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해도 뜨기 전의 호출에 노이만 의장은 깜짝 놀랐지만, 두말 않고 마차에 올랐다.
그가 도착하는 사이에 황궁을 방문할 수 있을 만큼 차림새를 갖춘 클레어가 공작저의 로비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부인께서 별것 아닌 일로 이런 새벽에 동행을 요청하실 분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무슨 일인지는 궁금합니다.”
“디트마어 경이 행방불명되었어요.”
편지에 자세한 내용을 쓰지 않았기에 노이만 의장은 깜짝 놀랐다. 그에게 굳이 숨길 필요 없었으므로 클레어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저 혼자 가면, 사적인 문제처럼 보일까 봐 염려가 되더군요. 물론, 저는 황후가 디트마어 경과 저의 추문을 만드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하원 의원의 납치가 사적인 문제여서는 절대로 안 되죠.”
“당연합니다. 제가 클라우제너와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설령 황후 폐하의 복심이라고 하더라도 하원 의원이라면 모두 동의할 겁니다.”
그는 클레어보다 더 분개하며 말했다.
하원 의원의 신변은 증거가 확실한 반역죄가 아니라면,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연설회와 지지자 모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원을 구성하는 기반이고, 하원 의원의 가장 큰 권력이었다. 그리고 의원이 되고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의회 내에서 파벌이 갈리고, 후원 세력과 귀족 가문의 영향을 받으며 드러나지 않는 권력 다툼을 하고 있어도, 그들은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의원들은 그들의 안정과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침해당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황후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지금까지 신중하게 처리해 왔다.
노이만 의장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두 시간만 주신다면, 긴급회의를 열도록 하지요.”
“지금은 안 돼요. 만일에 그랬다가, 디트마어 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요?”
사람이 죽는 것도 문제였으나, 그 과정과 결과도 문제였다.
만일에 그가 참혹한 끝을 보이게 된다면, 의회는 분노할 수도 있으나, 어쩌면 공포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황후가 아무 준비도 없이 이런 일을 시작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몇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균형을 황후 스스로 깨뜨리는 순간이다. 그녀가 무슨 패를 더 숨기고 있는지 클레어는 알지 못했다.
노이만 의장이 무겁게 말했다.
“적어도 황후 폐하께서 더 이상 의회를 존중하지 않을 작정이신 건 확실한 것 같군요.”
“언제나 확실한 건,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힘밖에 없긴 하죠.”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마차가 황궁으로 들어섰다. 이른 새벽에 입궁이라니 비상식적이었으나,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과 하원 의장이 함께 방문했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새벽부터 청소를 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하지만 황궁은 아예 잠들어 있지 않았기에, 특별히 어지러워지지도 않았다.
응접실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아우구스타였다. 장식 없는 편안한 옷이었지만, 외출도 가능한 데이 드레스에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상태였다.
클레어는 아무 일 없이 티타임에 초대받아 온 사람 같은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아우구스타. 주무시지 못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나이 들면 잠이 얕은 법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이전에 제대로 저녁 초대를 해야지 하고 계획 중이었는데, 갑자기 귀경해 버리셔서 무척 아쉬웠답니다.”
“신혼부부가 함께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안 될 일이라고 새삼 깨달음을 얻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혼자 돌아오실 줄 알았다면, 그때라도 두 분과 함께 식사할 것을 그랬지 뭡니까?”
“그러게요.”
별거 중이 아니었으므로 클레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아우구스타는 노이만 의장과도 인사를 나눈 후에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이 이렇게 이런 시각에 방문하신 것은 분명히 그만큼 중한 용건이 있으시기 때문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알현은 어렵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침수 중이십니다.”
“그러시군요. 레이디 아우구스타께서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계시는 것을 보니 황후 폐하께서도 고심 중이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어쩔 수가 없군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아우구스타는 긴장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겨, 황후는 지금 클레어를 만날 수 없었다. 그녀는 율리아와 별개로 사람을 보내 두었으나, 아직 일이 처리되었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한두 시간만 기다리게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클레어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황후 폐하께서 이런 일에 관여하실 권한은 없으셨는데.”
“공작 부인.”
“어리석은 생각으로 새벽 일찍 레이디 아우구스타의 잠을 깨웠네요. 황후 폐하를 저 때문에 깨우실 필요는 없어요.”
클레어가 노이만 의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본궁으로 가지요, 의장님. 생각해 보니, 지상에서 가장 거룩하신 프리드리히 대제께서 황금 두루마리에 남기신 유훈에 따라, 제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의회를 수호하는 것은 황제 폐하이시니, 역시 이 일은 제국 그 자체이신 황제 폐하께 고하는 것이 옳겠어요.”
이 말에 노이만 의장이 당황했다.
황제가 이런 시간에 알현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태연하게 말했다.
“처음으로 조카며느리가 알현하여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데, 거절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의 신분이라면 능히 본궁의 문을 열 수 있다.
차라리 황제가 자리에 있다면 황명을 빙자하여 알현을 거절할 수 있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문을 열라고 강요하면 시종들은 끝까지 거부하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부재중이라는 것을 알고 내각의 수장인 노이만 의장이 권한을 대행하겠다고 나오면, 진짜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만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아우구스타는 망설였다.
클레어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 응접실의 안쪽 문이 열렸다.
지친 얼굴의 황후였다.
그때 율리아는 불안감을 누르려고 애쓰며 안전 가옥에 있었다.
편지를 전달하러 간 셰퍼는 돌아오지 않았고, 클라우제너 저택을 살피라고 보낸 자에게서도 소식이 없었다.
‘과연 공작 부인이 직접 움직일까?’
율리아는 온갖 생각을 거듭했으나, 결국 그 생각은 모두 그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어차피 황후 앞에서 말을 꺼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든 나은 상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제는 마음이 어지러워 머릿속이 꽉 막힌 듯이 같은 문장만 마음속에서 반복되었다.
‘시시해. 시시해.’
그건 그녀가 평생 해 온 생각이었다.
“율리아.”
앨리스 웨슬리, 아니 엠마가 울먹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율리아의 소꿉친구였다. 오로지 키와 몸매가 클레어와 닮았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조용히 좀 해.”
율리아의 부모는 범용한 사람이었다. 상재도 없고, 책략가도 아니고, 정치나 학문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지민 상대로나 사교계에서 위세를 부리고 싶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망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가진 땅에서 거두는 소출과 에른스트에서 떨어지는 작은 이득으로 그럭저럭 부유하게 살다가, 똑같이 범용한 아들에게 그 땅을 물려주고, 언젠가는 자연의 이치처럼 사그라질 것이다.
에른스트의 끈을 쥐고서도 이것밖에 하지 못하느냐 싶었다.
황후는 그녀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똑같이 시시한 가족을 두었으나 황후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황후의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베틀이 된 것 같았고, 율리아는 언젠가 자신이 그 베틀에 앉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율리아는 그 베틀 대신 모든 것이 답답하고 시시하던 때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엠마가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었다. 율리아가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문밖에 선 것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은발의 청년이었다.
엠마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움찔하여 물러섰다. 율리아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리누스 전하!”
“황자 전하?”
엠마가 경악하며 물러섰다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리누스는 자신을 따라온 호위들에게 그 자리에 서 있도록 명령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율리아.”
“네.”
율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걸 황후가 지원해 준 일로 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었다.
황후는 리누스 황자를 굳이 자기가 하는 일에 관여시키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직 배워야 할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로는 황자가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율리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누스 황자는 황후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실어 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리누스는 거침없이 상석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머니가 보내신 건 아니야.”
“예?”
“넌 어머니를 그래도 몇 년 모신 걸로 알고 있는데, 열다섯 살 때 떠나서 이제 돌아온 나보다 어머니를 잘 모르는 것 같군.”
리누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