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3/263)

174화

“화를 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파울라 양. 그냥 정리나 해요.”

황후의 시녀인 율리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쓸어다가 화로에 집어넣고 싶었다.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말이다. 어차피 읽어 봤자 답신하거나 대처해야 할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탄원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게 할 수는 없었다. 막내 시녀들은 편지 칼로 봉투를 모두 뜯어 편지를 꺼내 대강 훑어본 다음, 차곡차곡 정리하여 큰 봉투에 넣었다.

결과적으로는 화로에 들어가긴 할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반년에서 1년 정도 보관한 다음에 말이다.

파울라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레비 순보인가 하는 곳은 소설을 쓰고 있던데요. 보셨어요? 딸을 잃은 A 씨의 고백인가 뭔가.”

“파울라 님도 보셨군요. 전 진짜 그거 보다가 얼마나 울었던지, 아침에 눈에 부기 빼고 나오느라 고생했어요.”

하츠펠트 후작의 손녀인 카를라가 눈치 없이 말했다. 파울라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지만, 율리아는 미소만 지었다.

멍청한 동료를 미워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경쟁자가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면 좋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율리아는 한마디 했다.

“무척 인상적인 기사였나 봐요. 파울라 양도 기억하는 걸 보면.”

“아니, 저는!”

레비 순보를 보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하고 파울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요즘 기사가 하도 난리니까 확인차……!”

“그럼요. 이해해요.”

율리아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카를라가 끼어들었다.

“기사가 지나치긴 해요. 사연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설마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그런 일을 할 리 없잖아요?”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신문사 같은 건 아예 폐쇄해 버려야 해요!”

파울라가 레비 순보를 향해 과장된 적개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황후가 치맛자락을 끌고 들어왔다.

율리아는 황급히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올렸다. 황후가 상석에 자리를 잡고, 레나테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모양 좋게 정리했다.

“차를 부탁한다.”

아우구스타가 말했다.

그녀의 시녀인 파울라와 카를라는 황후의 허락 없이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신분이기에 뒷걸음으로 물러 나갔다.

율리아는 그녀들이 남겨 놓은 일 더미를 대충 한쪽에 몰아 밀어 두었다. 그리고 방 한쪽 난로에서 달구어지고 있던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도자기에 옮겨 담아 왔다.

“밖에까지 목소리가 들리던데.”

레나테가 말했다. 율리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파울라 양과 카를라 양이 레비 순보를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하.”

“기사를 흥미롭게 쓰는 능력이 있긴 하지.”

아우구스타가 나직하게 말했다.

추상적인 정치 문제와 복잡한 분석 기사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보여 주는 것에 비해 공감을 얻기 어렵기 마련이다. 레비 순보가 시작하고 다른 신문사들이 따라 하게 된, 그 익명의 개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기사들이 아니라면, 청문회의 반향은 지금보다 약했을 것이다.

레나테가 말했다.

“철이 없네요. 카를라 양이나 파울라 양이나. 그 부모는 지금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하츠펠트 후작가도 입장이 난처한가요?”

율리아가 묻자, 레나테가 대답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두 가문 다 애빙던 백작 대부인이 직접 호명했으니까. 우리가 받는 건 탄원서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그날 언급된 가문들은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에 휘말렸더라고.”

의혹 기사가 제기되거나 담벼락에 페인트로 비난의 말이 적히는 것은 그나마 작은 문제였다.

문제는 가문의 사업이었다. 상당수 사업장에서 공인 길드가 집단행동에 나섰다. 제대로 된 치료소를 세우고, 노예계를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다.

이 기회를 틈타 지금까지 감히 하지도 못했던 요구들까지 거기에 더했다.

“본인들은 제대로 급료를 받고 있는 주제에 왜 난리인가 몰라.”

“해고하지 않으시려나 보지요? 하츠펠트 후작님은 마음이 여리신 편이니까.”

“지금 당장 전원을 해고하면 공장을 멈춰야 하잖니.”

한 곳만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한 곳만 멈춰도 여파가 다른 곳까지 미칠 게 분명했다.

“그만하거라. 그런 건 지엽적인 문제다.”

황후가 손을 내저었다.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하원은 휴회 상태로 회의장을 다시 열지 못했다. 에른스트 소공작을 증인석에 부르라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무어 공작이 이끄는 귀족원의 절반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에른스트에게 서류 제출을 늦추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물밑에서 아렌 귀족과 하나씩 접촉했다.

귀족원이 조용해지고, 하원에서 이 일을 흘려버리면, 여론 따위가 아무리 난리를 쳐 봐야 어쩔 수 없다.

군중은 금방 지친다. 선거권자들은 제 금고에 금화를 채워 주는 것이 누구인지 깨달을 테고, 선거권도 없는 평민들은 정치인의 연설회에서 함성을 지르는 대신 성실하게 일해야 내일의 빵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리라.

늘 그래 왔듯이.

디트마어 람스베르크가 연단에 올라도 6년 내내 광장의 절반조차 채우지 못했던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냥 두실 작정이신가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지원하는 이상, 람스베르크 의원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율리아가 말했다.

황후는 냉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느냐?”

사실 황후는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레나테의 눈총이 율리아에게 날아들었다. 선배인 자신을 앞질러서 두각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리아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난처한 일이 생겼을 때야말로 윗사람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법이다.

“공작 부인의 추문을 만들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사건의 화제가 공작 부인에게서 시작되었으니, 그녀가 얽힌 스캔들보다 효과적인 시선 돌리기는 없을 겁니다.”

“유감이지만, 공작 부인의 추문 중에는 쓸 만한 게 없단다.”

아우구스타가 대신 대답했다.

“변호사도, 상단주도, 모두 김이 다 빠진 소재야. 게다가 공작이 부인과 별거하고 있다는 건 헛소문이다.”

“그러니 사건을 진짜로 만들어야지요.”

“진짜로? 실제로 공작 부인을 유혹해서 불륜으로 유도할 작정이야? 성공한다고 해도, 딱히 대단한 성과는 거둘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또 상대 남자 얼굴이 공작의 초상화랑 나란히 실리면서 비웃음이나 살 테지.”

레나테가 빈정거렸다. 율리아는 그녀에게 일부러 빙긋 웃어 보였다.

“상대가 스테판 하인즈여도요?”

“…….”

레나테의 안색이 굳어졌다. 율리아는 약간의 승리감을 느꼈다.

“염려 마세요. 타블로이드지를 공작 부인에게서 사들일 방법도 없는데, 그런 시도를 해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황후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였다. 율리아는 대담하게 말했다.

“람스베르크 의원과 공작 부인을 추문으로 엮은 다음, 정사를 시키는 게 어떨까요?”

“동반 자살 말이냐?”

“네. 결국 지금 여론을 이끄는 구심점은 람스베르크 의원이에요. 그가 없으면 의회에서 발언할 사람이 없고, 공작 부인이 없으면 언론이 그를 밀어주지 않을 거예요.”

율리아가 말했다.

“게다가 지금 이런저런 핑계로 연설회를 해산하고 싶어도, 하원 의원의 연설회는 법으로 강제 해산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람스베르크 의원만 없으면, 전부 뭉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냥 암살하면, 그 자체가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아우구스타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울리히 하비흐는 매수 가능한 사람이니 혼자 남기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잠깐만요. 클라우제너 공작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레나테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율리아가 턱을 들고 말했다.

“공작이 미쳐 날뛴다면 더 좋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반 자살 했다는 확실한 증거처럼 보일 테니까.”

“과격하구나.”

황후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랫입술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율리아의 의견을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추진해 보려무나. 레나테, 네가 도와주도록 해.”

“……네.”

자신이 아니라 율리아가 주가 된다는 사실에 레나테가 굴욕적인 얼굴을 했다.

황후가 이만 물러가라고 고갯짓했다. 두 젊은 시녀 사이에 여전히 불꽃이 튀었으나, 그녀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시녀들이 물러가고, 혼자 남은 아우구스타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댄 채 피로한 얼굴로 손수 차를 따랐다.

“진짜로 저 애들에게 그런 일을 맡길 작정이십니까?”

“잘 해낸다면 좋고, 그러지 못해도 상관없어. 눈가림 정도는 될 테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아우구스타가 긴장했다.

“다른 일을 할 생각이시군요.”

“율리아의 말을 들으니, 내가 정신이 번쩍 나는군. 그동안 타성에 젖은 것처럼 안이하게 굴긴 했지.”

황후가 미지근한 찻잔을 만지며 말했다.

“진짜로 제거해야 할 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반인데 말이야.”

그녀는 흥얼거리듯 말했다.

클레어 델포드가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본래 공작의 것이며, 내각이 가진 통치 권한의 본 주인은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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