽군요. 부인께서는 단순히 위빙 상단의 로저 카슨에게 투자금을 내주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경영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계실 텐데요. 게다가 부인께서는 아렌의 영주이기도 하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제는 모든 아렌인 중 가장 고귀한 귀부인이기도 하시지요.”
울리히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몸짓은 연극적이었고,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수호와 통치의 의무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선량함과 자비로움의 덕목은 잊으셨습니까? 부인께서는 오로지 자기 영지민의 삶만 다스리고 계십니까? 상단의 직원들은 부인께서 돌보실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팽개쳤다면 사악하고, 진짜로 알지 못했다면 무능합니다.”
“…….”
“수많은 소녀들이 부인을 동경하고 사랑합니다. 부인이 입은 옷, 목에 걸고 계신 목걸이, 모자, 장갑을 따라 하기 위해 신문을 사지요. 그녀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부인께서 넘치는 매력으로 제국 제일의 신랑감을 사로잡았기 때문만은 아닐 터인데, 부인께서 그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호화롭게 돈 쓰는 법과 세련되게 옷 입는 법뿐입니까?”
“어흠.”
“큼.”
회의장 여기저기에서 헛기침 소리가 터졌다. 여러 의원들이 그에게 눈총을 주었다. 지금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울리히는 자신의 명연설에 도취되어 그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꼭 하고 싶었던 말 중 마지막 하나를 입 밖에 낼 기회가 없어서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를 꼭 해 봐야 했는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클레어는 다정한 말씨로, 그의 발언에서 감정과 비난을 빼고 핵심 내용을 또박또박 요약해 주었다.
“의원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일을 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러한 계약서는 제국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 노예 계약서이니, 비록 스스로 자유의사에 따라 계약서에 서명했더라도 무효라고요.”
“누가 자유의사로 자신의 몸을 포기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한다는 겁니까?”
“자유의사가 아니라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 스스로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었다는 건가요?”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제게 그런 수단이 있다면, 왜 고작해야 80명만 노예로 삼았겠어요? 그 정도로는 인건비 절약이 되지도 않는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클레어는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울리히가 대꾸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움찔했다.
아편을 먹여 정신을 흐리게 한 다음 서명을 시키지 않았겠는가. 80명의 노예계원이 모두 아편 중독자라는 것은 감사관의 보고서 속에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아편은 의회에서 금기시되는 화제였다. 울리히는 황후가 그것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굳이 누구도 언급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제 입으로 말할 생각은 한 적 없었다.
“울리히 경.”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그것은 경고였다.
그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멈출 수 없었다. 이 많은 방청객과 귀족들, 기자들을 앞에 두고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만두면 그야말로 멍청하게 입을 열어 허튼소리를 하다가 끝난 자가 될 뿐이다.
“아편을 먹이지 않았습니까?”
그는 위험한 다리를 건넜다.
“중독시켜, 빚을 지우고, 정신을 흐리게 하여 서명을 받아 냈을 테지요.”
그 순간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명은 의원석에 앉아 있던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였고, 다른 한 명은 무어 공작 곁에 앉아 있던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었다.
무어 공작이 애빙던 백작 대부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좌중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지금 울리히는 아편의 해악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한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아편을 먹고 서명한 계약서가 무효라면, 에머슨 공단의 노예 계약서가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잎 궐련을 문 채 계약서에 서명하고, 진통제를 먹은 채 유언장을 쓰던가.
클레어가 말했다.
“의원님께서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아편을 먹인 건 제가 아니랍니다.”
“부인께서 직접 그런 일을 하셨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들인 것이라 해도 죄인입니다.”
“백성을 위하시는 의원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군요.”
울리히가 얼굴을 구겼다. 클레어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80명이나 되는 아편 중독자가 노예로 팔려 왔는데도 알지 못했던 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입니다. 넉넉한 보상책을 마련하겠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하지만 제가 노예상이 아니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겠군요.”
또박또박한 클레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회의장을 가로질렀다.
“에른스트 소공작을 증인으로 청하겠습니다.”
“예?”
“에른스트 공작님은 수도에 안 계시니까요. 소공작이라도 증언해 줄 수 있겠지요.”
클레어는 의원석을 한 바퀴 둘러보고, 그다음에는 방청석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에른스트 공작령에 있는 제철 산업 단지에 투입된 80개의 계에 8천 명의 노예가 소속되어 있었지만, 저는 에른스트 공작가에서도 틀림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리라고 확신한답니다.”
클레어가 에른스트라는 이름을 발언했을 때부터 술렁거리던 실내에 경악이 가득 찼다. 방청석의 누군가가 언성을 높였다.
“에른스트 공작가?!”
일단 누군가가 말문을 열자 순식간에 아우성이 번져 나갔다.
“공작 부인,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에른스트 공작가라니요? 에른스트 공작가가 노예상과 관련 있다는 말씀입니까?”
“공작 부인!”
“어이, 호외다! 너 빨리 가서 이대로 윤전기 돌려!”
땅! 땅!
“정숙, 정숙하시오!”
노이만 의장이 나무망치를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방청석의 야단은 멈추지 않았다.
의원석에서도 일부 소란이 일어났다.
“휴회, 휴회하고 내일 다시 시작합시다!”
“휴회라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에른스트 소공작을 소환해야 합니다!”
“절차도 없이 귀족을 소환하겠단 말이오, 지금?!”
“일단 휴회합시다! 의장님, 이 소란 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대다수가 중단하라고 외쳤다. 노이만 의장이 난감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레어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진짜로 지금 당장 에른스트를 증인석으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게 좋지도 않고.
애초부터 에른스트의 이름을 꺼내서 아편, 노예계와 엮는 게 목적이었다. 일단 나란히 나온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이제부터 불을 붙여 판을 키우려면, 에른스트 소공작이 당장 나와 수습하는 것보다 시간을 두고 뜸을 들이는 게 훨씬 나았다.
노이만 의장이 나무망치를 들고 휴회를 말하려는 찰나였다.
무어 공작의 손에 끌려 앉았던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만이 아니라 동행한 아렌 귀족들이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무어 공작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숫자는 적었으나, 방청석에 귀족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일 자체가 희귀하기에 이 모습은 몹시 눈에 띄었다.
당황한 의원들이 입을 다물고, 방청석에서도 무어 공작이 무슨 발언을 하는지 들어 보기 위해 숨을 죽였다.
입을 연 것은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었다.
“에른스트, 하츠펠트, 올덴부르크.”
노부인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본회의장에 울렸다.
“슈나이더, 에티호넨, 베른하르트, 팔츠.”
그것은 모두 로멜의 귀족 가문 이름이다. 왜 여기에서 그녀가 그 이름을 언급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표정만으로 저주를 뱉어 냈을 뿐이다.
무어 공작이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그로부터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모든 일이 온전히 처리될 때까지 그들이 의회를 노려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모두 알아챘기 때문이다.
땅!
“오늘은 이만 휴회하겠습니다.”
노이만 의장이 망치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