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7/263)

178화

에리히는 이를 박박 갈았다.

아이가 배우니까 말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던가. 그래 가지고 여태까지 착하게 키워 온 게 놀라웠다.

클레어가 들으면 또 한 판 싸울 건이다. 에리히와 같이 살기 전에는 자신의 언어생활도 훨씬 고상했을 거라면서 말이다.

단둘이 있을 때 입이 느슨하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싸우는 것도 그렇고, 엘리엇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지만,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가르치려고 애쓴 것보다 가르치지 않은 것을 더 빨리 배우는 것인가.

“후.”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람스베르크 백작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엘리엇은 에리히가 왜 한숨을 내쉬는지도 모르면서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무작정 용서를 구했다. 아빠한테 혼나는 일은 정말로 드물어서 서러웠다.

“잘못했어요.”

그 얼굴을 보니 또 안쓰러웠다. 클레어가 없다고 불쌍해서 너무 어리광을 받아 준 것 같아서, 엄하게 하자니 또 자신이 지나친 건가 싶었다.

클레어가 없는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어깨가 무거웠다.

처음에 엘레나를 초빙하기로 했을 때는 좋은 교육자와, 만약의 경우 영향력 있는 보호자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으로 결정했으나, 이제 에리히는 진짜로 그녀만 믿고 있었다.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은 아무래도 자신 쪽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에리히는 엘리엇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내려놓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그는 말했다.

“사람에게 그런 단어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그러면, 뭐라고 해요?”

“그냥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돼. 물론, 너는 예의를 잘 지키는 신사가 되어야 하고.”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해를 했는지 어떤지는 모를 일이다.

그는 이번에는 응접실 앞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노려보았다.

엘리엇의 호위는 교육 담당이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응접실 경호원은 손님이 있는 응접실 문을 마구 열게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가신과 고용인들이 아이에게 무르다 못해 녹은 푸딩처럼 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러다가는 진짜로 경호에까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경호원들이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손님 앞이었으므로 에리히는 그 이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자, 아빠는 접견을 마쳐야 하니, 예의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유모에게 가 봐라.”

“네. 아 참! 제임스 할아버지가 왔어요.”

엘리엇은 조금 시무룩했지만, 잊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전해 줘서 고맙다. 엘리엇!”

그의 언성이 올라가자 막 뛰어나가려던 엘리엇이 깜짝 놀라 다리를 얌전히 놀렸다.

에리히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람스베르크 백작에게 말했다.

“미안하군. 아직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전이라.”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영특하고 아름다운 아드님이니,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의 가르침을 받으면 금세 훌륭한 후계자로 자리 잡으실 겁니다.”

람스베르크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다섯 살 아이가 부모의 여행에 따라와 손님에게 얼굴을 내보인다는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런 것을 따질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귀여운 아이였다.

그의 아들도 제 나이에 결혼을 했으면, 그도 지금쯤 그만 한 손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에리히가 말했다.

“훌륭한 아들을 둔 이가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 되는군.”

저도 모르게 람스베르크 백작은 몸을 굳혔다. 그리고 에리히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에리히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아이가 있을 때는 껍질이 깨진 듯 내심을 드러냈던 얼굴이 금세 매끄럽게 구워진 자기처럼 우아한 귀족의 것으로 변했다.

람스베르크 백작은 긴장으로 침을 한 번 삼켰다.

사실 클라우제너 공작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이 문제를 염려하고 있었다.

공작이 설령 부인과 별거하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자기 아내가 젊은 남자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기꺼워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못난 놈입니다.”

그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버린 놈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다녔지만, 진짜로 아들에게 흠이 생기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공작에게 미움받는 일은 더더욱 안 된다.

에리히가 말했다.

“사람이 큰일을 하려다 보면 뒤를 잊기 쉽지. 그래서 이래저래 고민은 있었지만 결국 백작을 부르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네.”

“예.”

대답은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백작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수도가 몹시 시끄러우니까 말이야. 백작만이 아니라 델포드 경과 그 외에도 몇 사람을 초청했다네. 내 아내도 세심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아.”

“백작이 괜찮다면, 당분간 여기 머무르는 것은 어떤가? 불편하지 않다면, 백작 부인에게도 다시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지.”

에리히가 말을 이었다.

“물론 백작이 황후 폐하의 초대를 이미 받아들였다면, 내가 강요할 순 없겠지. 백작 부인은 에른스트의 방계이기도 하고.”

람스베르크 백작은 그가 말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에리히가 그를 보호하고자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곧 연락을 넣겠습니다. 에른스트와 혈연이 있다고 해도 황후 폐하께서 봄 소풍에 초대할 만한 신분도 아니고, 늘 알트마이어 백작 대부인을 존경해 왔으니, 뵐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버릇없는 아이가 끼어 있는 봄 소풍이니, 부디 잘 이해시켜 주게.”

“버릇이 없다뇨.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화는 실제로는 아이 이야기가 아니다. 에리히가 말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말했으니, 람스베르크 백작도 그의 뜻이 자신에게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대답한 것이다.

에리히는 집사에게 람스베르크 백작 부부의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일어섰다.

신경 써야 할 곳이 많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황후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클레어의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흘린 일투성이였다.

가족 문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니 자신이 챙겨야 했다. 람스베르크만이 아니라 델포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보다 손쉬운 인질은 없다.

‘큰일을 하려면 잔인해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황후는 디트마어 따위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자가 몇 명 있어 줘야 불만이 임계점에 달해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방치했다.

황금 새싹단 같은 조직을 만들어 반정부 조직을 적당히 자율적으로 활동하게 한 것도, 클레어를 내버려 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하지만 이제 황후는 제대로 공격을 당했다. 그녀가 아직도 우아하게 여유를 부릴 것이라고 에리히는 생각지 않았다.

울리히 하비흐나 로저 카슨은 자기 가족과 집을 지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힘이 모자랄 때를 대비해 미리 연락을 보내 두었다.

슈나이더 백작가도 신경 써 줘야 할 곳이다. 이미 백작에게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저택 경비와 백작의 경호에만 도움을 주는 쪽으로 일단락 지었다. 리나는 클레어가 보호할 것이다.

무방비인 델포드에도 사람을 보냈다. 델포드를 관할에 넣고 있는 지방관이 대놓고 치안을 망가뜨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아렌 공왕이나 무어 공작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의는 기울여야 한다.

황후는 이미 생각도 못 할 만큼 과격한 수단을 쓴 일이 있다.

[정세가 어지러우니, 델포드를 공격하는 건 더 쉬울 거야. 황금 새싹단 같은 단체가 하나만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델포드와 사우스랜드 곡물상은 거리가 가깝군요. 델포드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에머슨 공단에 이어 두 번째가 됩니다. 이러면, 클레어가 불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어요.]

[배후에 황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람스베르크 의원의 발언에서 촉발된 것처럼 보일 테지.]

윌리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델포드만 생각하면 그렇긴 합니다만, 황후 입장에서 너무 위험한 짓 아닙니까? 남부 아렌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그건 중부로도 번질 겁니다. 운이 나쁘면 북부 로멜까지도요. 진짜가 됩니다.]

[황후는 이미 어디까지 물러날지 결정했을 거야.]

에리히는 마치 이미 아는 사실을 말하듯이 단호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하나 내주지 않으면 안 돼. 그 자체는 이미 확정된 거야.]

[예.]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패전한 것처럼 전부 내줄 수는 없지 않겠나? 황후 입장에서는 협상이 진행되기 전에 상대의 구심점을 제거해야 해. 그래야 그녀가 내주는 이득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사분오열할 테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승리를 통해 강력한 정적을 키우지 않는 것이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관련자를 잔인하게 해치우면 해치울수록, 의원들은 몸을 사리고 그녀의 우산 아래 머물러 있으리라.

그러니 일시적으로 문제를 키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황후의 가장 큰 리스크는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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