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디트마어는 놀랐다.
이 장부에 황후의 ‘진정제’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약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카탸 슈나이더가 직접 행했거나 암살범에게 도구를 공급한 것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황후 자신이 직접 손을 더럽힌 것에 대한 증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귀족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어쩌면 클라우제너나 델포드에도 연관된 자가 있을 수 있다. 공작은 이런 일에 전혀 손을 담그지 않았다기에는 너무 고위 귀족이었다. 클레어 자신은 결백할지라도, 친인척과 가신까지 모두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내주다니.
“나는 찔리는 게 없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내 남편도 그럴 거고요. 이 안에 만일에 그 사람의 약점이 될 만한 게 적혀 있더라도 나는 덮을 생각 없어요.”
“부인의 약점이 거기에 실려 있지 않더라도, 남에게 주실 만한 물건은 아닙니다. 가문을 위해 아주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겁니다.”
클레어가 만일에 그 장부를 숨겨 가지고 있었다면 디트마어는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 장부를 공개해야 한다고 그녀를 공격했으리라.
하지만 클레어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 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경에게 주는 거예요. 나는 아마 내 이득 때문에 그걸 쓰고 싶어질 테니까요.”
디트마어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약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했다.
“악용될 소지는 아예 차단하는 게 낫잖아요.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아닙니다. 부인처럼 생각하시는 분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가 뭔가를 삼키듯 목을 한 번 울렸다. 그리고 장부를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신뢰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디트마어가 퍽 부드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리나 양은 이 장부의 출처에 대해서 증언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클레어 님이 그걸 원하신다면요. 의원님이 부르신다면, 아버지도 언제든 의회에 출석하실 거고요. 슈나이더는 슈나이더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에 책임질 작정입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백작님 쪽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디트마어가 말했다.
클레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막시밀리안, 디트마어 경에게 호위를 붙여 주세요.”
“아니,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꼭 그 장부만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경을 죽여서라도 상황을 무마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테니까.”
디트마어는 이번에도 난처한 얼굴을 했다.
클레어는 전에도 그에게 호위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디트마어는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신뢰를 받고서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부 문제를 생각하면 위험성은 훨씬 늘어났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클레어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트마어가 나가고 나자 무어 공작이 말했다.
“결국 남작의 뜻을 관철시켰군.”
클레어는 의아하게 무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무어 공작은 적절한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호위를 붙여 준다는 건 반대로 언제든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람스베르크 의원 같은 사람은 행동이 제약될 가능성을 늘 우려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진짜로 필요하니까요. 디트마어 경이 암살이라도 당하면, 진짜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
클레어는 한층 여유로워진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없는 게 아쉬웠다.
리나와 함께 공작저에 돌아오자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편지 봉투를 건네주는 요안나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봉투를 받아 든 클레어는 요안나와 똑같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봉투에 적힌 ‘에리히’라는 서명 아래 삐뚤빼뚤 써 놓은 ‘엘리엇’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들여다보고 리나도 웃었다.
“엘리엇 님이 이제 철자 쓰기를 배우고 계신가 봐요.”
“자기 이름자 정도만요. 읽는 법은 꽤 익힌 것처럼 보이는데……. 좋아하는 책은 아예 외운 것 같기도 하고요.”
“동화책을 좋아하시니까요.”
클레어는 편지 칼을 가져다가 봉투를 뜯었다. 어쩐지 얇더라니, 안에는 편지지가 딱 두 장 들어 있었다. 한 장에는 에리히의 필체로.
『자업자득.』
딱 그것만 적혀 있었다. 글씨체가 아름다워서 더 열 받았다. 클레어는 대체 지난번에 자신이 편지에 무슨 내용을 적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고 보니 불평불만만 적었던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불만 중에 대부분이 자기가 벌인 일의 결과인 것도 사실이었다.
“와, 그래도 이렇게?”
“뭐,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세요?”
리나가 염려스럽게 물었다. 클레어는 투덜거렸다.
“그런 건 아니고요. 기어이 꼭 이런 걸로 시비를 건다니까요, 이 사람은. 어차피 내일 다시 오겠죠.”
별 쓰잘데없는, 시시콜콜한 소리가 적힌 두툼한 편지가 다시 올 게 분명했다. 에리히와 자신 중에 누가 말이 많으냐면, 확실히 에리히 쪽이라고 클레어는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하루 이틀 사이를 두고 보낸 편지는 같이 도착하지 않나요? 아, 우편 업체를 이용하시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요?”
“심부름꾼에게 하루 간격으로 갖다 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설마 매일 전령을 출발시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리나가 입가에 손을 대고 웃었다. 화를 내는 클레어의 얼굴이 퍽 사랑스러워 보여서,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장은 뭔가요?”
“아, 이거.”
클레어가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그것은 엘리엇이 쓴 것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그것도 삐뚤어진 글씨였다. 그래도 봉투에 쓰여 있는 이름은 썼다고 할 만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누가 써 준 것을 보고 따라 그린 게 분명했다.
밑에는 개구리와 파란 단추가 그려져 있었다. 엘리엇 자신을 그린 듯한 아이의 한 손을 갈고리 손의 선장님이 잡고 있는 그림도 있었다.
“어머. 귀여우셔라.”
옆에서 들여다본 리나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손을 잡고 있는 게 공작님이 아니네요?”
“서운해서 몰래 운 거 아닌가 몰라.”
클레어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리나가 그녀를 따라 웃었다.
“잠깐 이것 좀 갖다 놓고 올게요. 요안나, 차 좀 부탁해.”
“네.”
“아, 제가.”
“둘이서 인사하고 있어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편지를 들고 잠시 서재 쪽으로 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기념할 만한 엘리엇의 편지를 잘 보관했다. 이게 세 장째였다.
에리히 것은 잠깐 고민했다.
‘화로에 넣을까?’
본 용건도 아니고 속 긁자고 보낸 소린데.
아니. 분명히 나중에 싸울 때 보탬이 될 것 같으니 차곡차곡 접어 그의 편지를 쌓아 두는 편지함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오늘 리나를 만난 가장 중요한 용건을 찾아서 다시 거실로 나갔다.
요안나와 리나는 미묘한 신경전을 하고 있다가 클레어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어는 의아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블룸 남작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블룸 남작님은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서요.”
리나가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요안나가 그녀와 똑같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야말로, 오페라 극장에서 클레어 님을 구해 주셨다면서요. 대단하세요.”
클레어는 공평하게 양쪽에게 웃어 주었다.
클레어는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서류 봉투를 리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실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클레어 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려야지요. 그런데 이건…… 극본이네요?”
리나는 안에 들어 있는 원고 뭉치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극작가를 후원하시게 되었나요?”
“그건 아니고, 좀 필요한 일이 있어서 케이시 쪽으로 건너 건너 의뢰한 초고예요. 원래 극작가였던 분이 아니라고 들어서, 진짜로 무대에 올리려면 손이 좀 갈 거예요.”
“오페라 하우스에 올릴까요?”
리나는 원고를 훑어 읽으며 물었다.
극본은 통속적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이었다. 암행을 나간 왕자가 평민 소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왕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내용이다.
엔딩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 하나는 비극이었다.
클레어는 손사래를 쳤다.
“오페라 하우스라뇨. 그럴 정도의 작품이 아니죠.”
“클레어 님이 원하시면 당연히 해야죠. 할 수 있어요. 슈나이더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니까.”
“너무 눈에 띄는 것도 곤란하고요. 내가 원하는 건, 나중을 대비해서 사람들 마음에 동정심을 심는 것이거든요.”
이게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 클레어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미디어가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의심할 게 없지만, 이 시대의 연극과 악극도 과연 그럴까.
하지만 해 둬서 나쁠 것도 없다.
“극작가가 노출되는 걸 원하는 사람도 아니고, 길거리 공연이나 천막 극단에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끝부분은 각자 원하는 대로 해서……. 그게 오페라 하우스까지 올라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아하, 그렇다면 이건 진짜로 제가 적임이네요. 오페라 극장이 망하면서 아는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거든요.”
“출처 모를 극본으로 만들 수 있겠어요?”
“염려 마세요. 극본에 손대고 싶은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으니까요.”
리나가 눈을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