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2/263)

173화

클레어는 어이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낯짝이 두꺼우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오늘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중재자 하나 끼지 않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디트마어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할 만한 성격은 아닌 데다, 지금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보나 마나 디트마어가 소개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억지로 따라붙었으리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비흐 의원님.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씀하신 것일 텐데요. 설마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눈에 띌 생각으로 일단 아무 말이나 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할 말이 없어진 울리히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도 제대로 나지 못한 이마를 닦았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그런 것은 아니고…….”

옳은 일이라고 하면 클레어를 공격한 것이 옳은 일이 되고, 신중하지 않았다고 하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만다. 진퇴양난이었다.

울리히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납작 엎드리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이시라면 당연히 모두의 앞에서 해명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뭐, 좋아요. 일이 좋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클레어가 한 말이 진짜 칭찬도 아닌데, 울리히는 마치 그녀에게 자신을 인정받은 양 대답했다. 그래서 그 말은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돌려서 비꼬는 것은 당사자가 수치스러워할 때나 통하는 일이다.

이 정도로 뻔뻔하다니, 조금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태세를 전환하는 솜씨도 일종의 재능이다.

클레어는 그가 쓸 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의원님께서는 신중함의 미덕을 조금 더 배우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상대를 호화 사치밖에 모르는 여자라고 비난하고, 가르치려 들고서, 그 여자에게서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부인께서는 제 말로 인해 수치를 입지 않으셨으니까요. 부인은 사업가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정치가가 되셨지요. 제가 무슨 모욕을 가했든, 부인은 오늘 증인석에서 승리를 거두셨으니 그 가치를 평가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지옥의 조각상은 언제나 악마를 짓밟고 있는 법입니다. 그게 위엄을 드러내기에 더 나으니까요.”

“악마라는 말을 들으려면 노력을 좀 더 하셔야 할 것 같군요.”

클레어는 평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울리히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유가 돌아온 것을 보니 클레어의 내심이 꽤 움직였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결정은 어떻든, 상대가 속내를 알아챘다는 것이 언짢아서 그녀는 떫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원님이 디트마어 경과 함께 방문하셨다는 것은, 뜻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으셨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저는 승부사입니다, 부인.”

울리히가 그렇게 말했다.

본디 배당률은 위험도가 높을 때 상승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이 가장 자신의 몸값이 높은 순간이기도 했다.

비록 클레어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발언하기는 했으나 그는 결과적으로 의회에서 혼자 노예화를 강력하게 비난한 의원이 되었다.

지금 신문사에서 나오는 모든 호외에 비록 조연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름이 실리고 있다. 아마 지난 6년 동안 디트마어의 이름이 언급된 것보다 그의 이름이 불린 횟수가 더 많을 것이다.

클레어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울리히는 저도 모르게 조금 얼굴을 붉혔다. 왜 그렇게 보시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도박사가 돈을 들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빠질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이에요.”

“디트마어 경이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울리히는 그러니까 그가 자신의 고삐를 잡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말했다.

클레어는 깍지 낀 손을 다리 위에 내려놓고 쭉 편 몸을 편안히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보충할 법도 알고 계시겠지요. 의원님의 모욕을 굳이 오래 기억하지는 않겠습니다.”

울리히의 얼굴이 밝아졌다. 클레어가 말했다.

“제 비서 후보로 골라 놓은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전원 능력도 출중하고 의욕도 있는데, 전부 채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두 분께 보내 드릴 테니,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세요.”

“아, 제 사무실이.”

좁고 사람을 쓸 여력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디트마어의 팔을 울리히가 무례할 정도로 급하게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급히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공작 부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비흐 경.”

“진짜로 능력 있는 사람은 제 자리를 가지고 오는 법이라오, 람스베르크 경.”

좀 더 엄밀하게는, 그 비서가 클레어의 지원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뜻이다. 디트마어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하려던 것이다.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닌 울리히가 이렇게 가로막는 게 황당했다.

그러나 울리히는 그가 다시 거절의 말을 뱉기 전에 인사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람스베르크 경과 의논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사람은 곧 명함의 주소로 보내겠습니다.”

“공작 부인.”

클레어는 딱히 읽을 생각도 없으면서 테이블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숙녀의 거절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법이다. 디트마어는 난처해하면서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울리히에게 팔을 잡힌 채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근데 진짜로 괜찮은데. 계약의 자유보다 무임금 노동이 불법이라고 주장했잖아.’

지금은 호명된 로멜 귀족 가문의 이름과 노예 문제 때문에 뒤로 밀렸지만, 울리히의 명성이 높아지면, 당연히 그 주장도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 주장이 통용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끌어올려 두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울리히는 체면과 명예욕 때문에 없던 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저질러 놓고 수습하려는 인생에서 공감대가 느껴졌다. 울리히는 자발적으로 일을 더 크게 벌이려는 타입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에리히가 들으면 누가 누굴 지적하느냐고 할 것 같긴 했다.

클레어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레이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짓이 전과 퍽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까. 그레이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치관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고방식의 일부도 달라졌다. 그녀는 예전에는 비판적이었으나 이제는 좀 더 실용적인 의미에서 평가자가 되었고, 내심을 읽히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것이 지위가 달라졌기 때문인지, 사람을 닮아 간 것인지 그레이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내젓고 그 화제를 끝냈다.

41. 화제 점령

청문회에서 있었던 일이 수도를 가득 채우고도 넘쳐 그 밖으로 퍼지는 데 사흘이면 충분했다.

신문은 기사를 재생산하면서 갈수록 자극적인 단어를 썼다. 후발 주자인 만큼 판매고를 올리려면 더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 더해서 에른스트를 비롯해 로멜 유수의 가문이 호명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호외가 나왔다. 주간지이니, 순보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우편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신문을 다른 지역으로 실어 날랐고, 지역 신문은 그 신문들을 베꼈다.

아편의 해악에 대해 주장하는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의 예전 기고문들이 재발굴되었다. 울리히 하비흐는 매일 의사당과 수도의 중앙 광장에서 두 차례씩 연설회를 열었다.

사람들이 뭉게구름처럼 인파를 이루어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지, 아렌인들이 진짜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순회 공연단을 따라다니는 약장수의 만병통치약, 연잎 궐련, 아편 덩어리, 도시에서 왔다는 고리대금업자, 로멜의 공단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중개인.

비록 그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머리 위를 짓누르는 그물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터이다.

자신들이 어망의 고기 같은 존재라는 것도.

신문이 그것을 ‘노예상’이라고 이름 지음으로써 비로소 실체화되었다.

마치 휴화산 깊은 곳을 쑤시기라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노가 폭발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먼저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탄원이었다. 자식을 데려간 중개인을 찾아 달라는 탄원부터 약을 먹고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거나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망친 외지의 상인에 대해서까지.

수도에 보낼 탄원서를 쓰려는 사람이 대서소에 끝도 없는 줄을 만들었다.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은 관청과 영주관의 문 앞에 모여들었다.

의회와 내각이 모두 편지로 뒤덮였다. 황궁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친 자들 아닌가?”

황후의 자비를 청하는 편지의 산을 보며 아우구스타의 시녀 파울라는 분통을 터뜨렸다.

“제 놈들이 절제력이 없어서 싸구려 아편 따위를 처먹고 정신 나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놓고는 누구에게 책임져 달라는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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