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디트마어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주목받는 사람이다. 굳이 그를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정보를 얻으려는 자가 붙인 주시자가 몇이나 있을 터이다.
비록 해는 졌지만 아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 시간이었다. 인근에 있는 식당이나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흘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상대를 의심할 수도 없었다. 적갈색 머리는 희귀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예감은 웨슬리 부인의 머리칼만이 아니라 키와 실루엣까지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였으나, 본디 여자의 옷차림에 무지한 탓에, 그녀가 정체를 숨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몇 가지 특징만 일부러 드러냈다는 것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염려하며 말했다.
“웨슬리 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 자리를 피하는 쪽이 낫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울먹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웨슬리 경 때문입니까?”
그가 되물은 찰나였다. 웨슬리 부인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뺨에 대려 했다.
놀란 디트마어가 물러서기 전에 매운 냄새가 확 코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헉.”
다음 순간 의식이 흔들렸다.
눈앞이 흐려지고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디트마어가 비틀거리자 여자가 품으로 들어오며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작게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가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여자는 웨슬리 부인이 아니다.
그러나 디트마어에게는 그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손발에서 기력이 빠져나갔다. 마비약의 일종인 듯했다.
그는 셰퍼 경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그 결과를 보지 못했다. 몸의 움직임보다 의식이 먼저 사라졌다.
율리아는 레나테와 함께, 거기에서 한 골목 떨어진 낡은 대여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디트마어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레나테가 말했다.
“너무 거칠지 않니? 이렇게 억지스럽게 스캔들을 만들어 봐야 믿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율리아는 미소와 우아한 예법 속에 본심을 숨기는 것도 잊고 대꾸했다.
레나테가 짐짓 놀라는 척하며 되물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난 그냥 걱정해 주고 있는 거야. 람스베르크 경을 확보한 건 좋지만, 결국 네 계획은 공작 부인을 사로잡아야 끝나는 거잖아?”
“레나테 님, 도와주지 않으실 거면 이만 가 주세요. 지금부터 예민한 상황이라서요.”
“그래. 성공하길 바라. 네가 실패하면 그다음은 내 차례인데, 나는 스테판이 공작 부인을 유혹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레나테가 새침하게 말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고작 그 한마디에 원한을 품고 속을 긁으러 여기까지 온 건가. 율리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레나테의 말이 옳다. 목격자를 만들고 기사를 뿌린다고 해도 클레어 델포드에게 결정타가 될 가능성은 적다.
그녀를 먼저 사로잡은 다음 디트마어를 끌어내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행 단계에 들어가자 율리아의 계획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의 가드는 그녀가 감히 뚫고 들어갈 수준이 아니었으며, 클레어 자신도 스스로의 처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해를 사거나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그녀를 끌어내려면 지금으로서는 디트마어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도 곁에 없고, 일가친척도 모두 수도에 없다. 달리 인질이 될 만한 자가 없다는 뜻이다.
‘이건 밧줄 다리야.’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쪽에서 몇 번 흔들어 본다고 해서 건너는 동안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다. 저쪽에서 밧줄이 썩어 있을지, 누가 칼을 들고 기다릴지,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황후에게 호언장담을 했으며, 중요한 인물을 지원받았다. 시도조차 하지 않고 실패할 수는 없다.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실적을 거둬야만 한다.
‘적어도 람스베르크는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어.’
하지만 단순히 암살로 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불륜 의혹을 확실하게 만들지 못하면, 공작의 분노를 율리아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곧 마차 문이 열렸다. 셰퍼가 혼절한 디트마어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앨리스 웨슬리라고 주장했던 여자는 이제 아예 어깨까지 떨며 울고 있었다.
“듣기 싫어.”
“유, 율리아, 그치만…….”
울 거면 내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할 거야? 진짜로 죽일 생각이니?”
“알면서 협조했잖아.”
“이 일은 성공하기 어려워, 율리아 양.”
셰퍼가 싸늘하게 말했다.
“람스베르크 경이 행방불명되면 막시밀리안 경은 나부터 찾겠지. 아니면, 나까지 죽여서 입을 막으면 되나?”
그 말에 율리아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셰퍼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클라우제너 호위팀에서 지금의 입지를 다질 때까지 15년도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고작해야 이런 일로 그걸 팽개치다니.”
“황후 폐하께서 내 지시를 따르라고 명하셨을 텐데요.”
율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셰퍼 양이 내게 화가 난 것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던 명령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
셰퍼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작위 없는 여자의 몸이면서도 경이라는 경칭을 듣게 되기까지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율리아가 셰퍼 양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를 깔아뭉개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 셰퍼는 황후의 명을 받아 클라우제너에 들어갔으니, 거기서 얻은 경칭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영원히 없을 줄 알았던 명령이 있었다는 것도 맞다. 아니, 정확히는 영원히 없길 바랐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율리아가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문을 두드려 마차를 출발시켰다.
새벽에 클레어는 잠들지 못하고 침대 밖에 있었다.
어쩐지 속이 느글거리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배 속도 울렁거리는 것 같아 화장실에 들락거리면서, 그녀는 전날 먹은 걸 돌이켜 보았다.
딱히 기름진 것을 먹은 것은 아니었는데, 요 며칠 계속 그랬다.
‘아, 밥 먹고 싶다.’
김치라든가. 나물도. 쌈장도. 마늘을 듬뿍 올려서.
이른 새벽에 쌈밥이 맹렬하게 먹고 싶었다. 강된장에 호박잎. 아니면 우렁이. 찌개나 탕도 좋다.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이 필요했다.
그간은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적당히 소뼈로 국물 낸 맑은 수프와 요리사를 닦달해 만드는 어중간한 쌀 요리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었다. 역시 위장 연령이 20대 후반에 도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스레인지로도 솥 밥을 해내지 못했는데, 결국 화덕으로 시도해야만 하는 날이 온 것인가.
일이 바쁘고 생각할 것도 많지만 오늘은 그러지 말아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방으로 가 봐야지.
요리를 좀 배워 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과 어차피 화덕으로는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그녀가 물만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쾅쾅!
다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녀장과 요안나가 같이 뛰어들어 왔다.
“아!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무슨 일 있어?”
“윙스 신보의 편집장이 오늘 아침 조간 호외로 찍고 있는 기사를 가지고 왔어요.”
요안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 잉크가 묻어나는 인쇄물 한 조각을 내밀었다.
“디트마어 경과 내가 마주 끌어안은 채 마차를 타고 호텔로 사라져?”
클레어는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직접 보자 추잡함이 상상을 뛰어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빡친 공작님이 총을 들고 나타나 불륜한 아내와 그 상대를 쏘아 죽였다는 것까지 나오면 아주 시나리오 완성이네.”
사진이 없으니 증거를 댈 수도 없지만, 요구할 수도 없다. 될 대로 되라고 막 던지는 기사였다.
“목격자가 있다고 합니다.”
요안나가 다급히 말했다. 클레어는 눈을 깜박거렸다.
“뭐, 어차피 목격자는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기사는 막아야겠어.”
어차피 헛소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테지만, 너무 퍼져서 좋을 것도 없다.
이 계획을 세운 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그녀가 타블로이드지만 사고 끝이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애당초 사들인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기자들의 정보를 남들보다 빨리 파악하는 데 있었다.
설마 이런 기사를 황후가 쥐고 있는 정론지에서 낼 작정은 아닐 테고 말이다.
“네. 인쇄소에서 전부 회수하겠습니다.”
“누가 기사 썼는지 확인해 줘. 그리고 디트마어 경에게 심부름꾼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괜한 일에 동요하지 말고 할 일 하시라고.”
그리고 그 심부름꾼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피에 젖은 디트마어의 호위 하나가, 정문 앞까지 대여 마차를 타고 와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