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에른스트가 아무리 영향력을 확대하고, 클라우제너의 재력이 거대하다고 해도, 그들이 국가 자체를 압도할 수는 없다.
에리히도 보안부니 경호팀이니 하는 이름으로 상당한 규모의 정보 조직을 운용하고 있지만, 지금은 가장 중요한 사람만 골라 지키는 것으로도 한계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믿을 만한 사람을 단숨에 수만 명씩 뽑아서 편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황후가 에른스트 공작가의 실세이자 막후 권력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황후가 되고자 한 것도 결국 그 때문이다.
황후는 내각을 조종하고 ‘황실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간접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황제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뒤집을 수 있었다. 황후는 합법적인 권력을 쥐고 있지 않다.
아렌 공왕이 황제를 설득해 함께 알트마이어 백작가를 방문한 것은 감상적인 이유였으나, 생각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카드가 이쪽으로 넘어온 셈이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칩거를 깨면 황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른스트의 재력으로 내전을 일으키는 건 무리지. 황후는 결국 리누스를 즉위시키는 수밖에 없어.’
클레어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을 좀 해야겠는데, 편지로 쓰기에는 너무 예민한 문제다.
‘윌리엄을 직접 보내는 것이 좋겠군. 편지는 그에게 들려 보내면 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가 펜을 들었을 때였다.
쿵!
어디에선가 폭죽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에리히는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각하!”
노크도 없이 보좌관이 문을 벌컥 열었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폭동입니다!”
“폭동?”
에리히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콰아앙……!
그 순간, 다시 폭음이 들렸다. 동시에 에리히가 발밑까지 흔들렸다.
43. 추문
디트마어 람스베르크가 웨슬리 경의 방문을 받은 것은 그 사건이 있기 이틀 전의 일이다.
웨슬리 경은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상단주로서, 남부 아렌에서 클레어와 더불어 가장 먼저 철로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었으며, 가장 빠르게 상공업에 적응한 사람이기도 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디트마어는 이미 클레어로부터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실질적인 주인이 황후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나자 웨슬리 경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 람스베르크 의원님께서는 저를 오해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해가 개입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웨슬리 가문은 비록 작위는 없지만 사우스랜드 일대에서 존경받는 가문이고, 경영하고 계시는 상단도 아주 훌륭하게 운영 중이신 것으로 압니다.”
웨슬리 경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전 제 상단이 가진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문이나 저 자신이 유명해질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여자의 몸으로 가문을 이끌며 혁신적인 성공을 거둔 델포드 남작님과 달리, 그저 대량의 곡물을 싼값에 유통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우스랜드 평야는 제국의 빵 바구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입니다. 거기에서 가장 대량의 밀을 취급하고 있는데, 단지 ‘싼값에 유통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나친 겸양입니다.”
“의원님이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 모든 일을 제가 단독으로 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겠군요.”
디트마어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는 정치인이었으나 교묘한 언사를 장기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울리히가 상대하는 쪽이 나았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울리히도 기꺼이 떠맡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응대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웨슬리 경이 품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담뱃갑을 꺼냈다. 디트마어는 대신 그에게 시가 상자를 내밀었다.
그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나, 남이 자신의 앞에서 출처 불명의 연기를 피우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아, 감사합니다. 이것 참, 처음에는 연잎 궐련을 안 피우려다 보니 시작한 건데, 요즘에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게 꼭 있어야 하더라고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많이 있지요.”
디트마어는 시가를 손수 자르고 불을 붙여 웨슬리 경에게 건넸다. 웨슬리 경은 그것을 받았으나 한 모금도 빨지 않고 입을 나불거렸다.
“아무튼, 저는 대체로 남의 일을 맡아 하는 상인입니다만, 그러다 보니 제 그릇의 한계도 잘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물론 제 한 해 수입은 놀랄 만큼 많습니다.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자산도 아마 의원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 가문이 수도에 번듯한 저택을 세운 다음 장학 재단을 만들지도, 딸들을 훌륭한 신사에게 시집보내지도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웨슬리 경이 시가를 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는 아주 보수적인 안전주의자란 뜻입니다. 젊었을 때는 웅대한 꿈을 가졌던 때도 있지만, 나이 들수록 남의 눈에 띄는 게 썩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땅과 곡물을 다루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나 봅니다.”
“그래서요?”
“화물의 안전을 위해서는 하중을 분산하는 게 중요하지요. 저는 사우스랜드의 교량을 보수하거나 새로 세우는 데 돈을 보태곤 하는데, 좀 흉물처럼 보이더라도 꼭 기둥을 촘촘하게 세우라고 말하곤 합니다. 비용을 아끼느라 몇 개 빼먹었다가 다리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되레 손해가 막심하니까요.”
그 뒤로 웨슬리 경은 사우스랜드의 도로 이야기를 십여 분간 계속했다. 얼핏 들으면 도로 보수에 예산을 더 투입해 달라는 청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침내 그가 떠났을 때, 비서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물어봤을 정도였다.
“사우스랜드의 지난 3년간 도로 보수 예산에 대해 알아볼까요?”
“아니.”
디트마어는 웨슬리 경이 거의 입에 대지도 않은 시가를 껐다. 그리고 웨슬리 경이 테이블에 내려놓고 가 버린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사무실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경호팀장 셰퍼가 다가와 그것을 디트마어의 손에서 받아 들고, 장갑을 낀 손으로 대신 열었다.
안에는 담배 두 개비와 말린 양귀비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담뱃갑은 순금이었다.
“아.”
비서가 비로소 알아챈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이것은 뇌물이다.
디트마어는 그것보다 좀 더 깊은 것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웨슬리 경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이쪽에도 다리를 걸쳐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요컨대,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서’ 말이다.
말린 양귀비꽃은 그것에 관한 정보가 있다는 의미로 남겨 두고 갔으리라.
‘공작 부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겠지.’
웨슬리 경이 클라우제너에 직접 닿는 연줄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정보는 그녀가 준 것이다. 그러니 웨슬리 경의 정보도 전달하는 게 옳다.
‘당분간은 만남은 곤란하다고 했으니, 셰퍼 경을 통해 편지를 전달하면 되겠지.’
그렇게 결정하고, 디트마어는 담뱃갑을 서랍에 넣고 잠갔다.
“오늘은 이만 끝내지요. 수고했습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의원님.”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비서 두 명과 인사를 나누고 그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셰퍼와 다른 경호원, 셋이 그를 따라붙었다. 디트마어는 사실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디트마어 람스베르크 경?”
길가에 서 있던 여자 하나가 불러 세울 때까지 말이다. 디트마어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해가 졌기에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여자는 어둠 속에 녹아드는 어두운 색 드레스를 입고, 턱까지 내려오는 검은 베일로 한 바퀴 빙 두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귀족 여성이거나, 적어도 부유한 가문 사람처럼 보였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제가, 제가, 꼭 알려 드려야 할 일이 있는데.”
여자가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부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앨리스 웨슬리예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는 마지막 단어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디트마어는 낮은 목소리로 확인했다.
“웨슬리 부인?”
“네.”
“제게 알려 주실 일이, 오늘 남편분이 저를 방문한 것과 관련 있는 문제입니까?”
웨슬리 부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편은, 함정을 파려는 거예요.”
평소라면 좀 더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트마어는 오늘 이미 웨슬리 경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구심을 느낀 다음이었다. 게다가 귀족으로서 받은 교육은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혼자 있는 숙녀는 보호해야 할 존재이지,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 쪽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마땅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여자가 겁을 먹고 움칫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것이 경호원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셰퍼 경.”
“안 됩니다.”
“셰퍼 경.”
디트마어는 그녀를 돌아보고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셰퍼 경만. 숙녀분이 겁을 먹고 있으니까요.”
셰퍼는 그 말에 납득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다른 경호원 두 명이 물러섰다.
디트마어는 두 손을 한 번 들어 여자를 진정시키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천천히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괜찮습니까, 웨슬리 부인? 혹 다른 숙녀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니요. 아뇨, 저는 괜찮아요.”
여자가 망설이며 한 걸음 더 물러나, 두 사람의 몸이 가로등의 불빛이 닿는 범위로 들어섰다.
디트마어는 문득, 베일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이 적갈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익은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