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수도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중앙 광장에 사람이 가득 차 넘쳐 흐르다 못해 인근 도로까지 꽉 메우고 있었다.
연단 위에서 울리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그 함성은 연단 주위에서 시작해서 마치 파도를 타듯 광장 끝까지 번지고, 이내 길 쪽으로도 퍼졌다.
아마 끝에서는 연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기 나와서 머릿수를 보탰다.
그 바깥으로 경시청에서 나온 경찰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 광경을 중앙 광장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최상층에서 내려다보았다. 물론 이것도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부동산이었다.
“명당이네, 명당.”
“명당……이요?”
“아, 좋은 자리라는 뜻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요안나에게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한 번쯤 와 보긴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인파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차를 가지고 나온다고 해도,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앗 하고 휩쓸릴 것이다. 그렇다고 걸어서 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안전 문제에 있어서는 막시밀리안의 말을 절대로 어기지 않았다. 그가 요구하는 수의 호위를 거느리고 가면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행차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그것도 힘을 보태 주는 일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디트마어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에른스트를 클라우제너로 바꾸는 게 부인의 바람은 아니시리라고 믿습니다.]
선 잘 긋는 게 참 마음에 들고 섭섭했다. 하지만 좋은 일이다.
“자리가 좋긴 하군. 건물을 망치면서까지 기계를 설치해서 높은 곳에 오르내릴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무어 공작이 말했다. 클레어가 방긋 웃었다.
“사람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도 좋으니까요.”
“남작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하원 의원에게 힘을 보태 주시는 것도 좋고요. 아무래도 저 혼자만으로는 이래저래 말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서요.”
“말이 나올 가능성?”
“타블로이드지에서 줄곧 제 스캔들로 장난을 쳤으니까요. 저는 뭐, 이미 버린 몸이지만 디트마어 경한테 흠을 만들기는 좀 그래요.”
그 말에 무어 공작이 엷은 웃음을 띠고 짧게 말했다.
“자업자득이지.”
“로멜 귀족다운 게 뭐 어떻다 저떻다 해도, 제가 보기엔 솔직히 다 똑같아요.”
“무슨 뜻인가?”
“방금 같은 이야기를 하면, 제 남편도 분명히 똑같이 말했을 것 같거든요.”
물론 무어 공작이 가볍게 농담으로 말한 것과 달리 에리히는 본심을 숨기고 했을 것이다. 밤에 좀 여러 의미로 싸울 거고.
무어 공작이 찻잔을 들었다.
“사실 혈통으로 따졌을 때 그리 차이 나지 않는 게 사실이기도 하지. 남작도 그럴 텐데.”
“네. 저희 증조모님도 로멜 귀족 출신이긴 하시죠.”
귀족 계급은 그 숫자가 많지 않다. 과거에는 그 안에서도 가문의 작위와 세력을 따져 계급을 나누었으니, 근친혼을 피하려면 필연적으로 지역적 거리가 있는 가문과 피를 섞을 수밖에 없다.
통혼 가능한 가문이 제한적이었던 왕가와 지배 가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로멜 우월주의는 우스운 것이다. 로멜 귀족과 아렌 귀족의 차이보다 그냥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더 크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보다 글을 읽고 쓸 만큼 교육을 받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더 클 게 틀림없었다.
클레어는 그걸 생각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증인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증인? 람스베르크 의원을 만나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지?”
마침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서가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리나였다.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요, 리나 양.”
“클레어 님!”
리나가 환한 얼굴로 달려와 클레어를 포옹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어디 봐요. 그냥 봐도 잘 지낸 것처럼 보이네. 오늘도 예쁘고.”
“제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클레어 님이야말로 그사이에 큰일을 겪으셔서…….”
리나는 연분홍색 데이 드레스를 입고, 귀와 목, 손에 모두 큼직한 나비 모양 다이아몬드를 달고 있었다. 꽃 위에 나비가 앉은 듯했다.
예쁘기도 예뻤지만, 모델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모습이었다. 클레어는 쉽게 접근 가능한 가격대의 나비 모양 귀걸이가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일단 자신도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인사부터 드려요. 무어 공작 각하, 이쪽은 리나 슈나이더 양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슈나이더 가문의 리나입니다.”
리나가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를 올렸다. 무어 공작은 살짝 미간에 힘을 준 채 그 인사를 받았다.
“만나서 반갑군.”
지금 슈나이더 백작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리나에 대한 사연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리나가 최근 몇 달 사이에야 진짜 부모를 찾아 백작가에 들어갔으며, 그녀도 피해자인 것을.
슈나이더 백작도 피해자에 가깝다. 적어도 그는 에른스트나 하츠펠트처럼 뻔뻔스럽게 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나이더 백작가의 살롱에서 시작된 일이 너무 많았다.
무어 공작의 태도는 무뚝뚝했지만, 리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리스의 일을 겪고, 부친인 백작을 만나면서 오히려 그녀 안에서 귀족에 대한 경외는 싹 씻겨 내려갔다. 클레어가 특별한 것은 그녀가 클레어이기 때문이지, 남작이기 때문도, 공작 부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클레어가 그녀의 손을 잡아 곁에 앉혔다.
“그사이에 벌써 활약하게 되었더라고요.”
“활약이라니요. 대성당의 소프라노 자리는 클레어 님이 만들어 주신 것인데요.”
“지난달에 드디어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고 들었어요. 강변에 새로 개장한 오페라 하우스라면서요?”
“화제성 노리고 그런 거예요. 사실 기쁘긴 했지만요.”
리나가 뒤 문장을 비밀처럼 소곤거렸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 님이야말로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엘리엇 님도 뵙고 싶었는데.”
“조만간 돌아올 테니까요. 난 청문회 때문에 급하게 온 거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세 번째 손님이 왔다. 디트마어 람스베르크였다.
피곤할 텐데도 전에 만났을 때보다 안색이 나았다. 헌칠한 키에 비해 구부정했던 어깨가 쫙 펴진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그가 먼저 클레어에게 인사했다. 그는 이런 점에서 로멜 귀족스러운 물을 다 빼지는 못했다. 무어 공작을 모를 리가 없는데, 소개가 없기 때문에 인사하지 않은 것이다.
클레어는 우선 무어 공작과 리나를 그에게 소개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라는 말에 디트마어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시군요. 제가 그런 쪽에는 문외한이라, 영애의 소문은 자주 들었지만 용모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거 좀 실망인데요? 음악에는 관심 없어도, 제가 광고를 얼마나 뿌렸는데.”
클레어가 생글거리며 말하자 디트마어가 민망한 듯 약간 얼굴을 붉혔다.
무어 공작이 말했다.
“이제 뜸은 그만 들이고, 이야기를 하지, 남작. 나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할 정도의 일이라면, 가벼운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리나 양.”
클레어가 리나에게 눈짓했다. 리나가 옆에 내려놓았던 가죽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이건 슈나이더 백작저에서 나온 장부예요. 카탸 슈나이더가 남겨 놓은 것이지요.”
“아.”
“실은 안주인의 침실을 이번에 뜯었거든요. 아버지가 정리하기 괴롭다고 방치하고 계셨어요.”
이번 사건이 터진 뒤에, 정말로 외면할 수가 없게 된 슈나이더 백작은 자기 눈앞에서 침실의 가구를 모두 들어내어 뜯게 했다.
약장에 있던 병을 조사한 결과, 강도별로 분류된 진정제가 그냥 거기에 있었다. 장부는 옷장과 서랍장, 침대로 나뉘어 비밀 공간에 들어 있었다.
“아예 이 장부를 넣고 못질을 해서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더라고요. 실은 그사이에 도둑이 몇 번이나 들었는데, 그래서 찾지 못한 모양이에요. 가구 자체를 박살 냈더니 나온 거거든요.”
리나가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다. 몇 년간 쌓인 장부는 몇 권이나 되었다.
“대충 훑어봤는데, 공급처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요. 하지만 물건을 받아 온 날짜와 금액으로 추정되는 건 있어요.”
“구매자도 확인할 수 있습니까?”
“네. 특히…… ‘진정제’를 확인할 수 있어요.”
리나가 대답하면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 님의 약혼 파티 날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이건 모두 반년 이상 전의 장부거든요.”
“최신 장부는 직접 쓰고 있었을 테니까, 벌써 도둑이 훔쳐 가든가 했겠지요.”
클레어가 엄지와 검지를 맞대 문지르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토마스 보르얀스의 장부와 합치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군요.”
“아버지는 이걸 귀족원에 제출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걸 클레어 님에게 드리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요.”
리나의 말에 디트마어가 무겁게 대답했다.
“귀족원에서는 묵살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가문의 치부가 들어 있을 테니까요.”
무어 공작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클레어가 말했다.
“디트마어 경이 가져가세요.”
“제가, 말입니까?”
디트마어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