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인파가 의사당 주위를 메우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것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클레어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호외가 떠 있었다. 집사가 따끈따끈한 신문을 가져다주어, 클레어는 우선 신발을 벗고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것을 읽었다.
에리히라면 자세 때문에 한 소리 했을 테지만, 지금은 잔소리할 사람이 없었다.
“엄청난 상황이 됐네. 에른스트의 이름이 효과가 있을 줄 알았지.”
“폭탄을 던지시고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레이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뭐, 가능한 한 증인석에서 에른스트까지는 말하고 내려오려고 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거든.”
의원들이 작당하여 모든 일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증인석에 나와 준 것으로 충분하다며 형식적인 질문만 하고 돌려보내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모로 애매해졌을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위협하지도 않는데, 그녀가 먼저 나서서 아편의 해악을 설파하거나 에른스트 공작가를 끼어서 떠들 수는 없지 않은가.
기자들을 이용해서 사태를 키우려고 해도, 타블로이드지라고 무시하고 뭉갤 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답이 없는 경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울리히라고 하는 그놈이 오늘의 공로자였다.
‘후원금이라도 좀 낼까?’
그가 아니었어도 결국 어떻게든 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는 쪽이 좋았으니까.
“무어 공작 각하와는 사전 교감이 있으셨습니까?”
“에른스트까지 이야기가 닿지 않아도, 적어도 아편 이야기 정도는 하려고 했었어. 로멜이 아렌인을 노예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만으로는 반쪽에 불과하니까.”
오늘 무어 공작과 함께 나온 사람은 모두 연잎 궐련 중독으로 크게 고통받거나 그 가족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의회에서 그 분노를 표출하리라 예상했다. 생각보다 더 과격했지만 말이다.
요한이 말했다.
“실은 애빙던 백작이 2주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
클레어는 놀라서 되물었다. 아직 수도의 자잘한 사교계 소식까지는 듣지 못했다.
“백작가에서는 급환 때문이라고 했지만, 자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염병인 것도 아닌데 장례식장에서 관 뚜껑을 닫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했다더군요.”
“약을 구하지 못한 것은 아닐 테니, 발작을 일으키거나 환각 상태에서 사고를 당했거나 그랬겠군.”
애빙던 백작 대부인의 씹어뱉듯 증오스러운 어조를 떠올리며 클레어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그녀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마약은 결국 하는 놈 잘못 아니냐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진통제로 쓰다가 중독된 것과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그래도 역시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서 벌받아 죽었다고 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집사가 말을 전했다.
“마님, 접견 신청이 있습니다.”
“오늘은 웬만하면 거절해.”
피곤하기도 하지만, 사태가 진전되려면 시간도 좀 더 필요했다. 사건이 궁금하거나 이 일에 한마디 얹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굳이 만날 생각이 없었다.
위빙 상단의 투자자는 본점 쪽에서 로저가 대응하기로 되어 있었다.
집사가 편지 봉투를 클레어에게 건네주었다.
“노이만 의장님이 소개장을 주셨다고 합니다. 디트마어 람스베르크 경입니다.”
클레어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급히 쓴 듯 간략하게 몇 줄만 적은 소개장과 명함이 있었다.
“노이만 의장님의 소개라면 맞이해야지.”
“울리히 하비흐 경이 동행하셨습니다만, 통과시킬까요?”
“무슨 염치로.”
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레이는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용건이 있겠지.”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집사에게 손님들을 들이라고 손짓했다.
디트마어 람스베르크는 우울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워낙 마르고 볼이 홀쭉한 탓에 초췌해 보였지만, 그 탓인지 검은 눈동자가 더 부리부리해 보였다.
나이는 올해 서른둘. 하원 의원으로서는 아주 젊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벌써 6년 차 의원이었다. 처음 의사당에 발을 들인 것은 스물여섯 때였고, 단어 그대로 최연소 기록이었다.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곁에서 울리히가 말없이 따라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람스베르크 의원님. 안 그래도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디트마어가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를 알고 계십니까?”
“의원님의 경력은 꽤 특이한 편이니까요. 귀족으로서 정치를 하기 위해 상속과 신분을 포기한 예도 흔치 않지만, 그 결정이 집안 사정에 의한 것이 아닌 경우는 더욱 드물지요.”
그는 람스베르크 백작가와 완전히 절연하고 빈민가를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가 최연소 하원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람스베르크 가문 덕분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문이 그를 지지해 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람스베르크 가문의 아들로서 받은 교육, 쌓은 인맥, 그 무엇보다도 ‘백작의 아들이 빈민가를 위해서 가문과 절연했다’라는 사실이 그의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6년. 그는 친로멜파가 되어 동료를 늘리거나 타협하여 입지를 굳히는 대신, 아직도 초심을 유지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밑을 향해 자선을 베풀기는 쉽지만, 직접 밑으로 내려가 대변하고자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무능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지난 6년 동안 해낸 일이, 오늘 부인께서 몇 마디로 일으킨 파문보다도 적으니까요.”
디트마어가 민망해하며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을 했다는 건가요?”
클레어는 고개를 기울이며 짐짓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전 그냥 억울한 일이 있어서 사실 관계를 이야기했을 뿐인걸요.”
“저는 지난 6년 내내 아편의 해악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디트마어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선택으로 시작한 일이니 자기 의지대로 끊으면 된다는 게 여러 사람의 주장이지만, 실제로는 안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두 눈을 감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인가요?”
디트마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랐기에, 황후 탓이냐는 질문을 직접 할 수는 없어서 클레어는 돌려서 말했다.
하지만 디트마어는 고개를 저었다.
“경제적 이득 때문입니다. 환경이 나쁜 작업장에서 아편을 보급하는 것이, 안전 대책을 세우거나 휴식 시간을 주는 것보다 싸게 먹히니까요. 중독으로 못쓰게 되면 해고하면 그만이죠.”
빈민가의 자선 치료소에서도 무조건 모르핀을 처방하고 있다. 그게 제일 싸고 간편한 처방이니까.
“이 때문에 어린아이들조차 중독되고 있습니다.”
클레어는 그 말에 잠깐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의원님이 절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오늘 주워섬긴 말은 그저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일 뿐이었어요.”
“그럴 리가요. 부인께서 이 일을 정말로 외면하셨다면, 오늘 증인석에서 에른스트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대신 클라우제너의 힘으로 모든 것을 조용히 무마하셨을 겁니다.”
디트마어가 처음 인사했을 때보다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기자들이 움직인 것도, 무어 공작 각하께서 방청하신 것도 모두 부인의 힘이 아닙니까?”
애초부터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감찰청 감사관이 감히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을 증인석에 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방청석에서 몇몇 가혹한 로멜 귀족 가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리라.
신문에 직접 기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접견 신청을 하며 살아왔기에, 디트마어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드세요, 의원님. 의원님이야말로 감사와 존경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입니다.”
일을 꾸미기 위해 하원 의원의 프로필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진의와 가치를 비로소 깨달은 기분으로 클레어는 말했다.
디트마어가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뺨에 드리워졌던 수심 대신 보드라운 홍조가 어렸다.
“디트마어라고 편히 불러 주십시오, 부인. 저는 이 자리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겸손하게 상대의 얼굴에 금칠하는 것보다 좀 더 유의미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클레어가 말했다.
이 정도까지 일을 부풀려 놨으니, 의회에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노이만 의장을 비롯해 클라우제너의 영향을 받는 의원들을 써도 된다.
하지만 디트마어는 단순히 클레어의 의견을 의회에 옮길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클레어가 알기 때문에 옳다고 믿는 세상의 형태보다 더 가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그렇고.”
클레어는 이번에는 울리히를 돌아보며 말했다.
“경은 무슨 일로 저를 방문하셨나요.”
울리히가 잿빛이 된 안색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용서를 청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