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리누스가 그녀의 건너편에 올라앉았다. 막시밀리안이 마차 문을 닫았다.
“갑자기 떠나서 좀 걱정했었어. 별일 없었지?”
“없다고 하기엔, 요즘 수도 상황이 너무 처참하지 않나? 오늘 밤 일도 그렇고.”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누스가 뭘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왜?”
“아니. 새벽인데 네가 날 보고도 놀라지 않았구나, 하는 걸 지금 깨달았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들었어.”
리누스가 미소를 지었다. 전에 보지 못한 태도라 클레어는 이번에도 조금 놀랐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예민했던 기질이 좀 진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수도에서의 생활에 가면을 써야 하기에 그러는 건지 클레어로서는 알 수 없었다.
후자라고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일 때문에 나갔다 오는 길이기도 했고. 편지를 써야 하나, 방문 신청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잘되었지.”
“네가?”
클레어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리누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리누스가 황자라고는 해도, 얘 이래서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나 싶을 만큼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황후는 어차피 아들 손에 실권을 맡길 마음이 없겠지만 말이다.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이 시국에 그동안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황후 손에 붙들려 공부라도 하고 있으려니 했다.
하지만 리누스는 약간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별건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리 뜸을 들여?”
“후원하는 하원 의원이 납치됐다며. 내가 돌려보냈어.”
“아.”
클레어는 눈을 깜박거렸다. 진짜로 예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리누스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되물었다.
“안 믿겨?”
“아니야. 안 믿는 거 아니고, 좀 의외라서.”
안 그래도 삐뚤어진 구석이 있는 어린애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며 클레어는 얼른 대답했다.
아우구스타와 황후의 태도가 이상했던 것을 이제야 좀 이해할 수 있겠다. 시간을 끌려던 이유도. 이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을지를 먼저 확인했어야 할 테니까.
‘공자도 자식새끼는 어떻게 못 했다더니.’
아마 응접실로 왔을 때 황후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할 작정을 했을 것이다.
클레어는 자신의 패를 헛되이 까서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디트마어의 목숨이다. 최선의 결과가 있으니 되었다.
연꽃 이궁과 레만 백작가의 명의로 된 안가를 강제로 열었다면, 사태는 황후와 클라우제너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클레어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러핑이 통하지 않았다면, 혹은 아우구스타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클레어는 진심으로 말했다.
“고마워.”
“…….”
리누스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애써 입을 떼듯이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사람이잖아.”
그 말에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착하네.”
“…….”
리누스가 다시 조용해졌다.
환심을 사려고 한 일이긴 했다. 율리아가 하는 짓이 짜증 났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그 말에 가슴속이 마구 흐트러졌다. 리누스는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고마우면 보답해 줘.”
“보답?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리누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다섯 살인 줄 아나.”
“비슷하지 않나? 어른은 다섯 살짜리한테 질투 안 해.”
“……내가 언제.”
“아니었니?”
클레어는 옅은 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리누스가 ‘하’ 하고 헛웃음을 쳤다.
에리히가 그러면 혈압이 치솟거나 상대의 혈압을 치솟게 했다는 사실에 즐거운데, 리누스가 그러는 건 그냥 좀 웃겼다.
“보답으로 뭘 원하는데?”
“아침.”
“아침?”
“언제든 같이 먹어 준다며.”
리누스가 토라진 듯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랬지. 아마 간단한 것밖에 없을 텐데 괜찮아? 요즘에 나 혼자밖에 없어서.”
클레어는 시계를 확인하고 물었다. 어느덧 6시가 넘어 있었다. 평소 아침 식사 시간보다 좀 이르지만, 주방이 일을 시작했을 무렵이다.
“언제부터 나한테 메뉴를 물어봤다고.”
“뭘 줘도 안 먹는다고 하는 건 네 쪽이잖아. 요새는 제대로 밥 먹고 있어?”
“별로.”
“그런 것처럼 보인다. 살이 하나도 안 붙었네.”
클레어는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생각나는 거라곤 역시 전생에 먹었던 것밖에 없었다. 속은 더부룩한데, 일찍 일어나서 움직인 탓인지 배는 고프고, 당이 떨어졌는지 머리도 좀 어지러웠다.
흔히 아침으로 나오는 감자 수프와 베이컨, 버터 바른 토스트 같은 걸 생각하자 속이 뒤집어졌다.
“욱.”
“클레어? 몸이 안 좋아?”
구역질을 하자 리누스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클레어는 괜찮다고 손을 내젓고, 말했다.
“체를 했나 봐. 공복에 차를 마시기도 했고.”
“식사는 제때 챙겨야 한다고 잔소리는 혼자 다 하더니.”
“긴급 사태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클레어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뭐, 죽 같은 걸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바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닭죽 정도라면 가능할까?
곧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라 물러섰다. 막시밀리안이 먼저 내리고, 그다음 리누스가 내려서 직접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그 손을 잡고 내렸다. 요안나가 황급히 다가와 리누스에게 인사를 올린 후 클레어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클레어 님.”
“노이만 의장님 댁에서 온 소식이라면 들었어. 덕분에 일찍 돌아온 거야.”
“그러셨군요.”
“디트마어 경의 상태는 어때? 전해 들었어?”
“약으로 재워져 있는 듯, 지금은 아무리 흔들어도 깨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흡도 느리고 서맥도 있다는데, 그렇지만 당장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요안나가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아아, 그 약…….”
클레어는 염려스럽게 중얼거렸다. 에리히가 마셨던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후유증이 걱정되었다.
‘중독성은 없어야 할 텐데.’
요안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이만 저택에 전령과 호위를 두 사람씩 보내 두었어요. 경시청에서도 저택을 보호할 사람을 붙여 주기로 했고요. 그리고 행방불명인 호위는 아직 찾는 중이에요.”
“잘했어. 고마워.”
“그런데, 리누스 황자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이따 자세히 이야기할게. 아침밥을 달라고 해서.”
클레어는 흘끗 시선을 들었다. 틀림없이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리누스가 예상외로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좀 기다려 줄래? 나는 옷도 좀 갈아입고 해야겠어.”
“얼마든지.”
리누스가 대답했다.
역시 낯설었다. 어려서나 봤던 사촌 동생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서 갑자기 남자 행세를 하려 드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클레어는 집사에게 황자가 아침 식탁에 앉을 것이며, 뭐 좀 부드러운 게 먹고 싶다는 요청 사항을 전했다.
그때였다.
로비의 문이 쾅 소리를 낼 정도로 거칠게 열렸다.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흙투성이가 된 전령이 로비로 달려들어 왔다.
호위들이 그가 클레어에게 달려들지 못하도록 일단 막았다. 전령이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하고 소리쳤다.
“긴급한 일입니다!”
“진정하세요. 무슨 일인데…….”
“알트마이어에서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대량의 폭약을 이용한 테러가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해 놓고 전령이 헐떡거렸다. 숨이 가빠서가 아니라 충격적인 소식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호텔이 반파되었고, 공작 각하와 도련님께서 행방불명 상태라는 전신이…….”
클레어는 거기까지밖에 듣지 못했다.
눈앞이 빙 돌았다.
쿵!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클레어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요안나가 기겁하여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의사를 불러요! 의사! 세상에, 클레어 님, 정신 차리세요……!”
막시밀리안이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어 침실 쪽으로 옮겼다. 요안나와 집사, 고용인들이 그 뒤를 정신없이 따라갔다.
클레어를 침대에 내려놓은 막시밀리안이 경악했다. 엉덩이 쪽을 받쳐 안았던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