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0/263)

181화

의무실에서 피를 닦아 낸 호위의 얼굴을 직접 보고, 클레어는 한숨을 쉬며 의사에게 물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보이는 것만큼 큰 부상은 아닙니다. 이마가 찢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고, 옷에 묻은 피 일부는 본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식이 없는데요.”

“약을 마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취제도 준비하지 않고 바늘에 실을 꿰었다. 클레어는 소독을 꼭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고 밖으로 나왔다.

작년에 에리히가 쓰러졌을 때는 죽은 하녀를 보고 충격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는데, 그사이에 이런 일에 익숙해졌는지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클레어 님.”

막시밀리안이 염려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눈을 감고 손을 내저었다.

이런 세상이다. 알고 있으니까 5년 전 그날 두려워하며 달아났던 것이고, 위빙 상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익숙해진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폭력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쉬운 수단에 대해서 전보다 쉽게 떠올리게 된다.

이제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편리하고 부도덕한 수단을 택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거실로 돌아온 클레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 핀 바우어가 왔습니다.”

핀은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언제든 연락하라며 디트마어에게 붙여 주었던 심부름꾼이다. 클레어는 일부러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두었고, 곧바로 불러 만났다.

“마님, 새벽인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람스베르크 의원님이 새벽에 사람을 보내실 정도의 일이라면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추문 기사나 피투성이 호위의 일은 일부러 말하지 않고 클레어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핀이 품에서 얼룩진 봉투 하나를 꺼내 받들어 올렸다.

요안나가 대신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클레어에게 건넸다. 틀림없는 디트마어의 필적이었다.

앞뒤의 짤막한 인사를 자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남았다.

『웨슬리 경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주 은밀한 방문은 아니었지만, 마부 한 사람만 데리고 단출하게, 갑자기 찾아온 것을 보면,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양쪽에 발을 걸쳐 두고 싶은 것 같습니다만, 그가 진짜 사우스랜드 곡물상의 주인이 아니라 단순 경영자라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테지요. 지분 관계에 대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웨슬리 경이 양귀비꽃이 들어 있는 금 담뱃갑을 두고 갔으니, 제가.』

편지는 일단 거기에서 끊겨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다급하게 갈겨쓴 글씨로 적혀 있었다.

『웨슬리 부인 위험. 숙녀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꼭 직접 와 주셔야 합니다.』

손바닥에 놓고 쓰기라도 한 듯 필적을 구별하기 어려운 글씨였다.

“흠.”

클레어는 편지를 접으며 핀에게 물었다.

“디트마어 경이 지금 이걸 맡겼나요?”

“셰퍼 경이 가져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더군요.”

“아아, 그래요? 달리 또 구두로 전할 내용은 없나요?”

“셰퍼 경이 주소를 하나 알려 주었습니다.”

그가 따로 접은 쪽지 하나를 요안나에게 건넸다.

클레어는 그에게 더 묻지 않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돌려보냈다. 핀은 어차피 전령 역할이다.

그녀는 막시밀리안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셰퍼 경이 배신자인 것 같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당황할 만한 편지였다. 사우스랜드 곡물상, 양귀비꽃, 웨슬리 경의 이름이 나온 상태에서 숙녀의 명예가 걸려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디트마어는 진중한 사람이다. 그러니 예전 같으면 얼마나 다급한 일인가 싶어, 단출한 호위만 거느리고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오페라 극장에서 납치당해 보기 전에는 지금보다 경계심이 얕았고, 자신의 위치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클레어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꼭 황후만이 아니라도, 그녀가 아편과 노예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바람에 손해를 본 자가 많았다.

게다가 이미 손에 쥔 정보가 너무 많다.

‘내가 디트마어 경과 같이 마차를 탔다는 기사를 어디에 써먹으려나 했는데, 오늘 밤에 바로 행방불명시켜 버리면 말이 되긴 하지.’

공작 부인이 어디 갔느냐고 찾을 때, 다른 남자와 같이 마차에 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나오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요안나가 중얼거렸다.

“피투성이로 돌아온 사람이 있는데, 그동안 셰퍼 경은 거짓 편지를 전달한 것이군요.”

“제 불찰입니다.”

막시밀리안이 무릎을 꿇었다. 클레어가 당황해서 그를 일으키려고 자신도 일어섰다.

“막시밀리안 경의 불찰이라뇨. 배신은 배신자가 잘못한 거예요. 셰퍼 경의 경력은 무척 훌륭했잖아요. 에리히가 1차로 고르고 내가 최종적으로 선발했는데요.”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신중하게 택했어야 했습니다.”

“한정된 풀 안에서 사람을 뽑아 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클레어가 말했다.

“나 때문에 보안부의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잖아요. 계속 새 사람 뽑고, 전 같으면 훨씬 중요도가 낮은 일을 할 사람을 발탁해서 위로 끌어올리고.”

셰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사실 본성이나 직계의 호위를 맡을 입장은 아니었다. 보안부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신분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맡으려면 가족과 집안이 모두 클라우제너와 충분히 얽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위 역을 맡을 수 있는 여자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에리히는 클레어의 호위와 비서를 구성할 때 가능한 한 여자로 뽑고 싶어 했고, 셰퍼는 그 점에서 다소 이득을 본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만들었던 목록에서 클레어가 사람을 발탁하여 디트마어에게 보냈으므로, 결국 최종 책임자는 클레어 자신인 셈이다.

“제가 셰퍼를 잘못 봤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그를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15년이나 아무 낌새도 들키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이에요. 게다가 이번에 새로 검증을 했었고요.”

“예.”

“그런데도 들키지 않았던 건 막시밀리안 경이 실책을 저지르거나 잘못 판단한 게 아니에요. 모든 일에 완벽할 순 없어요. 게다가 저쪽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면서 막시밀리안의 시선을 똑바로 붙잡았다.

그가 몇 번 눈을 깜박거리고는, 클레어의 뜻을 이해한 듯이 천천히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라니까.”

“클레어 님이 용서하시든 아니든, 제 잘못은 맞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용서를 비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디트마어 경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다녀올까요?”

“내 생각에, 이 주소에 디트마어 경은 없을 거예요.”

클레어가 쪽지를 검지와 중지로 흔들며 말했다.

“보나 마나 습격하기 좋은 외진 장소겠죠. 내가 설마 혼자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막시밀리안 경이 사람을 거느리고 가면 그대로 숨어 버릴 거예요.”

“그러면 제가 가겠습니다.”

요안나가 말했다.

“아직 새벽이니까요. 베일을 쓰면 얼굴까지는 구별되지 않을 거예요.”

“널 미끼로 쓸 수는 없지.”

“제 생각에는 클레어 님의 마차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여자가 필요하다면 보안요원 중에도 실력 있는 자가 있습니다.”

“아뇨. 황궁으로 갈 거예요.”

클레어가 선언했다.

두 사람 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15년 전에 클라우제너 안에 간자를 숨겼다가 이번에 사용했어요. 그런 사람이 황후 말고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잖아요?”

15년이나 동료와 신뢰를 쌓으며 일해 온 사람을 갑작스럽게 포섭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우도 좋은 편이고, 게다가 셰퍼의 가족은 아직도 클라우제너 영지에서 살고 있다.

그것을 감안해 보면, 아마 오래전, 아무런 직책도 없었던 무렵부터 포섭하여 미리 숨겼다는 쪽이 말이 된다.

그 말에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5년은 넘은 일일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클라우제너를 견제하면서 간자를 심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적어도 지금 내가 미워 죽을 것 같은 로멜 우월주의자나, 노예계 때문에 재판정에 서게 된 사업가는 아니겠지요.”

실행한 사람이 누구든 간에 황후의 뜻을 그대로 받들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계획 자체가 실패하기 너무 쉬운, 머릿속으로만 만들어 낸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 됐든, 이야기할 사람은 황후예요. 디트마어 경의 생살여탈권은 그녀가 쥐고 있을 테니.”

클레어가 말했다.

“황궁으로 가겠어요. 노이만 의장을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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