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리누스는 클레어를 따라가려 했으나, 침실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에 막혔다. 집사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황공합니다, 황자 전하. 귀부인의 내실이니 부디 이만 물러나 주십시오.”
리누스는 그런 예법이나 예의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나, 쓰러진 여자의 방에 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밖으로 나와 황궁으로 돌아갔다.
공식적인 소식은 닿지 않았는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황후궁의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주방이나 고용인들이 일하기 위해 필요한 구역만 환했다.
들어가면서 그는 마중 나온 시종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쉬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있겠냐. 솔직히 말해.”
리누스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시종이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
“달리아 룸에 계십니다. 휴식을 취하고 계시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아 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리누스는 이미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종이 그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말했다.
“리누스 전하, 황후 폐하께서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여기서 자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달리아 꽃이 새겨진 회의실 문 앞에 호위가 넷이나 서 있었다. 리누스는 차갑게 말했다.
“비켜.”
“황공합니다, 전하.”
“비켜!”
리누스는 다시 말하고 호위를 밀쳐 냈다. 호위들은 애써 문 앞을 몸으로 틀어막았으나, 황자를 강압적으로 밀어내지 못하고 결국 길을 열어 주었다.
황후궁에는 그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릴 때도 그걸 알았어야 했다.
그는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 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황후가 그를 보자마자 피곤한 얼굴을 했다.
“어머니.”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
“엘리엇을 죽였습니까?”
단도직입적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돌렸다.
황후의 얼굴에 더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물러가라.”
“제가 왜 상관할 일이 아닙니까? 저와 약속하신 게 있을 텐데요.”
“내가 이미 너에게 한 가지 양보하지 않았느냐?”
“그게 어머니가 양보한 일입니까? 제가 어머니 계획을 어그러뜨린 거겠죠.”
그 말에 황후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리누스는 모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맞받았다.
“그래. 너 때문에 내 우수한 시녀를 하나 잃었고, 슈폰하임 자작가와의 사이도 곤란해졌다. 그것으로 내 인내심은 이미 다 소모했으니, 이제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슈폰하임 자작가 따위는 버림 패로 써도 아깝지 않으니까 그 시녀가 멍청한 계획을 세웠을 때도 받아들이셨을 텐데.”
“리누스, 네 역할을 다할 게 아니라면, 어린애처럼 떼쓰지 말고 얌전히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엘리엇을 제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애는 죽지 않았다.”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못난 놈! 내가 기어이 널 끌어내게 해야 할까?!”
인내심이 끊어진 황후가 마침내 언성을 높였다. 시종과 호위들이 우르르 달려와 리누스를 둘러싼 뒤 몸으로 밀어내었다. 감히 그 몸에 직접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날 못 믿듯이 나도 널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할 말 없어. 할 일이 없으면 나가서 네가 저지른 일이나 처리하도록 해.”
황후가 차갑게 말했다. 리누스는 자신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을 내며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황후는 눈가를 한 번 쓸었다. 그리고 미지근한 차에 설탕을 들이붓고는 티스푼으로 신경질적으로 휘저었다.
제 자식이 저토록 형편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대체 누굴 닮은 건가. 부모도, 형제도 모두 유약했으나 리누스처럼 예민한 기질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자신이 20년 전에 선택을 잘못했다는 뜻이다.
‘충동 따위에 휩쓸리는 게 아니었는데.’
당도를 높인 차를 전부 훌쩍 마신 뒤에야 황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결국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군.”
송구한 듯 아우구스타가 고개를 숙였다.
알트마이어 저택은 불탔으나 백작 일가는 무사히 피신했고, 아렌 공왕은 외출 중이었다.
황제의 사망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추정되는 시신은 있었으나 화재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번에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황후가 탄식하듯 말했다. 책임을 맡은 하츠펠트 후작가의 요나스 경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결국 호텔 화재도, 알트마이어 저택의 화재도 경이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군.”
“폭약을 사용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만…….”
“호텔 쪽은?”
황후는 물었다.
에리히가 적인 것이 확실해진 이상, 이번에 완전히 제거해 버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호텔을 통째로 전세 내고 직원들을 모조리 쉬게 한 후 클라우제너의 고용인만으로 채웠다. 건물 자체를 봉쇄한 셈이라 밖에서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가능했다면 그녀는 독살이나 조용한 암살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이 때문에도 그랬다. 꼭 리누스 때문만이 아니라도, 아이를 사로잡아 두면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입구를 무너뜨리기 전에는 호텔 안으로 아예 진입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1층에 폭약을 실은 수레 여러 대를 갖다 박고 폭도를 진입시키겠다는 요나스의 제안을 허가했다. 위에는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폭약을 깔았으나, 밑에는 군에서 사용하는 폭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재는 호텔 상층부에서 시작되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린 데다가 혼란이 있었을 테니, 촛불이나 성냥불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나스의 말은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공작도, 아이도 찾지 못했다는 거군.”
“매몰되어 있을 걸로 생각됩니다. 외부에 있던 가신들이 달려들었지만, 제대로 구조 작업이 시작되려면 클라우제너에까지 연락이 닿아야 할 테니까요.”
황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알트마이어 영지의 행정관은 그녀의 사람이었다. 이미 뜻을 전해 두었으니, 적당히 손을 허술하게 한 채 시간을 끌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게 마음에 차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해서 쫓기고 있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다듬을 틈 없이 다음 수를 두어야 하고, 그럴 때마다 허점이 생겼다.
‘내가 실수하고 있는 거지.’
황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클레어에게 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남작의 말이 맞기도 하고.’
단기간이라고 생각하고 권도로 시작했던 일을 20여 년간 끌었다. 임기응변이 쌓이니 균열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승자는 자신이다.
벌레 같은 자들을 모아 목소리를 높이게 한다고 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클레어가 지금 선량하고 자비로운 뜻으로 탁상공론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직 젊고 운이 좋기 때문이다.
‘내가 막후 권력자에 불과하다고?’
지난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것이 누구인가.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황제의 관을 제 머리 위에 올리지 못했다. 고작해야 그 혈통을 가진 장남 따위가 뭐라고.
그렇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녀가 아니리라는 클레어의 말이 뼛속에 박혔지만, 황후는 이를 갈듯 그것을 부정했다.
자신은 그들을 올려다보고 공적을 대신 바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통치는 진정으로 능력 있고 냉철한 사람이 해야 한다.
귀족이랍시고 모인 상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시가에 불을 붙여 놓고 잡담이나 하다가 제게 손해 되는 일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전부다.
하원에는 하나씩 보면 제법 그럴듯한 자를 모아 놓았으나, 날이면 날마다 저희들끼리 싸우느라 해야 할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것을 이끌어야 할 황제는 평범한 귀족 가문의 가주조차도 되지 못할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시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클레어는 자신을 하급 장사꾼이라고 폄훼했지만, 그녀가 이룩한 부 역시 결국 자신이 깐 철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철로와 전신을 깔고, 도로를 정비하고, 우편 사업을 활성화시켰다. 산업은 저절로 발전한 게 아니다.
배우지도 못했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 멍청한 것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편? 노예계? 자신이 하지 않았어도 누군가가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통제하며 나라를 위해 이용한 것이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해도, 인간의 이치라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지.’
황후는 싸늘하게 명령했다.
“황제 폐하의 시신을 정중히 모시도록. 클라우제너 공작은 반드시 찾아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 말뜻을 알아들은 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계엄령을 선포하겠다. 폭동이 일어나고, 황제 폐하마저 그에 휘말려 돌아가셨다니 이보다 더 시급한 사안은 없지.”
“예.”
대답한 가신 하나가 뛰어나갔다.