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3/263)

184화

클레어는 노이만 의장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작은 소리로 먼저 돌아가라고 말했다.

노이만 의장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일어섰다. 디트마어의 상태를 확인하고, 경우에 따라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클레어는 그 자리에 남았다. 황후는 차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피로가 광대까지 내려온 것 같은 얼굴이었고, 이제 클레어가 거기에 있든 없든 관심 없는 듯 차의 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리누스는 아마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내면에 침잠해 있는 모습은 확실히 닮았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클레어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황후의 시선이 슬쩍 그녀 쪽으로 올라왔다.

“왜 황후가 되기로 결정하셨나요? 그러지 않았어도, 하실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았을 텐데요.”

황후는 모자란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 일이 옳든 그르든, 그녀가 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조직하고, 운영할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힘도, 정치력도 넘치게 갖고 있으리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확실히 여자에게 제약이 많은 세상이었으나, 한창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는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성공이 생기는 법이다.

농노의 자식이 변호사가 되고, 귀족의 딸이 가수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지주가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마차꾼이 큰 우편 업체의 사장이 되며, 금광을 발견한 탐광꾼이 떵떵거리는 거부로서 신사 클럽의 문을 두드린다.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회는 많은 세상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에른스트 공녀였다. 신분이 성별의 제약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었을 것이고, 실패에 대한 안전망도 되었을 것이다.

더러운 일에 이렇게까지 손 담글 필요는 없었다.

황후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반대로 묻고 싶군. 왜 안 되지?”

“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그렇다고 선조로부터 받은 명예라는 걸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걸렸다.

“신념이 있어서 그것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자부심은 있는데 그에 걸맞은 품격은 없으며, 자리에 맞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운 좋게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밖에 없는 멍청이들을 왜 내가 올려다봐야 하는가?”

황후가 물었다. 클레어는 황당하여 잠시 말을 잃었다.

심지어 그녀는 황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그 말을 한 것이 황후가 아니라면 말이다.

“로멜 우월주의를 퍼뜨린 분의 말씀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그거야말로 개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핏줄이 품성과 능력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준 것이지. 일종의 신분 상승을 시켜 준 셈이야.”

황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리석음의 증거 아닌가. 제대로 된 눈을 갖고 있다면, 직접 보고 자신의 머리로 판단해야지. 생각한 대로 왜곡해서 보는 게 아니라.”

“…….”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능력 있는 자가 위에 서는 것이 당연하고,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의 말을 따르는 게 옳아.”

“요컨대, 황후 폐하께서는 능력 있고 현명하시니, 황후 폐하 한 분만 위에 설 수 있다면 방법 따위는 무엇을 써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클레어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보기엔, 차라리 제 어리석은 사촌인 찰스가 훨씬 현명해 보이는데요. 걔는 자기 그릇이 작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나?”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클레어는 딱히 위선적으로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은 채 덤덤하게 말했다.

“아편을 물려서 일을 시키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라고 할 수 없죠. 진한 차에 설탕과 얼음을 타서 배급하는 게 당장의 능률도 높을 거예요.”

“…….”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항 세력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하신 일이라면, 그거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겠어요? 어른은 쇠약해지다가 죽어 가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어린아이는 줄어들고, 일꾼의 질은 낮아지고 생산성은 떨어지겠죠. 장기적인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빨아먹을 생각만 하는 건 장사꾼으로서도 하급이에요.”

“어떻게 모든 일을 금전적 이득이나 효율로만 따질 수 있겠나. 통치는 그런 일이 아니네.”

“방금 어리석은 자와 능력 없는 자는 노예로 사는 게 효율적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제가 이해력이 달려서 잘못 알아들었을까요?”

황후가 잠시 침묵했다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남작의 노여운 심정은 이해하네.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고, 하물며 아이까지 걸려 있으니 용납하기 쉽지 않겠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기꺼이 사과하겠네. 나는 이 이상 남작을 건드릴 생각이 없어. 그것만은 믿어 줬으면 좋겠군.”

“글쎄요, 당장 오늘 밤만 해도 저와 람스베르크 의원을 엮어서 추문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황후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내 탓이로군. 미안하네. 시녀가 어리석은 계획을 세운 거야. 어차피 타블로이드지는 모두 남작이 잡고 있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네.”

“그런가요?”

“남작은 이득과 비용을 계산할 줄 알지 않나. 남부 아렌을 기꺼이 내주겠네. 우리가 손을 잡으면, 나머지는 전부 쓸어 단두대 밑에 버려도 될 거야.”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이기는 쪽에만 칩을 걸거든요.”

그 말에 황후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노한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피식 웃었다. 십수 년간 세상 전부를 자의식에 봉사시켜 온 나르시시스트가 무려 사과와 양보의 말을 입에 담았는데 거절했으니,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막후의 권력자로서 본인이 가장 강하고 현명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을 다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승자는, 저도 황후 폐하도 아니라 람스베르크 의원이 될 겁니다. 역사는 그의 이름을 기록하겠죠.”

“그게 진심인가?”

황후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남작을 너무 고평가했군. 그렇게 생각하고 의원을 살리자고 이렇게 찾아와 자기 패를 까다니.”

“아뇨. 사실 람스베르크 의원이 아니라도 왔을 거예요.”

죽어 마땅한 놈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 사람은 살릴 가치가 있고 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클레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하신데, 너무 오래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후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참, 그리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건 자연의 이치가 아니랍니다. 인간 세상이 야만적일 때 하는 말이지. 선량한 코끼리가 토끼를 잡아먹진 않겠죠.”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황후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 막시밀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본인의 말마따나 세상이 약육강식이라 해도, 우리가 잡아먹힐 만큼 약한 것도 아니잖아요.”

클레어는 가볍게 말했다.

비열한 수단을 쓸 줄 몰라서 안 쓰는 게 아니다. 클레어는 지금 당장이라도 에른스트를 말려 죽일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똑같은 수준이 될 순 없지.’

그러지 않는 것은, 말려 죽인다는 것은 밑에서부터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황후의 자리를 클라우제너가 갈아 치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게 개인적인 승리나 복수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도리가 아닌 짓을 막으려는 수단으로, 그 도리에서 어긋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44. 폭동, 혹은 음모

황후궁 정문 앞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리누스였다.

클레어는 조금 놀랐다. 돌아왔으니 황후궁에 있는 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말이다.

리누스가 가볍게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만이야, 클레어. 클라우제너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앞에 있기에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군.”

“그러게, 오랜만이네.”

클레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혼여행 중에는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떠나보내고 나니 또 그렇게 생각했던 게 미안해서 조금 마음에 걸렸다.

솔직히 황후를 직접 만나고 나니 불쌍한 마음이 더 들기도 했다.

“이 새벽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니?”

“음.”

리누스가 잠깐 망설였다. 그러더니,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바래다줄게.”

“뭐? 지금?”

“어딜 다녀온 건지, 여기서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

리누스가 먼저 걸음을 옮겨 마차 문을 열었다. 클레어는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얘 사람 싫어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친절해?’

그러나 굳이 거절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차에 올랐다. 오랜만이니까 잠시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그녀도 할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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