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6/263)

177화

42. 그녀가 놓친 것들

클레어는 자신이 에리히를 참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에리히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혼여행 중에 급한 일로 돌아간 여자의 편지에 자기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고, 일 아니면 온통 다른 남자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아니, 일이 중요하긴 했다. 게다가 정치든 사업이든 일이 커질수록 관련자가 대부분 남자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차라리 혈통에 따른 상속이 우선인 귀족원이라면 모를까, 하원에 여자가 입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는 특별히 세상의 대세에 저항할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올 미래라지만, 아직 보통 선거조차…….

‘……?’

얼핏 떠올린 단어들에 그는 의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오후였다. 호텔에 간단히 꾸며 놓은 서재는 익숙한 형태였고, 그는 편지를 네 장째 쓰고 있었다.

비서가 자리를 비웠기에 혼자 있었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인 덕인지 정적이 흘렀다. 에리히는 문득 햇살 사이로 아름답게 조각된 목재 창틀이 만드는 그림자를 느꼈다.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을 잊었다. 다른 곳에서 들은 적 없는 낯선 단어들은 아마도 클레어가 마음대로 만들어 쓰는 말이 기억에 남은 것이리라.

그녀가 쓰는 단어는 종종 이상했고, 물어봐도 제대로 설명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에리히는 그냥 흘려 넘기는 습관이 들었다.

마구잡이로 만드는 말이라기에는 그중 여러 가지가 납득할 만한 조어였기에,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는 거의 없었기도 하고.

그는 쓰던 흐름이 멈춘 편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표정을 구겼다.

쓸 만한 자를 찾은 것도 다행이고, 신뢰할 만한 자를 찾은 것은 더 다행이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상대란 말이지.’

에리히는 속으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존중은 틀림없이 자신도 받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클레어가 듣는다면, 그가 며칠 전에 써 보낸 것과 똑같은 내용을 한 줄 적어 보낼 게 틀림없었다.

『자업자득.』

젠장.

그는 자신이 좀스럽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두 통째였다. 수도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지금으로서는 디트마어와 울리히 이야기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른 루트로 쏟아지는 정보도 온통 그 둘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거였다. 클레어가 언제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본 적이 있단 말인가?

스승인 밀러 교수에 대한 인평조차도 ‘존경할 만한 분이죠’라고 하긴 하겠지만, 그 앞에는 ‘학식이’라는 말이 괄호와 함께 들어갈 게 분명했다.

자신더러 거만하다고 그러지만, 사실 진짜 거만한 것은 클레어 쪽이다.

냉정을 되찾고 다시 읽어 보자 써 놓은 편지가 점입가경이었다.

어제저녁에 엘리엇이 철자를 전부 외우는 데 성공했다거나, 또 배 그림을 다섯 장이나 그렸다거나, 지금 커프스 링크를 짝짝이로 달고 있다는 이야기 같은 것밖에 없었다. 커프스 링크 한쪽은 엘리엇이 갖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이 벌써 네 장이나 되는 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다. 얄미운 아내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모두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굴었으나, 그는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가.

하루의 중심이 아이가 되어, 모든 말이 시시콜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필연이었다.

무표정을 유지한 채 그는 뺨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냥 버리고 짧게 안부만 전하는 것으로 할까 생각했을 때였다.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각하. 람스베르크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에리히는 대답하고 나서, 쓰다 만 편지를 접어 문서철에 끼워 놓았다. 이걸 보낼지 말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다.

하인 하나만 거느리고 온 람스베르크 백작은 호텔의 작은 응접실에서 긴장을 전부 풀지 못한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람스베르크는 로멜의 백작가 중에서도 꽤 입지가 좋은 편이었다.

전통이 있었고, 본래부터 좋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황후가 로멜 전역에서 사업을 일으킨 덕에 반사 이익을 얻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리적 이점으로 수입이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자신이 범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굴곡진 일은 아들이었다.

한때는 영특한 아들을 둔 것이 백작의 자랑거리였다. 지배 가문에 가신으로 들어가거나, 상속받을 것이 없는 하급 귀족의 아들들처럼 제 앞길을 제가 뚫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교육에 정성을 들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결과, 오히려 아들은 점점 그가 인정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결국 가문과 절연해 버렸다.

‘그냥 하원 의원 노릇을 하겠다면 그것까지는 그냥 두고 보려고 했는데.’

람스베르크 백작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하원 의원도, 내각의 구성원도. 그것은 귀족들조차도 충분히 존중하는 명예로운 자리다.

처음 절연장을 받았을 때는 불효자식 놈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유언장을 고쳐 쓰고, 가계도에서 이름을 빼 버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진짜로 제힘으로 하원 의원이 되었을 때는 남몰래 기뻐하며 혼자서 축배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를 지나쳤다. 람스베르크 백작은 청문회에서 디트마어가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불편한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결국 클라우제너 공작의 호출까지 받고 말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공작이 나왔다. 람스베르크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네. 결혼식에 참석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절 보셨군요.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았고, 피로연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감사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지. 먼 길에, 썩 화려한 장소도 아닌데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맙네.”

“그것도 제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께서 십수 년 만에 사교 모임을 여시는데, 당연히 기회가 있다면 참석해야지요.”

람스베르크 백작은 정치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 연회는 내가 여는 것이라네. 레이디 엘레나가 내 아들을 맡아 주기로 하셨거든.”

“아, 그러셨군요.”

“작고 가족적인 모임이지만, 인사할 만한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을 거야. 아렌 공왕께서도 여기에 계신다네.”

람스베르크 백작은 난처해졌다.

전 같으면 만날 기회가 흔치 않은 사람을 사귀게 된 것이 기뻤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급되는 모든 사람이 다 아들이 저지르는 일에 얽혀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렌 공왕은 아렌의 상징이었고, 알트마이어는 아마도 에른스트와 적일 것이며, 클라우제너는 공작 부인이 청문회에 섰다.

사실 클라우제너와 에른스트 같은 거대한 가문이 얽힌 이상, 로멜 귀족이라면 그 누구도 이 일에서 완전히 발을 뺄 수가 없다.

심지어 슈나이더처럼 오로지 예술 쪽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가문조차 연루된 상태다.

람스베르크 자신은 아들 문제만 제외하면 결백하다고 생각했으나, 제 아들이 따지는 방식대로라면 하인은 물론 소작농까지 전부 조사해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 일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람스베르크 백작은 무표정한 공작의 심경을 짚어 낼 길이 없었다.

공작 부인과 아렌, 알트마이어를 이어서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에른스트와 황후를 적대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 같기도 하다.

이게 진짜 사적인 자리라면,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 자신을 불러 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공작은 공작 부인을 방치하고 있고, 아렌 공왕은 오랫동안 칩거한 상태였으며,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은 아이를 맡기 위해 나선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로 사적인 모임이다.

그때였다. 금발 머리에 사랑스러운 소년이 문을 쾅 열고 안으로 우다다 달려 들어왔다.

“아빠! 아빠! 아빠아빠아빠아!”

에리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엘리엇, 예의는?”

“어.”

“함부로 소리를 지르면서 복도를 달리고, 응접실로 뛰어드는 것은 어떤 사람이지?”

“우…….”

무릎에 매달렸는데 안아 주기는커녕 엘리엇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엘리엇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람스베르크 백작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니오.”

에리히가 말했다.

“대답은?”

“우…… 응……. 쓰레기요.”

엘리엇이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대답했다.

에리히는 말을 잃었다. 예의 없는 사람이라거나 신사가 아니라거나 착한 어린이가 아니라는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클레어!!’

그는 마음속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엇이 이 말버릇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명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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